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파 유대인들(행 6:1-7) 이재철 목사(100주년 기념교회)
헬라파 유대인들(행 6:1-7)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가 일곱 명의 집사를 세운 사실을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집사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diakonos에서 파생된 단어가 봉사란 의미의 diakonia, 즉 영어로는 service가 됩니다. 본래 집사란 흔히 이해하듯이 어떤 특별한 직책의 명칭이 아니라 봉사자를 일컫는 단순한 호칭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서 diakonos가 집사로 표기된 단 세 번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섬기는 자(마20:26)' '사환(마22:13)' '하인(요2:5)' '수종자(롬15:8)' 혹은 '일군(롬16:1)'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집사는 봉사자란 원 뜻에 충실하기 위함입니다.
diakonos-봉사자는 본디 '식탁에서 섬기는 자'란 의미입니다.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자가 온갖 솜씨를 다해 음식을 장만합니다. 그리고 조리가 끝난 음식을 식탁 위에 정성껏 차려 놓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사람이 음식점의 주방장이거나 웨이터라면, 그가 하는 행위를 가리켜 봉사라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그 행위의 대가로 돈을 받기 때문입니다. Service의 대가를 돈으로 지불받는 service charge(봉사료)는 돈을 최우선시 하는 미국적 관습이 낳은 미국식 용어일 뿐, 성경이 말하는 service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service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행위에 대해 사람으로부터 보상을 받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자기자신만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고 식탁 위에 차리는 행위 역시 아무리 성의를 다 한다해도 봉사일 수는 없습니다. 봉사란 본질적으로 타인을 위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식탁준비는 봉사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성의를 다해 음식을 만들지만 자신이 먹기 위함이 아닙니다. 물론 어머니라고 해서 먹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우선 순위는 늘 마지막입니다. 최우선 순위는 항상 가족입니다. 그렇기에 어머니는 손수 음식을 만들되 자기의 입맛이 아니라 가족의 입맛에 맞추어 조리를 합니다. 준비된 음식을 식탁 위에 정성껏 차리지만 자신이 먼저 시작하지 않습니다. 가족이 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 일을 하루 혹은 이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날이면 날마다 중단 없이 계속합니다. 그러나 가족에게 절대로 service charge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족을 위한 어머니의 그 모든 행위는 고스란히 봉사가 되고, 우리가 나이 들어갈수록 어머니라는 말만 들어도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은, 그와 같은 어머니의 봉사의 손길 속에서 우리가 양육되고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봉사를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봉사란 가족을 위해 식탁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심정과 사랑으로 타인을 섬기고 보살펴주는 행위이다'
그리고 집사란 바로 이런 봉사의 삶을 사는 자를 일컫는 성경적 호칭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믿음의 형제들에게 본문 3절 상반절을 통하여 집사의 자격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여기에서 '칭찬듣는다'로 번역된 martureo는 '증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즉 사도들은 집사의 자격으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있는 자이어야 한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참 봉사자이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진정한 봉사자-즉 예수 그리스도의 바른 증인이 될 수 있음이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하여 집사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마다 늘 본문이 인용되곤 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우리에게 주고자하는 참된 메시지는 실은 그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합니다.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실은 모두 집사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곧 봉사자란 의미에서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에서 왜 어느 날 갑자기 집사란 직분을 특별히 세우게 되었는지 그 연유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본문에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이란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다 같은 유대인인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다윗 왕 때에 하나의 왕국이었던 이스라엘은 아들 솔로몬을 거쳐 손자인 르호보암 시대에 남과 북으로 분열되어버리고 맙니다. 그 후 북 왕국은 기원전 722년에 앗수르 제국에 의해, 그리고 남 왕국은 기원 전 586년에 바벨론 제국에 의해 각각 멸망당하게 됩니다. 그때 많은 유대인들이 정복자인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에 끌려가거나 아니면 자발적으로 이스라엘을 떠나 외국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소위 diaspora로 불리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처럼 해외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자연스럽게 기원전 300년경부터 국제 통용어로 사용되던 헬라어 즉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을 떠나지 않았던 유대인들은 그들의 고유 언어인 히브리어-더 정확하게는 아람어를 계속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해외로 이주한 유대인들 중에, 자신이 죽은 뒤에 자신의 유골을 예루살렘 땅에 묻기 원하는 자들이 나이 들어 이스라엘로 귀환하는 경우가 허다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복음을 받아들이고 초대교회의 일원이 된 자들이 많았습니다. 