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이슬람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윌리엄 밀러(William M. Miller)
윌리엄 밀러(William M. Miller)는 1919년부터 1962년까지 장로교 선교사로 이란에서 사역했다. 그는 1995년에 10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학생 자발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마지막 선교사 중 하나였다.
이 글은 William M. Miller, A Christian’s Response to Islam(Phillipsburg, N.J.: presbyterian and Reformed, 1980), pp. 13-40에 나온 것으로 허락을 받고 실었다. www.popbooks.com
|편집자 주|
다음 글을 공부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신의 기독교 역사뿐 아니라 이슬람 설립자에 대해서도 더 균형 잡힌 접근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물어 보아야 한다. 나는 무슬림과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구세주로 보는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며,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근거인 성경의 관점에서도 타당하지 못한 입장이다.
밀러 박사는 나의 멘토다. 나는 그가 지상에 있던 마지막 몇 년 동안 그에게서 배우고 무슬림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축복을 누렸다. 그는 신실한 기도의 사람으로, 자신이 만난 무슬림의 이름을 커다란 색인 카드에 기록하여 상자에 넣어 놓고, 수십 년간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계속해서 기도했다. 그가 이슬람을 부당하게 비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에 집중하고 그 은혜를 신뢰한 것은 오늘날까지도 내게 감동을 준다. 특히 그가 95세가 넘은 나이에 히브리서 12장 1-3절을 암송하던 것이 기억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무슬림 친구들과 친지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또한 무슬림들을 제대로 알고 기도하기 원하는 사람들과, 말과 행동으로 무슬림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리고 있는 사람들―은 무함마드가 누구였으며, 무엇을 가르쳤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슬람 역사와 가르침에 대해 그리스도인 학자들이 쓴 탁월한 책이 많이 있지만,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이슬람이라는 종교-정치적 제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교리와 의식을 기반으로 제정되었는지에 대해 막연하게만 알고 있는 듯하다. 이 글에서는 초기 무슬림 역사가들이 아라비아의 선지자에 대해 진술한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간략히 말 하려고 한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엡 4:15)을 말하도록 진지하게 노력하겠다. 하지만 무함마드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역사적으로 흠잡을 데 없이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할 수 있는 자료들은 대체로 전승 형태로 되어 있으며, 그 중 일부는 무함마드가 죽은 지 오랜 후에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믿을 만한 자료는 꾸란이다. 다음 사실들은 대부분의 무슬림들과 비 무슬림들이 동의하는 내용이다.
무함마드 시대의 아라비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주후 570년 무렵 아라비아 서부 메카(Mecca)에서 한 남자 아기가 태어났다. 그 아기에게는 무함마드(찬양받을 자)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그 아이의 이름을 지은 사람들은 그가 세상에 그 누구보다 큰 영향을 끼칠 운명이며, 실제로 앞으로 수십 세기 동안 무수한 사람들의 찬양을 받으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아라비아는 광대한 땅으로, 그 중 많은 부분은 사막이다. 사막 지역에서 베두인(Bedouin) 유목민들은 검은 장막에 살면서 양떼와 가축 떼를 데리고 이동했다. 도시에서는 부유한 상인들이 무역을 하기도 했는데, 그 중 가장 중심지는 메카였다. 낙타 대상들은 남쪽의 예멘과 북쪽의 시리아 사이를 상품을 싣고 메카를 통과해 다녔다. 메카는 중요한 상업 중심지이자 신전 도시였다. 예로부터 그 안에 카아바(쿠베)가 있었는데, 그것은 알라의 집으로 알려진 정육면체 건물이었다. 이 거룩한 집이 홍수로 무너졌을 때, 아브라함(이브라힘)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스마일)이 그것을 재건축했다는 전승이 있었다. 아랍어로 ‘알라’(Allah)는 하나님(The God)을 의미하며, 아랍인들은 그를 최고의 신으로 인식했던 듯하다. 그들이 유대인들을 통해 그에 대해 알게 되었는지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이 지식을 물려받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무함마드의 아버지의 이름은 압드 알라(Abd Allah)였는데, 이는 알라의 종(slave of Allah)이라는 의미다.
