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신학/New Testament (신약신학)

오천 명을 먹이신 광야의 급식 이적(성서사랑방 )

משׁה 2009. 8. 11. 15:56

본문말씀 : 막 6:32-44  
부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심상법 교수

 

<막 6:32-44>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 새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 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 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혹 백씩, 혹 오십 씩 앉은지라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

갈릴리 전도보고를 마친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따로 `한적한 곳`으로 부르셔서 쉬도록 하셨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 데리시고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떠나갔다. 그러나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떠난 것을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은 마을로부터 도보로 갈릴리 호수 주변을 달려 그 곳 빈들인 `한적한 곳`까지 쫓아갔다. 배에서 내리신 예수님은 쫓아 온 큰 무리들이 마치 `목자 잃은 양`과 같으심을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많은 것들을 가르치셨다. 그러던 중에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예수께 나아가 이곳 빈들에는 먹을 것들이 없기 때문에 무리들을 촌과 마을로 보내어 사 먹게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먹을 것을 주도록 말씀하셨다. 난감한 제자들은 어떻게 그들이 이 많은 무리를 먹일 수 있을 것인가를 불평하자 주님은 그들이 떡을 어느 정도 가졌는지를 조사하게 하여 그들이 가진 것들로부터 놀라운 급식이적을 베풀어서 그들을 넉넉히 먹이셨다. 바로 이 사건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빈들에서 오 천 명을 먹이신 오병이어(五餠二漁)의 급식이적기사이다.

여기서부터 마가는 하나의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고 있다(막 6:32-8:21). 이 단락에서는 특별히 급식이적기사(6:32-44; 8:1-11)와 바다항해기사([4:35-41]; 6:35-56; 8:12-21)가 반복하여 나타나는데 여기에 나오는 주요 사건들은 광야(6:31, 32, 35; 8:4)와 바다(6:47, 48, 49; 7:31), 그리고 배(6:32, 45, 47, 51, 54; 8:10, 14)에서 일어난 사건들로서 특히 떡(αρτοs 6:37, 38, 41[2x], 44, 52; 7:2, 5, 27; 8:4, 5, 6, 14[2x], 16, 17, 19)에 대한 언급이 여러 번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결국 마가는 `배 안에 저희와 함께 있는 떡 하나`에 대한 요약적 표현(막 8:14)으로 이 단락에서 `떡`이 가지는 의미를 잘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단락에서 독자는 이 `떡`이 언급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단락을 이해하는 중심되는 주제로 제시된다.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다음 호에 계속될 것이다.

이 단락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 구약의 배경은 많은 도움을 준다. 즉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광야와 바다 가운데 이적을 베푸신 사건들에 대한 회상은 단락에 언급된 사건들이 가진 구원사적인 의미(좁게는 기독론적인 의미)를 잘 보여준다. 이점에서 우리의 내러티브적인 주해는 구약의 배경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결국 이 사건들을 통해서 마가는 독자로 하여금 마가복음의 전반부의 결어와 같은 역할을 하는 `예수가 누구신가`에 대한 의문으로 나아가게 한다(막 8:27 이하).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계속되는 주해에서 살펴보는 대로 이 단락(특별히 7장을 전환점으로 하여)은 복음이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동일한 축복으로 나타남을 보여주고 있다.

1. 갈등구조에 의한 장면분석

본문의 장면을 갈등구조에 의해 분석하여 보면 아래와 같은 도표로 이해할 수 있다. (도표가 깨졌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우리가 어떻게"

명령과 대답

S1 S2 S3 S4 S5 S6 S7

(32-33절) (34절) (35-36절) (37절) (38-41절) (42절) (43-44절)