말하자면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유대인들과 헬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디아스포라들이 함께 섞여 초대교회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서로 국내에서만 거주하던 자들을 히브리파 유대인으로, 해외에서 돌아온 디아스포라들을 헬라파 유대인으로 구별하여 불렀습니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들 사이에 히브리파 유대인에 대한 원망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행하는 매일 구제 즉 봉사의 대상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가 제외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디아스포라 출신의 헬라파 유대인들 가운데에는 일가친척이 전혀 없는 과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 수 밖에 없었는데, 교회는 매일 구제와 봉사를 행하면서도 이 헬라파 과부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교회의 구제와 봉사는 가난한 히브리파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헬라파 유대인 사이에서 히브리파 유대인을 향한 원망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의 구제와 봉사를 전담한 자들이 모두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문에 기록된 단어 gongusmos는 단순히 원망을 위한 원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단어는 '나지막이 말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헬라파 유대인들은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옳지 못한 처사를 조용히 거론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헬레파 유대인들로부터 조용히 비판을 받았던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였었는지에 대해 본문 2절이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헬라파 유대인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자들은 다름 아닌 사도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수많은 무리가 운집하기 시작하면서 사도들은 가난한 자들을 공궤하는 것-즉 구호품이나 구호금을 전달하는 봉사를 위해 그들의 시간을 대부분 할애해야만 했습니다. 그만큼 가난한 이도 많았으려니와, 구제를 행할 수 있는 교인들의 헌금 또한 넉넉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들이 직접 나서서 한동안 하나님의 말씀은 제쳐놓고 구제와 봉사에 전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히브리파 유대인들만을 대상으로 삼았을 뿐, 해외에서 돌아온 헬라파 유대인들 역시 구제의 대상이란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도들 자신들이 팔레스타인 땅을 평생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철저한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던 까닭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행위가 옳지 못했음을, 다시 말해 자신과 같은 사람들만 편애하는 자세는 참 믿음의 행위가 아님을, 헬라파 유대인들의 지적을 받고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지도자들인 사도들이 그러하였으니 다른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야 두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나 사도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는 즉시 조금도 지체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본문 3절-4절을 통하여 즉시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시하였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여기에서 전무(專務)한다는 것은 그 일에만 전념한다는 말입니다. 즉 사도들은 구제와 봉사를 전담할 집사를 선택하여 세우는 대신, 그들 자신은 기도와 복음증거에 전념키로 한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인 그들이 기도와 말씀에 충실치 않고서는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온전한 마음으로 수용할 수 없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 구제와 봉사가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그보다는 말씀과 기도가 더 우위에 있어야 함을 터득했던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 속에서만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어느 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편향됨이 없이, 모두를 향해 진정으로 열려질 수 있는 까닭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자신들이 집사를 임명하는 대신 교인들이 직접 선출해주기를 제안했습니다. 어느 특정인에게 그들 자신이 스스로 편향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들의 이 제안에 대한 결과를 본문 5절-6절이 다음과 같이 밝혀 주고 있습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교인들은 사도들의 제의를 기쁘게 받아들여 스데반을 비롯한 일곱 명의 제자들을 교인들 가운데서 선출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선출된 7명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헬라식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관습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고 이스라엘 땅에서 히브리어를 사용하며 살던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모두 히브리식 이름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해외로 디아스포라 되었던 헬라파 유대인들은 한결같이 해외 현지에 적응하기 쉽도록 헬라식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영어가 명실공히 세계 공용어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영어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터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일지라도 호적상 미국식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자식에게 미국식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미국에 이민을 가서 사는 사람들은 틀립니다. 그들은 본래의 국적이 어디이든 상관없이 미국이란 현지에 적응하기 위해 미국식 이름을 지닐 뿐만 아니라 자식에게도 미국식 이름을 지어줍니다. 2천 년 전 본문 속의 사람들도 똑 같았습니다. 헬라식 이름을 갖고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는 이스라엘을 떠나 해외에서 살아온, 디아스포라 출신의 헬라파 유대인임을 밝히는 증거였습니다.
