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주제와 구조
요한복음의 주제와 구조
심상법 교수
성서 사랑방에서 발취
정경의 복음서들 중 마지막에 위치한 요한복음은 교부들 이래로 개인과 교회의 영적 활성에 큰 확신과 영감을 불어 넣어온 ‘영적 복음서’(spiritual gospel)로 인식되어 왔다. 이점은 요한복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하신 하나님’(God incarnate)으로서 독자들에게 하나님과 그분께 나아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계시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독자(교회)는 요한복음을 통하여 참된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영생을 얻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하심과 그의 계시적인 사역을 통하여 잘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요한복음은 성육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계시와 더불어 어두움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해 줌으로써 기독교 영성에 많은 지침과 영감과 확신을 가져다주어 왔다.
본 글은 지면의 제약을 가지고 있지만 교회의 역사 속에 사랑받아 온 요한복음을 본문에 나타난 다양한 주제들과 구조에 비추어 이해함으로써 목회자의 본문이해와 설교사역을 돕는데 그 목적을 둔다. 먼저 몇 가지 중심 주제들을 서술하기에 앞서 요한복음의 저술목적(요 20:30-31)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1)이 구절이 요한복음의 중심 주제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단순과거냐 현재냐)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저술 목적이 분명하게 서술되고 있다는 점(요 20:30-31)에서 특이하다. 그러나 문제는 복음서의 저술 목적을 서술하는 동사(‘믿다’[pisteuo])의 시제가 무엇이냐(사본상의 문제)에 따라 그 의도가 어느 정도 달라질 수 있다. 즉 접속사 hina와 함께 사용된 pisteuo라는 동사가 가정법 부정과거(aorist)이면 이것은 [아마도 흩어진 유대인들이나 유대개종자들의] 개종을 위한 ‘전도용 혹은 선교적 문서’가 되며, 만약 동사가 가정법 현재시제이면 독자들을 계속적으로 믿음 가운데 거하도록 하는 ‘교육적 혹은 교훈적 문서’가 된다. 이 경우 후자의 사본적 독법이 원문에 근접하다면 요한복음은 믿는 독자들을 믿음가운데 인내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 진 책이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요한복음의 전도적/선교적 목적을 배제하지는 않는다(Morris 1988:722). 이러한 두 견해에 대하여 카슨(신약개론 1993:190)은 “요한복음에는 믿음의 시작과 믿음의 지속에 관해 두 시제가 함께 사용되었기 때문에 어느 것을 취하든 달라질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표적기사(강론을 포함)와 수난기사는 불신자들에게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게 해 주지만, 신자들에게는 그러한 사실을 어려움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믿게 해 주는, 즉 믿음 안에 거하도록 격려하고 힘을 주는 역할을 해 준다. 결론적으로 요한복음은 표적과 강론을 통하여 예수가 유대의 메시아 즉, 구약을 성취하신 약속된 구원자이심을 보여주며,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하신 하나님의 아들(10:30)로서 2)제시함으로써, 그 분을 믿어 구원(영생을 가짐/얻음)에 이르도록, 빛 가운데 거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어느 경우든 ‘믿음’은 요한복음의 중심 주제임이 확실하다.
‘믿음의 복음’
‘믿는다’(pisteuo)라는 단어가 요한복음에 98번이나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공관복음(마가복음 11번; 마태복음 14번; 누가복음 9번)과 비교해 볼 때 매우 특이하다. 이 단어는 앞에서 언급한 요한복음의 저술목적(20:31)에서도 나타날 뿐 아니라 요한복음 서두의 중심이 되는 요 1:12와 요 3:16-18, 그리고 다양한 표적들과 그에 따른 강론들의 중심된 논쟁이기도 하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사람들을 두 부류 즉 그리스도가 예수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는 사람들로 나누고 있다. 요한에 의하면 믿는 사람들은 영생을 가진 사람들(요 3:15-16, 36; 5:24; 6:40, 47)로서 빛 가운데 행하며(12:46),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심판받는 사람들(3:18; 12:48)로서 어두움 가운데 행한다. 확실히 요한복음에서 믿음은 현재의 삶과 미래의 운명을 결정하는 근본적인 이슈로 제시된다. 한 마디로 요한복음의 중심된 메시지는 “믿느냐, 믿지 않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학자들은 요한복음을 “믿음의 복음”(Merrill Tenny)이라 부른다. 흥미로운 점은 요한복음에 ‘믿는다’라는 동사는 거의 100번 가량 언급된 것에 비하여 ‘믿음’이라는 명사는 한 번도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 그들의 믿음을 두는 일, 즉 믿음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를 고양시키는데 주된 목적이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요한복음에서 언급되고 있는 ‘믿는다’는 표현이 꼭 ‘구원 얻는 믿음’을 가리킨다고는 말할 수 없다. 때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마귀의 자식들’(8:31-44)로 지칭될 때가 있고, 표적을 믿지만 나중에는 주님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2:23-25; 6:60-66).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비밀 신자나, 니고데모 같은 진지한 탐구자나, 의심하는 도마도 있다.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믿음은 단지 표적을 보고 믿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영생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드리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또한 지속적인 믿음가운데 거하는 것(신뢰)을 의미한다. 확실히 ‘믿음’은 요한복음 전체를 휘감아 가는 중심주제가 분명하다.