발단 전개 갈등 절정 파국 종결 대단원

사건의 발단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잠깐 쉬기 위해서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나아갔는데 거기까지 갈릴리 바다를 둘러서 도보로 달려온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된다(S1). 이렇게 시작된 사건은 자기에게 나아 온 큰 무리를 `목자 잃은 양`과 같이 보셨던 예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겨 그 곳에서 많은 것들 가르치심으로써 발전(전개)되어 간다(S2). 갈등의 시작은 저녁이 되면서 빈들에서의 식사(음식)문제로 일어났는데 그것은 제자들이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것이냐`에 대해 그들을 촌과 마을로 보내어 사 먹게 하자고 예수께 제안함으로써 시작되었다(S3).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심으로써 초기의 갈등은 증폭되어 절정에 이른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러한 명령은 이미 갈릴리 선교 파송에서 언급하신 내용인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6:8)와는 완전히 다른 말씀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제자들은 자신들이 이 많은 사람들을 사 먹일 수 없음을 말함(불가능을 언급)으로써 갈등은 해결될 실마리를 보이지 않은 채 절정(climax)에 이른다: "우리가 가서 [어떻게] 이 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그들을] 먹이리이까"(S4). 이러한 그들의 답변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렇다면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심으로써 갈등은 전환점(turning point)으로 나아갔고 이에 제자들은 가서 알아보니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음을 보고하였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갈등의 상황을 전환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제자들의 보고와 함께 사건은 파국을 향해 나아간다. 드디어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 모든 사람들로 혹 백 씩, 혹 오십 씩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신 후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취하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셨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셨다(S5: 파국). 결과적으로 이곳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다(S6: 종결). 그리고 떡을 먹은 남자가 오 천명이나 되었다(S7: 대단원).

2. 사건의 배경

1) 사건이 일어난 시간과 장소 : 저물녘의 `한적한 곳` 혹은 `빈들`(wilderness)

오병이어의 급식이적이 일어난 장소에 대해 마가는 명확한 지명을 언급하지 않고 단지 `한적한 곳` 혹은 `빈들`(ερημοs τοποs)로 표현하고 있다.

본문에 언급된 이곳은 예수께서 열 두 제자들을 데리시고 배를 타고 가신 갈릴리 바다 서쪽 편의 어떤 유대지역으로 추정된다(Wefald 1995:10). 여기서 독자는 비록 저자(마가)가 지명은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간 곳이 `한적한 곳` 혹은 `빈들`이었음을 반복된 언급(31-32, 35절)을 통해서 잘 알게 된다. 그런데 35절에서 먹을 것이 없는 황량한 곳임을 강조하여 표현한 `빈들`(ερημοs)이 나중에 `푸른 잔디`(τωχλωρω χορτω)로 마가가 언급하고 있는 점(39절)은 특이하다. 특별히 구약을 잘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 `한적한 곳`(광야)에서 벌어진 오병이어(五餠二漁)의 급식이적의 사건은 구약의 이와 유사한 사건들과 관련하여 많은 점들을 생각나게 해 준다(Garland 1996:253-256).

구약에서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자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너서 도착한 곳으로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주시며 쉼(안식)을 주셨다(출 16 장; 시 78:18-30; 105:40). 급식이적과 관련하여 선지자 엘리아와 엘리사의 먹이심의 이적도 이와 유사한 모습을 띈다(왕상 17:8-16; 왕하 4:42-44). 선지서를 보면 이 광야가 종말에 푸른 초장으로 변하여 양들이 풍성한 꼴을 먹게 되는 것으로 자주 묘사되기도 한다. 특히 시편 23편(cf. 사 40:10-11)의 `목자의 시`의 영상(목자와 양; 부족함이 없음; 푸른 초장; 물가; 쉼)은 본문이 언급하는 사건의 의미를 확대·설명해 주는 해석적 배경으로 제시될 수 있다(Gundry 1993:328; Garland 1996:255-256).

오 천명을 먹이신 광야의 이 이적은 예수를 구원자(목자)로 믿게 하는 표적(cf. 요 6:30)으로서 예수님은 지금 종말론적인 구원자(메시아)로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따르는(좇는) 양들을 풍성히 먹이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다. 요한복음의 영상과 해석을 빌리면 이 사건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메마른 광야의 생을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부터 내려 온 떡`(요 6:32-40)으로 그를 믿는 자(그의 살과 피를 마시는 자)는 풍성한 삶을 얻는다(요 10:10). 결과적으로 오 천명을 먹이시는 광야의 급식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어떠한가? `새로운 출애굽`(New Exodus)으로 인한 종말론적인(메시야적인) 축복의 삶과 향연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러한 성경적인 반향과 영상들은 다음의 몇 가지 관점들을 통해서 그것의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1) 예수님을 좇아 -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막 6:33) ; 빈들로 달려나온 무리들의 모습은 마치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모세를 따라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과 유사하다.

