사본학/Textual Criticism (원문복원학)

사본학과 열역학 제2법칙

משׁה 2009. 7. 30. 03:15

사본학과 열역학 제2법칙

 

신현우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I. “어려움” 측정의 주관성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산복학으로 알려진 학문은 학계에서는 주로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이라고 불려왔다. 이 학문은 그 이름이 주는 인상과는 달리 사본의 특성을 연구하는데 그치거나 성경본문을 비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으며, 원본의 본문(즉 원문)을 복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이것을 “원문복원학”이라고도 부르는 것이 더욱 적합할 것이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우리에게 더 친숙하고 짧은 “사본학”이라는 용어를 “원문복원학”과 동의어로 사용할 것이다.

 

성서학 분야에서 원문(원본의 본문)을 복원하는 학문이 필요한 이유는 원본이 사라지고, 필사본들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필사본들이 대개는 서로 일치하기 때문에 원문을 심각하게 변경시키지 않았다고 여겨지지만, 사본들간의 일점 일획의 차이를 따지며 원문을 복원하는 일은 성경의 일점 일획의 가치만큼이나 중요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역사적 예수에 대한 1차 자료이며, 세계교회가 수납한 정경이며, 인류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성서의 원문은 그 일점 일획도 셰익스피어보다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본학자들은 원문 복원을 위해서 여러 판단기준들을 사용한다. 이 논문에서 필자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방법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lectio difficilior potior, 즉 더 어려운 독법(reading)이 우월하다는 판단기준이다. 이 판단기준은 사본 필사자들이 어려운 표현들을 쉽게 바꾸었을 것이라는 가정에 토대한다. 이러한 가정은 어디서 왔는가? 이것은 실험을 통해서 통계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라 사본학자들의 직관이나 경험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20세기의 신약사본학자들 중에 대표적인 학자인 메쯔거(B.M. Metzger)는 여기서 ‘어렵다’는 말은 사본을 필사한 사람들에게 어려웠다는 뜻이며 사본학자에게 어렵다고 해서 반드시 사본 필사자들에게도 어려웠을 것이라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본학자들이 어떻게 필사자들이 느낀 “어려움”을 측정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증명되지 않은 가정에 토대한 판단기준을 단지 다른 사본학자들이 널리 사용한다고 함께 사용해도 될 것인가? 사용하기로 작정했다고 해도 과연 “어려움”을 어떻게 측정하겠는가? 결국 사본필사자의 주관적 느낌에 호소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러한 사본학에 원문복원을 맡겨도 되겠는가?

 

 

II. Lectio difficilior potior에 대한 역사적 고찰

 

서론에서 제기한 질문들에 대해 논의를 하기 전에, 더 어려운 독법을 선호하는 판단기준이 형성 발전된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알브렉슨(B. Albrecktson)에 의하면, 이 판단기준을 최초로 증명하게 제안한 사람은 클레리쿠스(Ioannes Clericus)이다. 클레리쿠스는 이미 17세기 말(1697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된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 si una ex iis obscurior sit, ceterae clariores, tum vero credibile est obscuriorem esse veram ...

...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가 더 모호하고 다른 것들이 더 명확하면, 더 모호한 것을 더 참된 것으로 분명히 신뢰할 수 있다...

 

유럽대륙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주장은 곧 영국으로 건너가 음미되어 진다. 라틴어를 국제 학술용어로 사용하던 당시의 유럽 학계는 우리가 오늘날 상상하는 것 보다 신속하게 사상을 교류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10년 후에(1707년) 북해 건너편 옥스퍼드에서 존 밀(John Mill)이 비슷한 주장을 한 것이다.