초대교회에는 헬라파 유대인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절대다수는 전통적으로 팔레스타인 땅에 뿌리를 박고 살아온 히브리파 유대인이요, 헬라파 유대인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집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파 유대인이 압도적인 인적구성 속에서 선출된 7명의 집사는 모두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절대다수였던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소수에 불과한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자진하여 표를 몰아준 것이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들은 모두 국내파였습니다. 온갖 어려움과 시련이 있었지만 그러나 천 수 백년 동안 그들의 땅과 전통을 지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그들이 치러야만 했던 대가는 참으로 눈물겨운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헬라파 유대인들이란 모두 해외파인 셈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유야 어떠하든 간에 나라가 가장 어려울 때에 나라를 떠나 해외에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국내파들이 해외파들을 거리낌없이 받아주기란 결코 쉬운 일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파들은 그들의 표를 한데 몰아 초대집사 7명을 모두 해외파 중에서 선출하였습니다. 같은 국내파 중에서 선택할 생각일랑 아예 하지도 않았습니다. 인간집단의 속성 상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초대교회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최초의 7집사가 모두 소수인 헬라파 유대인으로 선출되었다는 것은, 초대교회 내의 인간적 비중이 국내파로부터 해외파로 넘어갔음을 의미하기에 이것은 실로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국내파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깨끗하게 포기하면서까지 전원 해외파들을 선출하였을까요? 해외파 사람들의 세계관이 국내파인 자신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넓다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에도 세계관이라는 말은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세계관이란 한마디로 세계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바꾸어 말해 내가 살고 있는 곳과 다른 환경,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시야와 마음의 크기를 뜻합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팔레스타인 땅을 지키고 살아오면서 자신들과 다른 인종들을 받아들이는 데에 인색했습니다. 더욱이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란 선민의식은 그들의 배타성을 한결 더 굳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오죽 했으면 한 교회에서 구제와 봉사를 행하면서도 그 대상에서 해외 출신의 헬라파 유대인들을 제외시켰겠습니까? 그러나 같은 유대인이지만 헬라파 사람들, 즉 해외파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대를 이어 해외에 살아오면서 그들과 다른 인종들과 더불어 함께 사는 법을 몸으로 익힌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를 비롯한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자신들과 같은 국내파 사람들만 끼고 도는 잘못을 해외파들이 지적해 줄 수 있었던 이유인 동시에, 자신들의 그릇되었음을 깨달은 국내파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의해 7명의 집사가 모두 해외파에서 선출되었던 까닭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복음이 온 세계만민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그들이 상기했던 것입니다.
이미 8개월 전에 살펴보았던 사도행전 1장 8절을 통해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세계인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계인이 되지 않고서는 나와 전혀 다른 땅 끝의 사람까지도 품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7명의 집사를 선출하면서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표를 몰아주었다는 것은, 해외파 사람들에 비해 자신들이 세계인이 되기에는 아직 부족함을 인정한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들 역시 해외파 사람들처럼 이후로는 세계인-즉 땅끝을 포함하여 온 세계를 품을 수 있는 바른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결단의 표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교회가 7명의 집사를 전원 해외파로 세운 결과를 본문 7절이 이렇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해외파 집사들이 활동을 시작한 이래 이제까지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경이로운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즉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한두 명의 제사장이 아니라, 제사장들이 집단적으로 초대교회에 합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이란 유대교의 성직자들로서, 신학자 Jeremias에 의하면 당시 이스라엘에는 무려 8천 명에 달하는 제사장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초대교회의 전면에 나서 있는 동안 그들과 제사장들은 견원지간이었습니다. 서로 상대를 수용할 만한 그릇들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헬라파 집사들이 전면에 부상한 뒤에 제사장들은 집단적으로 주님께 귀의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과는 달리 헬라파 유대인들은 복음의 보편성과 세계성을 바르게 전달하는 도구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했던 것입니다.