(2)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34절) : `목자 없는 양` 같이 애굽에서 고통을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세와 여호수아(구원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아 보호하시고 먹이신 것(민 27:15-23)처럼 이제 예수님은 진실로 왕(목자)을 상실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약속(겔 34:23-25)대로 종말론적인 목자-왕-구원자로 나타나셨다(다윗 같은 목자). 결국 이 목자(왕)는 그 양들(백성)을 위해 자신이 대신 맞으심(슥 13:7; 막 14:27)으로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신다.

(3) 불쌍히 여기심(34절) : 여기 언급된 `불쌍히 여기심`은 `메시아[목자]의 긍휼(σπλαγχνα)`로 이해된다. 특히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은 그들을 먼저 가르치심으로 그들의 영적 필요를 채웠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먹이심의 사역은 그들의 육체적인 필요에까지 관심을 가지시는 참된 목자의 모습을 본다.
(4) 예수께서 보이신 가르치심과 먹이심의 사역은 구약에서 보는 대로 목자의 사역으로 제시되어진다.

● 가르치심(34절) :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가르치신 것처럼 지금 예수님은 광야에서 자기를 따른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무리를 가르치셨다.

● 먹이심(35-44절) : 광야에서의 먹이심의 사역은 모세를 통한 구원자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임과 동시에 선지자들(엘리야와 엘리사)의 사역이기도 하였다. 다 배불리 먹고 열 두 광주리나 풍성히 남은 사건은 이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먹이심의 사역의 과정에 기술된 표현들은 주의 성찬의 과정에서 서술된 것과 유사한 표현(막 14:22; cf. 고전 11:23-24)임을 본다(가지사 -> 축복(감사)하시고 -> 떼어 -> 나눠 줌).

3. 사건과 관련된 등장 인물의 이해 : 예수, 제자들, 무리

급식이적의 사건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은 세 부류로 중심 인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그를 좇아 온 무리들이 이적기사의 참여자들로 나타난다. 특히 사건의 중심이 되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담은 독자로 하여금 그들의 현재의 삶에 깊이 반추되는 교훈(도전)으로 남는다.

1) 중심 인물 : 예수
본문의 급식이적 사건을 통해서 독자는 오병이어로 자기에게 나아온 무리를 넉넉히 먹이시는 예수님은 그 따르는 양들을 부족함 없이 먹이시는 목자(왕이며 구원자)로서 결국 이 예수는 종말론적인 목자(왕이요 구원자)이신 메시아이심을 알게 된다. 관련되어진 구약의 사건들에 비추어서 독자는 예수의 참 모습(구원자며 목자이신 예수)을 추론하게 된다.

● 구원자 예수는 모세와 엘리야, 엘리사 보다 더 크신 분
이미 우리는 이 사건이 구약의 사건들(광야의 먹이심의 사건과 엘리야, 엘리사의 먹이심의 사건)과 어느 정도 연관되었음을 보았다.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구원자` 모세를 통해서 광야에서 그 백성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고(출 16:8 ff; 민 11장), 엘리야를 통해서는 가난한 과부를 먹이시고(왕상 17:8-16), 엘리사("나의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를 통해서 보리 떡 이십과 자루에 담은 채소로 기근이 들린 일 백 명의 무리를 이적적으로 먹이셨다(왕하 4:42-44). 이제 선지자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종말론적인 구원자(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나아 온 이곳 한적한 곳(광야)에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 명(이상)의 무리를 넉넉히 먹이심으로써 인간 구원자 모세와 엘리야, 엘리사 보다 더 크신 분(`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구원자)이심을 입증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종말론적인 참된 구원자로 오셔서 양식이 없이 기근 들린 인생을 풍성히 먹이신다(cf. 사 55:1-2). 이 구원자 예수는 또한 참된 목자로서 제시된다.

