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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보는 제자도

משׁה 2010. 4. 30. 17:08

성경에서 보는 제자도

 

심상법 교수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에 대한 고민(苦悶)과 시대(時代)와의 불화(不和)는 물질주의에 물든 소비만능시대와 다원화된 우리 시대만의 고민과 불화가 아니다. 제자로서의 삶에 대한 고민은 1세기 성도들에게도 매우 근본적이며 실제적인 문제였다. 1세기 기독교는 유대교 안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유대교와의 불화(갈등과 단절)는 `그 시대의 불화(不和)`의 중심에 서 있었고 또한 헬라화와 로마화(일명 `세계화`)의 파고가 거센 변혁의 시대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갖는 정체성(identity)과 삶의 위기는 생존을 위협하고 번영을 가로막는 문제였다.

이런 까닭에 `믿는 도리의 소망`을 포기하고 유대주의로 돌아가서 사회적 안전을 추구하고자 하는 신앙적 타협이 초대교회 내에 나타났고(히브리서의 화두[10:19-39을 보라]), 도덕적 해이는 위험수준(moral hazard)에 이르렀으며("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고난받는 제자의 삶은 퇴색되어갔다. 여기에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그 분의 오심과 사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회상하며 참된 주님의 제자로서의 걸어가야 할 길(도리)을 정립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다(복음서를 보라).

이점은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역시도 안팎으로 시대정신(Zeitgeist)의 도전과 위협 속에 참된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립할 필요를 절감하며 이 시대와의 불화를 감수하며 참된 내적 변화와 공동체적 변혁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제자도의 근간이 되는 복음서(특히 마가복음)로 돌아가 주님의 모습과 부르심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바로 아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공생애를 결산하시면서 `노중(路中)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막 8:27)고 물으신 후에 그들에게 또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8:29)고 물으셨다. 이 질문은 제자의 길을 가는 우리 모두가 일생동안 곱씹어 보아야 할 질문이다.

과연 예수는 누구신가? 우리가 믿고 따르는 그 분은 누구시며 어떤 일을 하셨는가? 이 질문은 단지 중생 때에만 주어진 질문이 아니라 우리의 생애에 걸쳐 두고두고 생각해 보아야 할 질문이다. 환난 속에도, 풍부 속에도, 생애 모든 국면에서 거듭거듭 물어보고 생각하며 답변해야 할 질문이다. 마가복음을 보면 이 질문은 "노중(路中)에서" 주어졌다(8:27). 주님을 따라가는 길에서 우리는 우리의 생애를 이 질문 앞에 곧게 세워놓고 우리 자신을 심문(審問)하여야 한다. 베드로는 환난의 바람이 매섭게 부는 그 날 밤, 비자(婢子)의 법정에서 이 주님을 부인하였다(막 14:66-72).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세상 사람이 뭐라고 하던지,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시대와의 불화를 직면해도, 때론 내가 아끼는 것과 불화와 갈등을 겪어도 우리는 주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이 질문에 적절한 답변을 한 자만이, 이 질문이 자신의 삶을 관통한 자만이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다. 십자가의 주님은 율법의 완성자이시며(마 5:17-20), 고난받은 종이시며(막 10:45), 세상의 구주(눅 2:11; 19:10)이시다.