계시의 책
요한복음의 중심된 주제는 계시(O`Day 1986; Ashton 1991) 혹은 계시의 본질(Smith 1995:75)에 대한 문제이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이 존재하느냐’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은 누구시며,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셨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즉 요한복음을 통해 요한은 독자들에게 너희는 어떤 하나님을 믿으며, 어떻게 그 믿음을 확정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있다. 여기에 대해 요한은 너희가 믿는 하나님은 성경이 증거 하는 대로 창조의 하나님이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며, 또한 모세와 다윗의 하나님이라고 진술한다. 결국 이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계시되었는데 성경은 예수를 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그리스도)며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한다. 결국 요한은 성경에서 계시하신 하나님을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강조하며,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상고하는데 이 성경이 예수를 메시아로 증거한다고 말하며(요 5:39; 1:41, 45; 5:45-47) 성경을 계시의 보고로 제시한다(요한복음에 성경[grafh,]이란 단어가 12번 언급됨). 결국 성경과 성경의 하나님이 요한 신학의 근본적인 골조를 이룬다(Smith 1995:76). 결국 이 계시는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들어났는데 이 경우 예수의 계시는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잘 드러낸다(요 1:14-18). 그리고 요한복음의 계시는 성령의 사역을 떠나서 이해할 수 없다. 주께서 이른 말씀은 성령을 통하여 주신 ‘영의 말씀’이며(6:63, 68), 후에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셔서 진리를 알게 해 주신다. 성경과 성육하신 그리스도와 성령, 그리고 주의 제자들이 바로 이 계시의 전달자며 매개체이다.
성령론
복음서들 중에서 요한복음이 성령에 대해 가장 명백한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 요한복음에서의 성령의 역할은 성령의 세례인 중생(요 1:32-33; 3:5-8)과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사역(6:63; 7:39; 20:22)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특히 성령은 요 14-16장에서 집중적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여기서 성령은 주로 ‘보혜사’(14:16, 26; 15:26; 16:7) 혹은 ‘진리의 영’(14:17; 15:26; 16:13)으로 묘사되고 있다. ‘보혜사’(parakletos)란 곧 ‘중보자’, ‘돕는 자’, 혹은 ‘위로자’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예수의 지상사역을 이어갈 성령의 사역(‘또 다른 보혜사’)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그가 보내실 성령은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동안에 그가 하셨던 사역과 매우 유사한 사역을 하신다. 이점은 ‘보혜사’(parakletos)란 이름으로 되어질 성령의 사역과 예수의 사역과의 관련성과 유사성에 대한 모리스의 진술(1995:212)을 통해 잘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은 요한복음에서 성령에게 돌려지는 모든 기능들이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행해지는 것으로 말해진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확증된다. 그래서 성령께서 신자들을 가르치시지만(14:26), 예수께서도 그러하시며(7:14); 성령은 진리의 영이신데(14:17), 예수께서 진리이시며(14:6); 성령께서 제자들안에 계시는데(14:17), 예수께서도 그러하시며(14:20; 참고. 요일 2:24); 성령께서 증거하시는데(15:26) 예수께서도 그와 동일한 일을 하신다(8:14). 둘 다 아버지로부터 나오셨으며(15:26; 16:27, 28), 세상은 둘 모두를 다 모른다(14:17; 16:3).”