● 목자(牧者)이신 예수
자기에게 나아 온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목자 없는 양`으로 보시며 그들을 가르치시고 풍족히 먹이신 예수님은 `목자(牧者)의 시(詩)`에서 시인이 노래하는 바로 그 목자(시 23편)이심이 분명하다. 시편 23편에서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예수는 자신의 양들을 부족함이 없이 먹이셨다(시 23:1; cf. 요 10:10). 즉 자기에게 나아 온 무리들(양들)을 푸른 초장에 앉게 하시고(누이시고) 그들을 이적적으로 먹이셨다(막 6:39; cf. 시 23:2). 특히 한적한 들판(광야)이 푸른 초장으로 변한 모습은 종말론적인 목자가 도래한 모습임이 명확하다(막 6:32-33, 35, 39; cf. 시 23:2).
이처럼 예수님은 그 당시의 그릇된 목자들(왕들, 지도자들)에 의해서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수탈(기근)을 당한 양들(`목자 없는 양들`로 지칭됨)을 가르치시고 먹이시는 모습은 선지자들이 말한 종말론적인 바로 그 목자(다윗과 같은 목자)의 모습(겔 34:23)이기도 하다. 특별히 자신은 먹을 기회를 갖지 못하고(31절; cf. 막 3:20) 양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모습(41-42절)은 겔 34:2 이하에 언급된 `자기만 먹이고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않는` 그릇된 목자와는 정말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다. 겔 34장에서 참된 목자는 하나님으로 소개되었고(15절), 이 목자는 다윗과 같은 목자의 모습을 취한다(23절). 에스겔이 제시한 모습처럼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목자로서 메시아)이시다(막 1:1). 목자이신 이 예수를 통해서 양들은 풍성한 꼴(생명)을 공급받는다. 그는 진실로 우리의 `떡`이 되신 목자이시다. 단순히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몸(`살과 피`)을 대속물로 주심으로써(막 10:45) 양들을 먹이시는 `그 떡`이신 목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 6장에서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으로 묘사되었다).

막 6-8장으로 이어지는 단락 전체에서 보는 대로 `배 안에 계신 그 떡`(막 8:14)이신 예수님은 우리(교회)의 구원자로서 풍랑(風浪)이 이는 `바다`를 잠잠케 하시고 그 바다를 건너게 하실 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우리를 먹이시는 분이시다. 거친 풍랑이 있는 바다를 건너시고 또한 바다 위를 걸어오신 사건(바다항해기사)과 먹이심의 사건들(급식이적기사)을 함께 대하는 독자는 그가 진정으로 `배 안에 계신 구원자(떡)`이심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뒤에 마가가 지적하는 대로 제자들은 이 예수를 바로 깨닫지 못하였다(8:14-21).

이점은 독자에게 커다란 도전으로 남아 있다. 특히 거센 환난과 시련으로 인하여 두려움 가운데 있는 마가복음의 청중은 이 기사를 들으면서 과연 자신들이 따르는 예수가 누구신지 다시 한번 마음 깊이 반추하게 될 것이다. 이점은 오늘의 독자에게도 마찬가지다. 과연 `예수는 누구 신가`. "(세상)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 앞에 독자는 어떻게 답변해야 할까?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제자들을 책망하시는 주님의 외침은 어쩌면 이 글을 읽는(듣는) 독자의 심장에 던져진 비수 같은 질문이다.

2) 제자들: "우리가 가서 [어떻게] 이 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그들을] 먹이리이까"

제자들의 제안(35-36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하였을 때 제자들은 "우리가 가서 [어떻게] 이 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그들을] 먹이리이까"라고 답변한다. 예수님의 지시(指示)는 그 의도에 있어서 매우 아이러니컬하다(van Iersel). 앞에서는 그들로 하여금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막 6:8)고 하셔 놓고 여기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니 이것은 정말 웃기는 일 아닌가?
그러니 제자들이 `우리가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겠다. 여기서 제자들의 답변은 그들 자신의 한계(불가능함)를 표현한 말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문맥을 살펴보면 그들은 이 말씀에 숨어있는 예수님의 의도를 잘 깨닫지 못한 것 같다. 여기서도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적적인 능력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이 기사는 앞의 이적기사들과 이어지며 그 의미는 상호 관련되어 있다). 이미 앞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들을 많이 보았음에도 여전히 그들의 기억과 깨달음은 둔하고 무지하다. 특히 그들은 풍랑을 잠잠케 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았고, 또한 거라사에서 귀신을 쫓아내신 일이나 12년 간의 고질병을 가진 혈루증 여인과 12살 먹은 야이로의 죽은 딸을 고치신 그 놀라운 능력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억은 둔하고 그들의 깨달음은 여전히 더디다. 이처럼 마가복음에서 제자들은 `잘 깨닫지 못하는 인물` 혹은 `더디 깨닫는 인물`로 제시된다. `한적한 곳`(광야)에서 이 많은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는 존재는 구약에서는 아마도 엘리야(왕상 17:8-16)나 엘리사(왕하 4:22-24)의 모습으로 제시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제시되어진다. 이점을 출애굽의 기사가 잘 입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 앞에서 자신들의 부족과 함께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어야 하였다. 이점에 있어서 제자들은 무지와 불신앙의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은 마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달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리라고 말씀하였을 때 모세가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 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일 개월 간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민 11:21-22)라고 불평을 하였던 그 모습과 유사하며, 또한 엘리사가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가져온 처음 익은 식물 곧 보리떡 이십과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가지고 그의 사환에게 무리(100명의 선지자의 생도들)를 먹이라고 하였을 때 "어찜이니이까 이것을 일 백 명에게 베풀겠나이까"(왕하 4:43)라고 불평한 그 사환의 무지와 불평의 모습과 유사하다.