 

더 모호한 〔독법〕일수록, 일반적으로 더욱 참되다. 발생한 다양한 독법들 중에서, 더 명확하게 보이는 것들은 당연히 본래적이지 않은 것으로 의심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산본들의 여백으로부터 다른 더 모호한 〔독법들〕의 자리로 기어들어 왔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밀은 클레리쿠스와 동일한 주장을 하지만, 조더 조심스럽다. 클레리쿠스가 “분명히”(vero)라는 단어를 쓰며 확신을 표현한 반면, 밀은 영국인답게 “의심될 수 있다”라는 안전한 표현을 쓴다. 또한 명확한 독법은 본래는 사본의 여백에 쓰여진 설명이었을 수 있다는 이유를 댄다.

 

흔히 우리는 더 어려운 독법을 선호하는 원리가 현대 신약사본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독일학자 벵엘(J.A. Bengel)에 의해 최초로 제안되었다고 알고 있지만, 그 이전에 이미 네덜란드와 영국에 이 원리는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벵엘이 이 원리를 제안한 것은 암스테르담에서 클레리쿠스가 이를 발표한 지 29년이 지난 후(1725년)였다. 그러나, 벵엘이 제안한 원리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더 어려운 독법 선호의 원리와 흡사하다.

 

proclivi scriptioni praestat ardua.

더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 더 〔이해하기〕쉬운 표현보다 선호된다.

 

이전에는 ‘모호한’이라는 단어로 모호하게 표현된 것이 이제 ‘더 이해하기 어려운’이라는 표현으로 명확하게 되어진다. 더 어려운 독법이란 벵엘에 의하면 결국 이해의 난이도가 높은 독법인 것이다.

 

이러한 벵엘의 제안은 18세기 말에 그리스바흐(J.J. Griesbach)에 의해 다시 명확하게 진술된다. 그리스바흐는 공관복음문제 연구 분야에서 그리스바흐 가설(마가복음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자료로 사용하여 저작된 것이라는 가설)로 유명하지만, 동시에 사본학자로서도 중요하다. 이제, 그리스바흐의 진술을 살펴보자.

 

Diffcilior et obscurior lectio anteponenda est ei, in qua omnia tam plana sunt et extricata, ut librarius quisque facile intelligere ea potuerit.

더 어렵고 모호한 덕법은 모든 것이 명확하고 분명하여 모든 필사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독법보다 선호되어야 한다.

 

그리스바흐에 와서야 “더 어려운 ”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는 또한 클레리쿠스가 사용했던 “더 모호한”이라는 말도 전승하여 그의 용어 “더 어려운”과 병합시킨다. 그리고, “더 어려운,” “쉬운”등은 필사자(librarius)에게 더 어렵거나 쉬운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확실히 했다. 우리는 위에서 메쯔거가 동일한 지적을 한 것을 읽었다. 해 아래 실로 새 것이 없는지, 메쯔거는 그리스바흐가 이미 18세기 말에 지적한 것을 20세기에 다시 반복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필사자에게 어려웠거나 쉬었다는 것을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어려움”이라는 것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그리스바흐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praeferatur aliis lectio, cui sen년 subest apparenter quidem fal년, qui vero re penitius examinata verus esse deprehenditur.

잘못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이지만, 더 철저히 살펴보면 실제로는 참되다고 인식되는 독법은 다른 것들보다 선호된다.

 

“어려움”의 측정은 주해(exegesis)의 과정에서 드러난다. 처음에는 잘못된 것으로 보이다가 주해를 할수록 깊은 의미가 드러나는 독법이 본래 저자가 기록한 것일 수 이Tek. 이처럼 사본학은 사본마다 다른 여러 독법들의 의미를 주해하는 활동을 통해 원문을 복원하는 주관적인 지적 활동인 것이다.

 

그리하여, 더 어려운 독법을 선호하는 판단기준의 사용은 결국 사본학자의 주관적인 주해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관성이 제 멋대로의 자의성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학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학자들의 상호주관성(학자들의 주관성의 상호일치)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의 상호주관성도 시대정신, 시대의 한계, 또는 학계의 페러다임 속에 갇혀 있을 수 있다. 더욱 설득력 있는 설명이 다음 시대의 학자들에 의해 나와서 오늘날의 통설을 뒤덮을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남아있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도달하는 사본학적 결론은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향한 한시적인 안내자일 뿐이다.