보혜사, 진리의 영으로 오신 성령은 공동체 가운데 거하시면서 예수의 사역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일하시는데 그것은 믿는 자들과 함께, 믿는 자들 안에 영원히 거하면서(14:16-17),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생각나게 하신다(14:26). 성령은 세상에 대해 예수를 증거하며(15:26),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정죄한다(16:8-11). 그리고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장래 일을 알리신다(16:13). 이처럼 오신 성령은 주께서 하셨던 사역을 계속하며(완성하며) 그의 영광을 드러내신다(16:14이하). 그러므로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시는 것은 믿는 자들에게 정말 유익된 일이라고 요한은 말한다(16:7).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한 마디로 성령의 오심으로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흐르는” 풍성한 삶이 주어진다(7:39). 오셔서 중생을 일으키시며, 신자가운데 내주하셔서 가르치시며, 기억나게 하시며,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증거하시며, 정죄하시며,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하여 부활하신 주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말씀하신, “성령을 받으라.”(20:22)는 말씀을 가슴 깊게 받아드려야 한다.
기독론: ‘로고스’ 기독론과 ‘아들’ 기독론
요한복음의 중심주제는 중심인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인데 이것은 이미 앞에서 살펴 본 저술목적에서도 잘 드러난 주제이다.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것은 한 마디로 ‘아들-메시아’로서 예수에 대한 계시(선포)이다. ‘아들-메시아’를 믿는 사람들은 영생을 소유한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특히 예수는 성경적이며 유대적인 기대 속에 성취된 메시아이심을 보여주는데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히브리어인 메시아(Messiah)란 단어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1:41; 4:25). 이 메시아 예수는 모세보다 아브라함보다 선제하시고 크신 분(1:17; 8:58)이시며 자신의 (속죄적) 사역을 통하여 율법의 기능(1:17)과 성전의 기능(1:14; 2:19-22; 4:21-24)과 절기(유월절, 장막절, 수전절)의 기능을 온전히 성취하신 분으로 성경이 증거하고 기다리신 세상의 구원자며 믿는 자의 주님이시다.
특히 서두(1:1-18)에서 진술되고 있는 말씀(logos)이신 예수께서 성육하셔서 우리 가운데 인성을 입고 오셔서 우리가운데 거하시며 은혜와 진리와 영광을 드러내신다. 무엇보다도 성육하신 로고스이신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며 은해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한복음의 로고스 기독론은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창조사역에서 ‘성육된 말씀’을 통한 구속사역으로 전환되고 있는데 로고스의 이러한 모습은 요한복음의 중요한 상징인 빛(fw/j)과 생명(zwh,)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예수는 아버지의 아들(독생자)로서 제시되어(1:14, 18), 인성과 신성에 대한 강조와 함께 아버지(하나님)와의 유독한 관계(10:30), 즉 친밀한 교제(연합)와 의존과 순종의 관계 속에서 일하신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받아 세상에 보냄 받은 아들 예수(3:17, 34; 5:37; 6:38, 44; 7:16, 28; 8:16, 26, 42; 10:32, 37; 12:44, 49)는 모든 것을 아버지로부터 위임받아(3:35; 10:25), 아버지와의 깊은 관계 속에서 오직 아버지(의 영광)를 위하여 아버지의 일을 행하신다. 아들 예수의 사명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함으로 아버지의 일(세상을 구원하는 일= 아들을 믿고 구원받는 일)을 완성하는 일이다(4:34). 그리고 아버지의 일인 구속적 사명을 완수한 후에 아들 예수는 다시 아버지께로 가시며(14:2-3; 16:10, 28; 17:11, 13), 장차 자신을 믿는/순종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다시 오신다(14:3). 요한복음에서는 위임받은 아들, 보냄 받은 아들을 믿는/순종하는 것이 구원이이고 영생을 얻는 일이다. 아들 예수와 성부 하나님과의 이처럼 친밀하고 순종적인 관계(연합과 교제)는 ‘하나님의 자녀’(1:12)로서의 영적 삶(제자도)의 중요한 모델이 된다.
이처럼 예수는 그의 신분(아들/메시아)과 사역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계시자이며, 구원자이며 영생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신다(Peterson 1989). 이것은 “나는 …이다”(ego eimi)라는 표현과 ‘표적’(semeion)을 통하여 잘 제시되어 있다.