둘째로,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제자로서의 주님의 부르심("나를 따라 오너라")의 의미(가치)를 알아야 한다. 이 부르심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부르심이지만 아무나 나아가는 부름은 아니다. 가치선택과 헌신(자기희생)이 따라야 한다(막 8:34; cf. 마 13:44-46). 복음서를 보면 열 두 제자들에게 이 부르심이 주어졌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 1:17). `주님의 제자`로서의 부르심. 이것은 세상의 어떤 부르심보다도 영광스러운 부르심이며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고귀한 부르심이다. 부자 관원 청년은 이 부르심을 자기의 가진 재물보다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겼지만(막 10:21-22), 제자들은 이 부름에 그물을 버려 두고(막 1:18) 삯군들과 함께 아비를 배에 버려 두고(1:20),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주님을 따랐다(10:28). 아름다운 선택이었고 결단이었다. 그리고 이 부름은 가장 우선적인 부름이다(눅 9:57-62; 마 8:19-22). 바디메오의 선택은 바로 이러한 모습이었다. 소경됨에서 고침을 받았을 때 주님은 그에게 "가라"고 하였지만 바디메오는 곧 보게되자마자 예수를 길에서 좇았다(막 10:52; 눅 18:43). 소경으로서의 불행에서 벗어나 잠시라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 것인데. 주님도 부담 없이 고침 받은 후에 "가라"고 하셨는데. 그러나 바디메오는 "곧 보게되자 길에서 예수를 좇았다".

끝으로 제자도의 부름에는 `회개`와 `믿음`과 `따름`의 반응이 요구된다. 회개(`회개하라`)와 믿음(`믿으라`)과 따름(`따르라`)은 주님의 제자가 되는 3 단계의 점진적 명령(요구)이며 반응이다. 회개와 믿음은 제자도의 시작이며, 따름은 회개와 믿음을 전제로 하여 주어진다. 회개와 믿음이 없는 따름은 공적주의 및 행위주의적 제자의 모습으로 전락할 수 있으며, 따름이 없는 회개와 믿음은 삶이 없는 제자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따름`의 제자도는 실천적 제자도의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버림`과 `봉사`의 삶이 요구된다.

`따르라`는 제자도의 부름에는 항상 `버림`(부인/잃음)이 있어야 한다. 열 두 제자들이 그러하였고(cf. 막 1:16-20), 바울이 그러하였다(빌 3:7-16). 버림이 없는 따름은 시편기자의 표현처럼 악인의 꾀를 좇기도 하고 죄인의 길에 서기도 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도 쉽게 앉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제자의 모습이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일은 주님 때문에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아져서 다른 사람을 압제하고 군림하며 살아가는 길이 아니다(막 10:42-45). 이런 모습이 주님의 제자의 모습이 아니다("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러한 삶이 제자의 축복의 아니다. 제자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받은 축복을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남을 섬기고 다른 사람을 윤택케 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나눔의 삶`)을 사는 일이다(cf. 고후 6:3-10).

길에서 주님으로부터 제자가 되도록 부름("나를 좇으라")을 받았던 한 부자 청년은 가진/축적한 재물이 많은 고로 이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지 못하고 슬퍼하며 제자의 길을 떠났다(10:22). 그러나 바디메오는 `따르라`는 제자의 부름도 없었는데도 자기의 겉옷(`가진 전부`)을 버려 둔 채, 예수를 길에서 좇았다(10:52). 이 버림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 세상(의 영광)에 대한 버림이고, 재물에 대한 버림이고, 욕심에 대한 버림이고(막 4:19), 심지어는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에 대한 버림이고(10:29), 또한 자기에 대한 버림 곧 제 목숨까지도 버리는 것(막 8:34-35)을 말한다. 우리(의 구원)를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신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아무 것도 버리지 못하고 도리어 주님을 이용하여 더 많은 것들을 쟁취하려거나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제자로서의 주님의 부르심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나를 포함하여 오늘의 한국교회는 풍요 속에서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아무 것도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더 가지려고만 하고 있다. 이점이 오늘의 한국교회와 사역자의 비극이 아닌가?

사랑하는 후배들이여!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싶은가? 그러면 먼저 주님이 누구신지, 어떤 일을 하셨는지 깊이 알아 보라. 그리고 그 분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라. 어두운 시절에, 풍요의 시절에 주님은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부르셨다. 이 부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성찰하며 때론 이 시대와의 불화를 각오하며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자. 그리고 그 부름에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실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나아가자. 그리고 주님처럼, 섬김을 받으려 하지말고 복음으로 남을 섬기는 위대한 주님의 제자가 되자(막 10:4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