 

 

III. 사본학과 열역학 제2법칙

 

라틴어로 신학이 토론되던 18세기의 유럽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이제 20세기로 넘어와 현대사본학 이야기를 다루어 보자. 현대성서번역학의 대부인 나이다(E.A. Nida)는 성서번역학계에서 가히 신화적인 존재이다. 그가 성서를 번역하면서 원문을 복원하는 사본학에도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지만, 그가 사본학에 기여하고자 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는 더 어려운 독법을 선호하는 판단기준과 열역학 제2법칙의 우사성을 인지하였다.

열역학 제2법칙인란 우리에게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질서 있는 에너지가 점점 줄어들고, 에너지의 무질서도(엔트로피)가 점점 증가한다는 법칙이다. 나이다는 산본학에서 사용하는 더 어려운 독법 선호의 원리가 실은 물리학에서 발견된 일반원리의 적용이라고까지 진술한다.

 

이 〔더 어려운 독법에서 쉬운 독법으로의〕평준화 과정은 ... 놀랍게도 더운 물 주전자가 방에 놓여졌을 때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주변 온도를 취할 Eo, 일어나는 현상과 유사하다. 이 법칙의 다른 예로는 밖에 놓여진 모래 더미에 일어나는 현상을 들 수 있다. 자연의 힘은 ... 마침내 그것은 평평하게 만들어서 그것이 실제적으로 그 주변 환경으로부터 구분될 수 없게 할 것이다. ... 물론 이것이 〔바로〕 본질적으로 필사와 재필사의 과정을 통한 사본의 전승사에서 발생한 것이다. 비일성적이고 독특한 특성들이 제거되는 경향이 있고, 결과적으로 형성되는 본문은 일종의 문헌적 일상성을 획득하게 된다.

 

놀라운 관찰이지만, 이러한 유비가 과연 정당한가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열역학 제2법칙에 더 유사한 것은 오히려 이해하기 쉬운 독법이 이해하기 어려운 독법으로 변하는 과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자들의 조합이 의미를 전달하려는 고도로 조직된 질서를 지녀야 한다. 알파벳의 조합이 의미 있는 단어를 만들도록 일정한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저자의 지적인 작업이다. 저자는 지적 에너지를 사용하며 이렇게 정보를 담은 질서는 전승과정에서 필사자의 실수로 점점 무질서하게 되어 정보를 잃게 될 것이다. 이러한 무질서화 과정은 더 해독하기 어려운 독법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열역학 제2법칙은 사본학에 적용될 경우, 더 어려운 독법보다는 더 쉬운 독법을 본래적인 것으로 선택하게 할 것이다.

 

물론 나이다 자신도 이러한 측면을 알고 있었다: “중복, 생략, 유가영향, 즉 정보 이론(information theory)에 있어서의 심리적 잡음의 효과와 관련지어질 수 있다. 나이다는 열역학 제2법칙을 적용하여 발전한 정보 이론과 사본학 간의 유사성을 지적한 것이다. 정보전달을 방해하는 잡음과 본문전승을 방해하는 필사자의 실수를 연관시킨 나이다의 혜안은 성서번역학의 대부로서의 그의 면모를 다시 한 번 보여준다.

 

그러나, 나이다는 필사자가 고도의 정신 에너지를 투입하여 의도적인 재질서화 작업을 본문에 가하여 본문을 더 쉽게 만든다는 것을 명확하게 지적하지 않았다. 필사자에 의한 사본의 재생산은 단지 기계적이 과정이 아니라 의도적인 변경이 일어나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에서는 무질서화라는 기계적인 현상에도 일어나지만, 재질서화라는 인위적인 현상도 일어난다.