“나는 …이다”(ego eimi)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영생을 얻는(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어진다(1:12-13; 3:14-16; 5:25; 6:51; 10:9-10, 28; 11:25-26; 14:6; 17:3; 20:31). 요한에 따르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1:1, 18; 1:14; 1:34), 창조주이시고(1:3, 10),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1:29)으로 오신 메시아/그리스도(1:41; 4:25-26)로서 ‘세상의 구주’(4:42)가 되신다. 오직 예수만이 아버지(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the way)이요 진리(the truth)요 생명(the life)이시다(14:6). 오직 예수만이 우리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the living water)를 주시고(4:10-15, 특히 14절을 보라), 영원히 주리지 않는 생명의 떡(the bread of life)을 주신다(6:33-35). 이 예수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보내신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자기에게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계시자(revealer)이시다. 이 모든 것들은 “나는 …이다”(ego eimi)라는 표현들(6:35, 48, 51; 8:12; 9:5; 10:7, 9, 11, 14; 11:25; 14:6; 15:1, 5) 속에 잘 용해되어 있다. 이 표현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계시하실 때 사용된 표현으로서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이 표현은 예수를 하나님의 계시자로, 구원자로, 그리고 영생을 주시는 분으로 제시한다. 즉 이것은 예수가 누구신가를 일깨워 주는 자아-계시적인 상징적 표현들로 아래의 표적들과도 깊은 관련성이 있다.
표적(semeion)
요한복음의 저술목적(20:30-31)에서 본 대로 ‘표적’은 요한복음의 골격이 되는 주제임이 분명하다. 표적(semeion)이란 일반적으로 “어떠한 사람이나 어떠한 사물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가시적인 표시”를 의미하지만 특별히 이 단어는 요한복음의 “신학적 해석을 위한 열쇠가 되는 말”(Rengstorf))로 일종의 계시를 구성하는 표현이다. 요한복음에서 표적(semeion)이란 단어가 17번 사용되었는데 그 중 11번이 예수의 이적을 지칭한다. 비록 이 단어가 공관복음서에도 언급되고 있지만 요한은 그 자신의 독특한 의도와 방식을 따라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한 마디로 요한복음의 표적은 그 자체를 넘어서서 예수의 구원사역을 알려주는 계시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하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가리킬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방편이다. 이처럼 표적은 사람들을 예수께 나아가도록 인도할 뿐 아니라(3:2; 6:2), 믿음을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한다(6:30; 2:11; 4:53; 20:30). 사실 “개개의 표적들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안에서 행하신 큰 사역의 빛 안에서만 식별될 수 있는”(Morris 1995:20) 것으로 이것들은 예수의 구원사역을 알려주는 기능을 한다. 결국 표적은 그것이 가리키는 신학적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면 그 의미를 깨달을 수가 없다(참고. 2:18; 6:30).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표적은 확신과 확증이 되지 못한다. 때론 표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강론)이 헌신으로 이끈다(6:68; 11;27). 한 마디로 요한복음의 표적들(2:1-11; [2:14-17;] 4:46-54; 5:1-9; 6:1-13; [6:16-21;] 9:1-12; 11:17-44)은 예수 안에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계시자로, 구원자로, 영생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신다.
생명(zoe)과 빛(fos)과 물(hydor)
요한복음에 언급된 위의 세 가지 요소들(상징들)은 매우 강한 상징적 혹은 신학적 의미를 지닌다. 이들 3) 상징들 은 각기 그 자체의 고유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또한 앞에 논의된 주제들과 함께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특히 생명과 빛, 생명과 물은 요한신학에 있어 그 의미가 서로 중첩되어있다. 이 세 요소들은 하나님의 창조사역 혹은 창조신학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들로 이스라엘의 구원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인류의 타락과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생명을 잃고, [도덕적] 어두움 가운데 거하며, 물로 멸망을 당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백성을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하여 흑암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물(피)로부터 구원을 얻어 생명의 삶, 빛의 삶, 생수를 먹고 마시는 삶,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흐르는 풍성한 삶(7:38과 10:10)을 경험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그의 구속사역을 통해 주시는 축복이다. 이들 세 가지 요소들은 또한 제의적인 것들과 관련된 것으로 성전(의 사역)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특히 4)물은 씻는 것(정결과 속죄의 의미)을 상징하는 것으로 구약의 제의적인 일의 중심에 서 있는 요소들이다. 물로써 세례를 주는 것(1:25-34), 혼인 잔치에서의 물이 포도주가 된 것(2:1-11), 그 외에도 생수논쟁(4장)과 장막절에 물 깃는 일과 생수의 강이 넘쳐나는 일(7:37-39), 그리고 예수님 살해 시에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오는 것(19:34) 이 모든 것은 예수의 구원사역(성령의 역할을 포함)과 관련된 신학적 의미를 지닌다. 빛과 물과 생명의 창조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서 이러한 창조사역이 ‘성육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재창조 사역 즉 구속사역을 통해 완성된다.