세계를 품고 살던 해외파들의 활약이 여기에서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이르면, 인류의 역사를 뒤바꾸어 놓은 사도 바울이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그야말로 헬라파 유대인-해외파의 거두였습니다. 그는 헬라어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 학문에 높은 식견을 가진 자였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세계 어디에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는 세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인이었던 그 바울을 통해 복음은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세계를 향해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들고 지중해 연안 곳곳을 누비고 다니던 그 세계성은, 같은 사도들이라 할지라도 히브리파 사도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국내파 사람들이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을 단행한 세계인 바울에 의해 끝내 세계역사의 방향이 새로워졌고, 그 모든 사실은 역시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누가에 의해 사도행전으로 기록되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의 세계화에 헬라파 유대인들, 곧 세계를 품고 살던 해외파의 공헌이 절대적이었음을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웅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한국을 떠나 스위스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곳에 온 이유는 개인마다 다 다르겠지만, 지금 현재 해외에서 거주하고 있다는 면에서는 모두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외에서 거주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가 모두 본문에 나타난 헬라파 유대인들-즉 성경적 해외파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우리의 몸은 외국에서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속에 진정 세계를 품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성경적 해외파일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한국을 한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세계 만민을 향해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가 있다면, 그는 본문에 나타난 세계인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도행전을 계속 읽어나가면, 해외에 사는 헬라파 유대인들 중에서도 복음을 핍박하는 자들은 수 없이 많았습니다. 다음 시간에 상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만, 초대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였던 스데반 집사를 모함한 사람들 역시 다름 아닌 해외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몸이 해외에 살고 있느냐 아니냐로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속에 세계가 담겨 있는지의 여부로 결정됩니다.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복음의 세계성 때문입니다.
오늘의 제가 있기까지 제 가족을 제외하고 제게 신앙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스승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 없이 시인 구상 선생님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분은 제게 복음의 세계성을 심어주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만나므로 저는 제가 속해 있던 장로교의 교리를 뛰어넘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장로교의 교리 속에 갇히시는 분이 아니심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분과의 사귐을 통해 개신교와 천주교는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기 위해 서로 보완해야할 동반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는 목적은 나 홀로 복 받고 혼자 잘 살기 위함이 아니라,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특별히 나와 다른 사람들과 진리 안에서 더불어 살기 위함임을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분은 신앙에 관한 한 제가 세계인으로 눈 뜰 수 있도록 저를 인도해 준 진정한 스승이셨던 것입니다.
산이 많은 국토에서 강대국들의 침략 속에 살아온 한국인들은 역사적 지리적 특성상 이곳 스위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배타적입니다.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을 수용하는 데에 매우 인색합니다. 세계에서 현지 적응력이 가장 강하다는 중국 화교들이 한국 땅에서 뿌리 내릴 수 없어 철수해버린 것이 그 좋은 예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해 배타적이기에 한국인이 있는 곳에는 예나 제나 언제나 분열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예외인 것은 아닙니다. 한국교회 역사 역시 분열로 점철되어 왔습니다. 그 원인 제공자가 타인에 대해 배타적이었던 우리 자신들이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한국으로 되돌아 갈 날이 이르기 전, 해외인 이곳 스위스에 사는 동안, 우리 모두 진정한 성경적 해외파들이 되십시다. 우리의 영적 시야를 가리고 있는 교파와 교리의 벽을 뛰어 넘으십시다. 말씀을 통하여 유럽 대륙 위에서, 아프리카 대륙 속에서, 수없이 많은 다양한 민족 가운데서 다양하게 역사하시는 주님을 만나십시다. 주님께서 창조하신 그 숱한 인종들과 다 함께 더불어 사는 법을 훈련하십니다. 진정한 신앙적 세계인이 되십니다.
그때 우리를 오늘 해외에서 살게 하신 주님의 뜻이 아름답게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7집사처럼 세상을 향한 참된 봉사자가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신앙적 세계인으로 눈뜨게 해주는 영적 스승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때 우리는 우리 곁에 있는 가족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세계인이 되지 않고서는, 나와 같지 아니 한 내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세계를 제대로 수용할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이제껏 나의 삶이, 나와 같은 사람들만 끼고 도는 히브리파 유대인과 같았음을 고백 드립니다. 그로 인해 나의 삶 속에 참된 평화가 없었고, 나의 삶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분열과 다툼의 원인 제공자가 되어 왔음을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세계만민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 안에서 성경적인 헬라파 유대인들이 되게 하옵소서. 나와 같지 아니 한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더불어 사는 진정한 해외파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참된 봉사자-증인이 되게 하옵시고, 가장 가까운 내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세계를 바르게 존중하고 제대로 수용하는, 진정한 세계인이 되게 하옵소서.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