 

물론, 재질서화작용을 위해 필사자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역시 열역학 제2법칙은 적용되고 있다고 하겠지만, 필사자가 만들어내는 본문만을 가지고 말하자면 본문은 무질서해지는 것이 아니라 좀더 이해하기 쉽도록 재배열되고 있으므로 엔트로피(무질서도)가 증가한다고 볼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사자가 독법을 그 본문의 문맥이나 필사자의 환경에 적응시키는 사본필사의 인위적인 측면은 열역학 제2법칙으로 설명되는 물리 현상보다는 환경에 적하는 생명 현상에 유사하다.

 

이러한 문맥(본문적 환경)이나 필사자의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은 본문의 단순화를 유발한다. 즉, 본문에 담긴 본래적 정보는 점점 손실된다. 필사자가 본문을 쉽게 만드는 의도적 변경은 필사자의 실수와 함께 원문에 담긴 원저자와 관련된 정보를 감소시킨다. 이러한 사본학적 현상, 즉 정보의 손실은 열의 손실이라는 물리적 현상과 점차적 손실이라는 측면에서 유사하다. 따라서, 사본학에 있어서의 정보 감소의 원리는 물리학에 있어서의 우주 안에 있는 사용 가능한 에너지 감소의 원리, 즉, 열역학 제2법칙 또는 엔트로피(사용 불가능한 에너지) 증가의 법칙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사본학과 열역학 제2법칙을 비교한 나이다의 유비는 “정보”라는 측면에서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보 이해의 난이도와 함께 정보의 양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은 19세기의 산본학자들에 의해 이미 암시된 바 있다. 19세기 말에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현대 사본학의 초석을 놓은 웨스트코트(B.F. Westcott)와 호르트(F.J.A. Hort)의 진술을 살펴보자.

 

순수한 실수들의 경우는 예외로 하고, 필사자에 의해 발생한 독법들은 ... 실질의 부재와 다듬은 외양을 결합한다.

 

여기서 “실질”(reality)이란 “의미”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더 심오한 의미를 지닌 독법(즉, 더 많은 정보량을 가진 독법)은 덜 심오한 의미를 지닌 독법보다 선호되어야 한다. 이 판단기준은 “심오성의 기준”(the criterion of profundity)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정보를 제한된 단어 수에 담을 경우, 더 적은 정보를 담을 경우보다 더 어려운 독법을 낳을 것이다. 그러므로, 심오성의 기준을 더 어려운 독 선호의 기준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심오성의 기준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독법을 주해해야 한다. 어떤 독법이 더 심오한 의미를 지니는가를 알려면 주해가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사본학은 주해를 필요로 하게 된다. 사본학의 결과는 본문변경을 통해 주해에 영향을 미치지만, 사본학을 위해서는 또한 주해가 필요한 것이다. 이처럼 사본학과 주석학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2:6에서 중성분사형 mei/zo,n(더 큰 것)은 남성분사형 μείζων(더 큰 자) 보다 더 어렵다. 후자는 예수께서 성전보다 크시다는 친숙한 해석에 맞아 들어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사자가 이러한 남성형 표현을 더 어려운 중성형으로 의도적으로 바꾸었을리는 없다. 게다가, 중성형 분사형은 다음 구절에 나오는 중성 명사 e;leoj(자비) 와 함께 더 심오한 의미를 형성한다. 마태복음 12:5-7의 논리는 “더더구나”(qal wa-chomer) 논법이다: 만일 안식일에 제사를 위해 일할 수 있었다면 제사보다 더 큰 자비를 위해서는 더더구나 일 할 수 있다.

 

 

IV. 사본학의 판단기준들간의 모순

 

 

더 어려운 독법을 선호하는 사본학적 판단기준은 필사자의 실수로 생긴 독법을 거부하는 판단기준과 모순이 되는 듯하다. 물론, 정보의 손실이라는 점에서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해도, 정보를 더 담은 어려운 독법인지 정보를 담지 못한 (실수로 생긴) 어려운 독법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사본학자들은 결국 더욱 설득력 있는 설명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데,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이란 것은 그보다 더 설득력 있는 설명에 자리를 내어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사본학은 인간의 설명에 자리를 내어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사본학은 인간의 설명능력이라는 한계 속에서 작용한다. 때로는 이러한 인간의 한계로 인하여 원독법이 오류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히브리대학의 구약 사본학자인 토브(E. Tov)는 이것을 잘 지적한다.