이러한 주제나 모티브 외에도 요한복음에는 더 많은 주제들과 모티브가 있는데, 비근한 예로는 증거에 대한 주제(Boice 1970)나 영접과 배척 모티브, 그리고 최근의 선교모티브(Kostenberger 1998)에 대한 연구가 있지만 지면관계로 생략한다.
요한복음의 구조
구조이해는 주로 주제이해와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러므로 중심 주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구조가 어느 정도 달라질 수 있다. 주제 외에도 내러티브(narrative)의 특징을 살려서 요한복음을 지리적인 전환(Rissi 1983)이나 시간적인 전환 혹은 이 둘의 병합이나 청중의 변화(무리와 제자들), 그리고 드라마적 요소나 극적전개(Martin 1979; Smalley 1998) 혹은 수와 상징(Lohmeyer), 대칭적 형태 등을 중심으로 그 구조를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구조분석은 본문 이해를 위한 해석적 틀을 제공하지만 특정한 하나의 구조로 고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해석자가 어떤 강조점을 가지고 본문을 분석하느냐에 따라 구조이해는 달라진다. 요한복음의 다양한 구조분석에 대해서는 Du Rand의 글(1991)과 Mlakuzhyil의 책(1987)을 보라.
요한복음의 구조를 간단하게 이해하자면 분명한 서론(1:1-18)과 결론 혹은 부록(21:1-25)사이에 존재하는 본론부분이 있는데 1:19-12:50의 단락과 13:1-20:31의 단락으로 구성된 구조적 모습이다. 서론과 결론 사이에 있는 이 두 부분은 표적의 책과 영광의 책(Brown) 혹은 표적의 책과 고난의 책(Dodd)으로 이해되어 왔다. 사실 예수님의 사역을 수난과 영광중 하나를 택하여 말할 수는 없다. 배척의 모티브와 함께 수난의 모습이 강하게 부각되지만 서두부터 영광의 계시 또한 요한복음의 중요한 모티브 중의 하나이다. 요한복음을 중심된 주제를 중심으로 분석한 구조이해는 본문이해에 어떤 공헌을 가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표적을 단순히 전반부의 단락에만 국한한다면 표적의 범위를 제한하여 이해하는 것이 되고, 두 번째 단락을 수난이나 영광 중 어느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이해한다면 본문에 대한 축소적인 이해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이해하는 데는 구조적 이해가 매우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요한복음을 크게 두 분분으로 나누어 이해하자면 전반부의 단락(1-12장)은 예수님의 공사역을 중심으로 되어진 일들, 즉 표적과 논쟁(문답)과 강론을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고, 두 번째 단락(13-20장)은 자신의 제자들과의 토론과 고별강론(13-17장), 그리고 수난과 부활의 경험에 속한 일들(18-21장)을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다. 특히 요한복음이 나아가는 스토리의 흐름은 ‘때’(죽음과 부활)를 향하여 사건들이 전개되어 가는데 1-11장에서는 “그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2:4; 7:30; 8:20)을 반복하여 언급되다가 12:23에서 “계시의 중요한 때(‘영광의 때’)가 도래하고 있음”을 선언하고, 13-20장에서는 “그 때가 도래하였음”을 확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요한복음의 스토리의 흐름은 ‘[영광의] 때’(17:1)를 중심으로 나아간다. 이 경우 요한복음은 영광의 계시가 그 중심주제로 자리 잡으며 스토리의 흐름은 이 ‘때’를 절정으로 하여 나아가고 있음을 본다. 그 외에도 요한복음을 내러티브적인 구성으로 이해하면, 1:1-51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중심인물이신 예수에 대한 소개(선재하심과 성육하심)와 2:1-17:26의 표적과 강론을 통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를 세상에 알림(사역과 운명), 그리고 18:1-21:25의 수난과 영광의 절정과 대단원의 모습(예수의 주되심과 베드로의 회복과 사명부여)으로 묘사된다.