아랍인들은 알라를 최고로 인식하긴 했지만, 유일한 신으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를 예배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들은 수많은 다른 신들을 예배했으며, 무함마드가 어렸을 때 카아바는 여러 신과 여신들의 신상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랍 사람들이 해마다 무역을 위해 메카에 왔을 때, 그들은 또한 관례적으로 카아바 순례 의식을 행했다. 신전 주위를 일곱 번 걸어서 돌고 벽에 끼워진 거룩한 흑석(알 하자르 알 아스왓)에 입을 맞추거나 그것을 만지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적으로 대단한 의미를 지니는 운석이었다. 아랍 사람들은 그다지 종교적인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메카의 신전과 그 의식은 그들의 귀중한 문화적 유산의 중요 요소였다.
아라비아의 하니프, 유대인, 그리스도인
메카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나라의 상태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 상황은 좋지 않았다. 많은 작은 부족들이 서로 전쟁을 하고 있었으며, 연합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페르시아, 비잔티움, 에티오피아 등 주위의 대제국들에게 정복당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대중 종교는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소수의 개인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하니프라는 소수의 지성인들이 이 정치적, 종교적 문제들을 놓고 토론하기 위해 모였다고 한다.
아라비아에는 한 분 참되신 하나님에 대해 그들에게 말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가? 아니다. 고대로부터 많은 유대인들이 아라비아에 살고 있었으며, 그 중 일부는 메카에 있었다. 메카에서 북쪽으로 45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메디나에는 회당과 성경이 있는 세 개의 큰 유대 부족이 있었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번창했다. 그들은 낙타, 집, 땅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도시의 상업을 좌지우지했다. 그들의 교육 및 생활수준은 주위의 이교도 아랍인들보다 높았다. 아랍인들은 유대인들이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알라,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이교도들에게 자기 성경에 있는 영적 보물을 알려 주었을 것 같지는 않다.
또한 아라비아에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었다. 북쪽에는 그리스도인이 된 아랍 부족이 서너 개 있었다. 남쪽 네즈란(Nejran)에는 감독과 제사장, 그리고 시리아어 성경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었다. 동방의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전에 아라비아에 선교사들을 보냈었는데, 아랍인을 회심시키려는 노력이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 아랍인들 대부분은 여전히 이교도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라비아에서 효과적인 선교적 매체가 되는 데 필요한 사랑과 성결한 삶과 영적 능력이 부족했던 듯하다.
무함마드의 젊은 시절
무함마드의 아버지 압드 알라(Abd Allah)는 아들이 메카에서 (570년 무렵)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 무함마드의 어머니 아미나(Amina)는 그가 6세 때 죽었으며, 고아가 된 소년은 할아버지에게 맡겨진다. 노인은 곧 죽었으며 무함마드는 삼촌 아부 탈립(Abu Talib)이 맡아 기르게 되었는데, 그는 무함마드에게 친절히 대했다. 무함마드의 가족은 꾸라이시라는 대단히 유력한 부족에 속해 있었다. 그 부족은 카아바를 책임지고 있었다. 아부 탈립은 영향력이 있긴 했지만 가난했으며, 한동안 무함마드는 사막에서 목동으로 일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12세 때 삼촌을 따라 시리아로 무역 여행을 갔다고 한다.
결혼
그 젊은이는 능력 있고 좋은 성품을 가진 남자가 되었다. 25세 때 그는 메카에서 카디자(Khadija)라는 한 부유한 미망인에게 고용되어 그녀의 대상을 인도하여 시리아로 갔다. 그는 이 사업에 크게 성공하였으며, 그가 돌아오자 40세였던 카디자는 그에게 청혼했다. 무함마드는 동의했으며 아내는 그에게 사랑과 재물과 메카 사회 내의 영향력 있는 지위를 가져다주었다.
무함마드와 카디자 사이에서는 두 아들과 네 딸이 태어났으며, 25년 후 그녀가 죽을 때까지 그는 다른 아내를 두지 않았다. 그들은 두 아들 모두 유아기 때 죽는 큰 슬픔을 겪었다. 이 시기 동안 무함마드는 메카의 주요 인사들과 교분을 맺었으며, 그 나라의 종교적 정치적 상황에 매우 정통하게 되었다. 카디자에게는 그리스도인이 된 하니프 친척이 한 명 있었으며, 무함마드는 아마도 그와 또 다른 하니프들과 아라비아의 문제들을 논의했을 것이다. 무함하드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알라(하나님)를 예배하며 우상들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계속 카아바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이 알라의 집에 있는 형상들이 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을 것이다.