특별히 민 11장에 나오는 사건의 경우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민 11:23)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모세의 무지함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과 마찬가지로 광야에서 무리를 먹여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였을 때 제자들은 이 사역이 하나님의 사역이심을 깨닫고 예수님께 혹은 하나님께 이것을 요청해야 하지 않았을까? 제자들의 이러한 불신앙의 모습은 마가복음을 읽는(듣는) 독자들(교회)에게 또한 큰 도전으로 남는다. 특별히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은 이미 예수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던 이들(1:16, 20; 10:28)에게 또한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6:8)고 명하셨던 상황을 고려한다면 독자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로서 극적 아이러니를 산출한다. 그리고 이 말씀은 또한 독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신뢰하여야 하는 신앙의 도전으로 남았을 것이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주님의 이 명령은 오늘 우리의 교회가 세상 가운데 `먹을 것을 주어야 하는 사명` 즉, 급식의 사역이 주어졌음을 깨달아야 한다. 교회는 이 세상 가운데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육적으로도 굶주린 사람들을 먹여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이 세상 가운데 "가르치고 먹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어쩌면 최근의 `밥 퍼주는 사역`이 바로 이러한 사역을 잘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아 보라`는 구약의 명령은 여전히 신약의 교회에게도 유효한 명령이다(약 1:27). 걸식자, 노숙자, 외국인 노동자, 결식아동, 탈북자 등에 대한 교회의 급식 사역은 말씀전파와 가르침의 사역과 함께 병행되어야 한다.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을 보면 초대교회는 말씀(전파와 가르침)과 구제(급식)의 사역이 항상 병행되었음을 본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주된 모습이었을 뿐 아니라 바울과 초대교회의 사역의 주된 면이기도 하였다. IMF를 겪고 있는 오늘의 사회는 급식사역에 대한 교회의 실행을 더 없이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주님의 이러한 명령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수행해야 할 시효이며 적절한 명령이다.

3) 무리들 :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

자기에게 나아 온 무리들을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으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그 당시 지도자들에 의해 수탈 당한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한다. `목자 없는 양`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일찍이 에스겔 선지자에 의해 잘 지적되었다. 겔 34:2-6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며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내 양의 무리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 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의 무리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예수님 시대에도 지도자의 모습과 백성들의 모습은 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강도들`(막 11:17)로 지칭된 종교 지도자들은 또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막 12:40)이었다. 이미 역사에서 알려진 대로 헤롯왕은 많은 건축과 로마에 대한 조공으로 인하여 백성들에게 엄청난 과세를 물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주님께로 몰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나아 오는 각종 병인들을 돈 없이 값 없이 고치시고 죄 용서를 선언하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병을 고침 받기 위해서, 축복을 받기 위해서 몰려든다. JMS에 10만 명의 사람들이, 이재록씨의 교회에도 6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든다. 병 고침과 축복의 미명 하에 이들 수많은 무리들(양들)은 수탈을 당하고 소위 그들 목자들은 자신들을 먹이기에 바쁘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 교회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하며 방황하는 세상 사람들을 올바로 가르치고 먹이는 사역을 계속해야 하지 않을까?