또 다른 구조이해(Burge)는 1:1-18은 말씀(로고스)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축하하는 찬양 시로 시작하여 1:19부터 요한복음의 드라마의 서막이 오르면서 세례 요한을 소개하고 세례 요한의 소개로 예수가 등장하여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으로 그의 공사역이 시작됨을 보여준다(1:19-51). 이어 2:1-5:47에서 스토리는 한 장면에서 또 다른 장면으로 이어지면서 그의 공사역이 소개되고 표적과 논쟁과 문답과 강론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서 그의 모습을 알린다(2:1-4:54). 그의 사역을 통해 유대의 제도와 기관들(정결규례와 성전)을 새롭게 된다. 이 단락은 가나에서 시작하여 가나로 돌아가는 모습을 본다. 이어지는 단락(5:110:42)은 유대절기들을 중심으로 되어지는 일들을 기록한 것으로 안식일(5장)과 유월절(6장)과 장막절(7장)과 수전절(10장)에 일어난 사건들을 중심으로 표적과 강론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을 기술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배척의 모티브가 드러난다. 그리고 11-12장은 예수의 임박한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예시하는 사건들을 소개하는데 그것은 향유 부은 여인에 대한 기사와 나사로의 이야기, 그리고 죽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한 기사로 첫 단락이 종결되고, 두 번째 단락인 13-21장은 유월절 만찬(13장)과 고별강론(14-17장)이 주어지고 연이어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기사(18-19장)가 이어지며 위대한 부활기사(20장)가 주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1장의 ‘부활 후 출현기사’가 이적기사와 함께 베드로의 회복과 사명부여로 요한의 스토리는 종결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요한복음의 다양한 주제들과 구조이해는 우리의 본문이해(‘나무를 이해하기 위해 숲을 보는 시도’)를 돕는데 좋은 해석적 틀이 될 것이다.
<미주>
1) Coetzee는 요 20:30-31에 대해 “요한복음의 이 주된 진술은 저자의 목적을 표현할 뿐 아니라 우리가 이 책의 선포의 중심 주제 혹은 중심이라고 부르는 것을 어떤 형태로 제공한다.”(1993:40-41)고 하였다.
2) 흥미롭게도 요한복음에서 ‘하나님’(theos)이란 단어가 83회, ‘아버지’(pather)라는 단어가 137회 사용되고 있는데 그 중에 122회 이상이 하나님 아버지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와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비근한 예가 된다.
3) 요한복음의 상징에 대한 연구로는 Koester의 책, Symbolism in the Fourth Gospel(1995)를 보라.
4) 요한복음에서의 물의 상징에 대한 연구로는 Jones의 책, The Symbol of Water in the Gospel of John(1997)을 보라.
참고문헌
Burge, G M 1992. Interpreting the Gospel of John. Grand Rapid: Baker.
Coetzee, J C 1993.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B. The theology of John, in Du Toit, A B(ed). Guide to the New Testament VI. Doornfontein: NGKB.
Du Rand, J A 1991. Johannine Perspectives: Introduction to the Johannine Writings - Part I. Orion.
Jones, L P 1997. The Symbol of Water in the Gospel of John. sheffield: Sheffield Academy Press.
Koester, C R 1995. Symbolism in the Fourth Gospel: Meaning, Mystery, Community. Minneapolis: Fortress.
Morris, L 1989. Jesus is The Christ: Studies in the Christ. Grand Rapids. (홍찬혁 역. 1995. 요 한신학.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 1988. Reflections on the Gospel of John. Vol. 4. Crucified and risen John 17-21. Grand Rapid: Baker.
Mlakuzhyil, G 1987. The Christocentric Literary Structure of the Fourth Gospel. Rome: Editrice Pontificio Istituto Biblico.
Smalley, S 1998. John: Evangelist & Interpreter. Cumbria: Paternoster.
Smith, D M 1995. The Theology of the Gospel of Joh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