커지는 영향력
무함마드의 역사에서 알 수 있는 바로는, 그가 진지하게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 같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여행을 할 만한 시간도 있고 돈도 있었다. 그는 학식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묻기 위해 네즈란이나 시리나아 에티오피아로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했을까? 무함마드는 성경에 뭐라고 씌어 있는지 알려고 진지하게 노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듯하다. 그가 알기로 성경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수중에 있었으며, 후에 그는 그런 생각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성경의 내용에 대해 그가 접하게 된 이야기들은 분명 그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줄 능력이 없든가 그럴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전해 준 것이었다. 그 결과 무함마드는 생애가 다할 때까지 참된 복음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교회 여러 분파 간의 심한 다툼을 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선생들에게 가지 않은 것인가? 메카 출신의 아랍인이라는 인종적 자부심 때문에 겸손하게 소수 민족인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려 하지 않은 것인가? 원인이 무엇이었든 간에 바로 이 점에서 무함마드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놓쳤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인 그리스도를 제시해 줄 만한 사람으로부터 영적 도움을 받지 못했다.
무함마드가 알라의 선지자로 임명 됨
무함마드와 하나님을 추구하는 다른 사람들은 이따금 메카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동굴에 가서 묵상하고 예배했다고 한다. 무함마드가 40세였던 610년 무렵 라마단이 있는 달의 어느 날 밤, 그와 그의 가족은 이 동굴에 있었다. 전승에 따르면, 무함마드가 자고 있을 때 가브리엘(Jibril) 천사가 그에게 와서 “읽으라”고 명했다고 한다. 그 명령은 두 번 반복되었으며, 무함마드는 “무엇을 읽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천사는 대답했다.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읽으라 그분은 한 방울의 정액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노라)”(꾸란 96:1-2, RODWELL)라고 대답했다. 무함마드는 잠에서 깨자 이 체험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 큰 의문에 빠졌다. 그것은 점쟁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인 진(jinn)에게서 온 것인가 아니면 알라에게서 온 것인가? 무함마드는 유대인들에게서 알라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낸 선지자들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랍 사람들에게는 선지자를 보낸 적이 없었다. 이것은 그가 자기 백성의 선지자와 사도가 되어야 한다는 알라의 메시지일까? 그는 신실한 자기 아내에게 이 사실을 털어 놓았으며, 그녀는 그를 위로하고, 이것이 실로 그를 선지자로 임명하는 것이라고 확신시켰다. 하지만 몇 달 동안 더 이상 아무런 계시가 임하지 않자, 무함마드는 대단히 우울했으며 심지어 자살까지도 생각했던 듯하다.
약 2년 후 다른 계시들이 다양한 형태로 임하기 시작했다. 때로 무함마드는 천사 가브리엘을 보았고, 때로는 오직 그만이 어떤 목소리를 들었으며, 때로는 벨소리가 들리면서 천사의 음성이 그에게 전해지는 것을 듣기도 했다. 때로는 꿈에서 메시지가 임했으며, 때로는 그의 생각 속에서 임하기도 했다. 그에게 계시가 임했을 때는 몸 전체가 심하게 흔들리곤 했으며 얼굴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는 종종 땅에 엎드러졌으며 입에서 게거품을 뿜어냈다. 메시지는 언제나 아랍어로 임했으며, 무함마드는 자신이 받은 내용을 말하고, 무함마드의 입에서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그것을 기록했다. 무슬림들은 일반적으로 무함마드가 문맹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죽은 후 이 메시지들을 모아 꾸란으로 만들었다. 꾸란은 암송이라는 의미다. 무함마드는 자신에게 임한 말이 자신의 말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이며, 자신은 그저 “암송자”일 뿐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꾸란이 무함마드의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이라고 믿는다.