오천 명을 먹이신 광야의 이 사건은 과거의 출애굽의 구원사역과 예수의 구원사역을 돌아보게 해 줄 뿐 아니라 또한 미래의 종말론적인 메시아의 잔치(어린양의 잔치)를 바라보게 해준다. 즉, 이 사건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신 출애굽의 사건과 예수의 죽음과 관련된 주의 성찬을 회상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또한 미래의 종말론적인 메시아의 잔치를 예시해 준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베푼 이 광야의 식탁과 향연은 막 6장에 서술된 사악한 왕 헤롯이 베풀고 그 무리들이 참여한 궁중의 사치스럽고 방탕한 식탁과 향연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띈다. `목자 잃은 양`과 같은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먹이시는 빈들의 이 아름다운 향연은 헤로디아의 살해계획과 그의 딸 살로메의 정략적인 춤, 그리고 세례 요한의 목이 소반에 담겨 나온 궁중의 그 향연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전자의 향연은 사랑과 긍휼이 주된 분위기라고 한다면, 후자는 미움과 살기와 방탕함이 그 향연을 감싸고 있는 주된 분위기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지난 역사에 있었던 궁정동의 향연과 유사하다. 전자의 광야의 향연은 백성들을 수탈한 타락한 위정자들끼리 먹고 마시는 사치스럽고 방탕한 향연과는 달리 돌봄과 먹이심이 있는 향연이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어떤 향연에 참여하며 즐거워하는가? 죄악의 낙을 즐기는 불의와 사치와 방탕의 향연인가 아니면 의와 사랑과 긍휼로 차려진 향연인가?

시편 기자의 고백(시 1:1)처럼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하였는데 과연 우리는? 주님과 함께 광야의 길로 나선 우리들은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더냐"고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이 들판의 잔치는 결국 겸손한 왕 예수께서 `목자 잃은 양`과 같은 우리를 먹이시기 위하여 자신을 주심으로써 그 절정에 이른다. 즉, 자신을 속죄물로 주심으로써 우리는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풍성한 삶을 누린다(요 6장; 요 10:10을 보라).

4. 나가면서

우리는 마가복음을 통해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하고 방황하는 무리들을 풍족히 먹이시기 위해 자신은 먹을 겨를이 없이 바쁘신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다. 이 예수는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는` 그 당시의 그릇된 목자와는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사셨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대속물로 주신"(막 10:45) 참된 목자로 소개한다. 이 목자는 또한 양들을 대신하여 맞으신 분이시다(막 14-15장). 이미 구약에서 예시한 대로 예수는 그 양들을 먹이시는 하나님의 종 다윗과 같은 선한 목자(겔 34:23)이시다.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신 참 목자이신 예수를 따르는 우리(교회)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교회란 참된 양식을 `먹는 공동체`임과 동시에 `먹이는 공동체`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과연 무얼 먹으면서 살고 있는가? 세상의 썩을 양식인가? 아니면 하늘의 영원한 양식인가?(요 6:27). 일벌과 여왕벌의 차이가 그 음식에 있다고 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연 어떤 양식을 먹으면서 살고 있는가? 지금 세상의 굶주림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므로 인생들이 기갈이 들려있다. 물질적인 풍요 속의 정신적 혹은 영적 빈곤이 바로 오늘의 세상의 기갈 들린 현실이 아닌가? 이러한 상황에 교회는 복음의 바른 음식 곧 생명의 음식을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로부터 지속적으로 받아먹을 뿐 아니라("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이 생명의 음식을 세상에 전하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 또한 기갈 들린 세상 사람들을 먹여야 한다("내 양을 먹이라").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주님의 명령은 영적인 기갈이 들린 세상 가운데에서 교회가 부담을 안고 열심히 실행해야 할 명령이다. 여기에 교회는 말씀의 가르침의 사역과 함께 구제(급식)의 사역을 수행해야 한다.

광야의 잔치(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와 영광과 만족)와 왕궁의 잔치(사악한 사치와 방탕과 살인)를 비교하면서 오늘 우리는 어떤 잔치를 보다 가치 있게 여기고 즐거워하는지 반문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시편 기자의 고백(시편 1)처럼 우리는 진정으로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고 사악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삶"을 사는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과 함께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신 주님의 모습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아보신` 주님이시다. 언제나 약한 자의 편에서 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하신 주님은 죄인과 세리의 친구이신 참 목자이셨다. 이와 같은 주님을 묵상하면서 오늘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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