 

모든 필사 오류는 더 어려운 독법을 창출한다. 만일 필사 오류의 분간과 관련하여 합의된 바가 있다면 이 원리를 실제로 사용할 수 있겠지만, 어떤 독법이 필사자의 오류로 생겨났는지 아닌지는 종종 불분명하므로, 더 어려운 독법을 선호하는 원리는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나아가, 더 어려운 독법을 선호하는 판단기준의 타당성에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왜, 더 어려운 독법이 선호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누가 이것을 통계적으로 증명한 것이 있는가? 이것은 단지 직관에 호소하는 가정에 불과하지 않는가? 여기서 우리는 솔직하게 우리의 판단기준이 주관적인 직관에 의존한 것임을 시인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직관이 반드시 틀리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므로, 필사자의 경향에 대한 통계가 필요한 것이다.

 

의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홉즈(E. Hobbs)는 지적하기를 사본들에 차이가 나는 곳이 충분히 많은 경우, 어려운 독법을 일관적으로 선탣하면 결국 이해할 수 없는 본문을 낳지는 않을 것이다. 더 어려운 독법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으로서 너무 어려운 독법은 필사자의 실수로 인해 생긴 것으로 판단될 것이기 때문이다.

 

알브렉슨에 의하면, 어떤 독법이 단지 더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선호될 수는 없다. 그것은 동시에 본문의 문맥에 맞아야 하고 다른 독법들보다 더 나은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 실수로 인하여 더 어려워진 독법을 선호하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해서 문맥에의 적합성과 의미으 깊이를 고려하는 것은 지혜로운 방법이다. 물론, 겉보기에는 더 어렵지만 연구해보면 문맥에도 맞고, 의미도 깊은 독법이 항상 발견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더 어려운 독법은 문맥에 맞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적은 사본학자에게서가 아니라, 공관복음문제 연구 분야의 전문가인 크리스토퍼 터켓(C.M. Tuckett) 교수에게서 나왔다.

그는 어떤 어려운 독법은 문맥에 맞지 않기 때문에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사도행전 12:25을 예로 든다. 여기서 시내산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에 나오는 “예루살렘으로”는 문맥에 맞지 않아서 더 어렵고, 다른 대부분의 사본들이 보유한 “예루살렘에서”는 문맥에 맞기 때문에 더 쉽다. 그렇다면, 이 때 문맥에 맞는 독법을 택하여야 하는 지 더 어렵지만 문맥에 맞지 않는 독법을 택해야 하는 지 판단하기 힘들게 된다. 이처럼 더 어려운 독법 선호의 기준은 사본학의 다른 판단기준인 문맥에의 일치의 기준과도 서로 모순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어느 기준을 따라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V. 사본학과 주관성

 

더 어려운 독법 선호의 기준은 이러한 문제들 외에도 우리가 글을 시작하며 지적한 바 있는 어떻게 “어려움”을 측정할 것인가 하는 기본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다. 물론, 위에 지적한 바대로 주해의 과정에서 “어려움”은 정보의 양이나 이해의 난이도로 다루어 질 수 있지만, 주해라는 것이 매우 주관적인 작업이므로 “어려움” 측정의 주관성을 극복할 수 없다. 알브렉슨은 이를 잘 간파했다: “한 관점에서 더 어렵게 보이는 독법이 다르 s관점에서는 더 쉽게 간주될 수 있다. 한 해 뒤에 구약사본학자 토브도 이점을 잘 지적했다.

 

이 원리의 적용은 너무도 주관적이러서 거의 본문비평학의 원리나 기준이라고 부를 수 없다. 언어적으로나 문맥적으로 어떤 학자에게 어려운 독법이 다른 학자에게는 어렵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토브는 이러한 주장을 하기 이미 1년 전에 네덜란드에서 발표한 그의 논문에서이러한 주관성이 사본학 판단기준 전반의 문제임을 지적한다.

 

Omdat de beoordeling van lezingen subjectief is, heeft men getracht regels samen te stellen, die deze beoordelingen ogenschijnlijk meer objectief maken, Deze regels zijn echter zo abstract geformuleerd en hun gebroik is zo subjectief bepaald dat de beoordeling toch een subjectief procede blijft.

독법들에 대한 판단은 주관적이므로, 사람들은 이 판단들을 더 객관적으로 보이게 만들기 위해 규범들을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규범들은 너무도 추상적으로 진술되었고, 그 사용이 너무도 주관적으로 고정되어서 그 판단은 여전히 주관적인 과정으로 남아 있다.

 

사본학자들이 주관성을 억제하려고 개발한 방법론으로서의 판단기준들이 역시 주관적으로 사용되는 아이러니를 지적한 것이다. 토브는 객관성의 탈을 쓴 학문의 주관성을 잘 지적하였다. 우리가 표준본문으로 사용하는 네슬-알란트 26판이나 27판도 이러한 주관적 작업의 산물임을 인식한다면, 우리가 지금 원문을 복원하여 가지고 있다고 감히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주관성의 한계는 비단 사본학만이 아니라 인간이 하는 모든 학문이 가지는 주관성을 극복하며 객관성을 추구하는 학자 상호간의 동의와 비판을 통한 상호주관적(inter-subjective)인 작업일 뿐이다.

 

이제 서론에서 던진 의문에 답을 해 보자. 사본학에 원문복원을 맡겨도 될 것인가? 그렇다. 왜냐하면 사본학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원문을 복원하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관성을 이유로 더 이상의 사본학을 포기하면 우리가 가진 표준본문을 원문으로 간주하고 만족할 수밖에 없는데, 표준본문은 역시 과거의 주관적 사본학의 결과인 것이다. 우리는 사본학으로 과거의 주관성의 결과를 극복하는 오늘날의 주관적인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우리는 학문으로 객관성에 도달할 수 없고, 사본학으로 원문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어제보다 오늘 원문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다.

 

VI. 필사자와 사본학자

 

우리는 서론에서 사본학에서 ‘어렵다’는 말은 사본필사자들에게 어려웠다는 뜻이며 사본학자에게 어렵다는 뜻은 아님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사본학자들이 어떻게 필사자들이 느낀 “어려움”(difficulty)을 측정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문제는 재세례파 계통의 신약학자인 데이비즈(P.H. Davids)에 의해 역사적 예수 연구 분야에서 이미 제기된 바 있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 신약 학자들이 어떤 예수님의 말씀이 성경저자들에게 신학적으로 어려웠는지 확실히 알만큼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마찬가지로 사본학자는 필사자가 어떤 독법에 대해 어려움을 느꼈는지 알만큼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사본학자는 피할 수 없이 주관적 판단을 할 수밖에 없고 그 판단에는 신빙성의 문제가 따르는 것이다.

 

사본학자와 필사자 사이에 놓인 이러한 깊은 강을 건널 수 있는 희망은 오직 사본학자와 필사자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으로서의 공통성이라는 다리뿐이다. 이러한 공통성이 없다면 인산 상호간의 의사소통도 불가능하고, 현대인이 고대인의 작품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사본학자는 필사자와 같은 인간으로서 “어려움”에 대해 필사자와 비슷한 판단을 내릴 것이라는 가설에 토대하여 사보학은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과정은 필사자가 사본학자의 진단을 듣다가 항의를 할 수 없기에 일방적이고 주관적이지만, 이것은 여러 사보학자들의 상호비판 과정과 필사 경향에 대한 연구, 다른 원문판단기준들의 사용 등을 통해서 극복해야 하는 수밖에 없다. 인간으로서의 공통성이라는 다리는 강 중산에서 끊어져 있고, 남은 간격은 직관에 대한 확신으로 뛰어서 건너기에는 너무도 멀고 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