무함마드에게 임한 메시지
무함마드가 받은 메시지의 핵심은 한 분 참되신 하나님,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한 알라 외에는 신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이 그의 첫 번째 의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는 것에서 볼 수 있으며, 사람들은 그에 대해 감사를 표해야 한다. 크고 무서운 심판 날이 오고 있으며, 그 때에는 땅이 흔들리고, 하나님이 모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사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예배하고 선을 행한 사람들은 낙원의 쾌락으로 상을 줄 것이고, 악을 행한 사람들은 지옥불로 정죄할 것이다. 악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은 다른 신들을 하나님과 연관시키는 것이다. 무함마드는 이 메시지를 어디서 얻었는가?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로 임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아마 유대인들과 접촉함으로써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진리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아마도 물질주의적인 아랍 사람들은 불쾌해하는 교리, 곧 부활과 최후의 심판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무함마드가 그리스도인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진리들이 어떤 식으로 그에게 임했든, 무함마드는 대단히 진지하게 그 교리들을 선포하면서, 메카 사람들이 회개하고 한 분 하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 애썼다.
메카에서 무함마드가 설교한 결과
무함마드가 자신이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선지자라고 주장했을 때, 즉시 그를 믿은 사람이 몇 명 있었다. 그것은 아내 카디자와 나중에 사위가 된 어린 조카 알리(Ali), 양자 자이드(Zaid)다. 그리고 후에 아부 바크르(Abu Bakr)로 알려진 한 존경받는 상인은 친척은 아니었으나 무함마드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다. 그 밖에 대부분 비천한 신분 출신인 몇몇 사람들이 그 운동에 합류했다. 하지만 무함마드가 꼭 자기 편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도시의 유력 인사는 그를 무시하고 곧 조롱하기 시작했다. 일개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그가 누구길래 자기 자신에 대해 그런 주장을 하는가? 부활에 대한 그의 메시지는 믿을 수 없다. 어떻게 죽은 뼈가 다시 생명을 얻게 된단 말인가? 그들은 그가 마술을 부리고 사기를 친다고 비난했다. 무함마드가 카아바의 신들은 신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 메카 사람들은 점점 더 화가 나서 1백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적은 무리의 추종자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함마드에게는 손댈 수 없었다. 삼촌 아부 탈립이 그를 보호했기 때문이다.
핍박이 너무 심해져 무함마드는 추종자 80명을 기독교 국가인 에티오피아로 보냈다. 그들은 거기서 후한 대접을 받았고 후에 메디나에서 무함마드와 다시 만났다. 아무리 극심한 반대가 있어도 무함마드는 자기 원수들을 계속해서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회심자들이 생겨났으며, 무함마드는 이전의 선지자들과 신자들이 고난의 때에 어떻게 용감하게 대처했는지 말해 주면서 그들에게 강건하라고 권면했다.
무슬림 공동체의 발달
이 기간 동안 무함마드는 아랍 사회처럼 혈연으로 결속된 것이 아니라, 알라와 그의 사도에 대한 믿음으로 결속된 사람들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에 몰두했다. 후에 그들의 신조(샤하다)가 된 그들의 기본 믿음은 “알라 외에는 신이 없다.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선지자)다”라는 것이었다. 알라와 그의 사도를 믿는 믿음에 복종하는 사람들은 무슬림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아랍어로 무슬림은 ‘복종하는 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같은 아랍어 어원에서 이슬람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 ‘복종’이라는 의미다. 그 운동은 이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처음부터 이슬람은 교회 국가, 정치적 사회에서 표현되는 종교로 여겨졌다. 무함마드는 하나님 아래에서 종교적 문제와 사회적 문제를 둘 다 통치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지위는 이스라엘 신정에서 모세의 위치와 비슷했다. 메카의 꾸라이시는 그들 국가 안에 하나의 국가가 탄생하고 있음을 인식했으며, 그 국가의 존재에 대해 대단히 분개했다.
무함마드는 사명을 시작한 지 10년째 되는 해에(A.D. 620년), 두 번의 큰 상실을 겪는다. 먼저 삼촌 아부 탈립이 죽었다. 그는 친절한 사람으로, 무슬림이 되지는 않았지만 무함마드가 어린 시절부터 그를 돕고 보호해 주었다. 또한 그의 충실하고 유능한 아내였던 카디자도 죽었다. 몇 달 뒤 무함마드는 한 신자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위안을 찾으려 했다. 그는 또한 친구 아부 바크르의 딸인 일곱 살짜리 아이샤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녀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3년 후에 데려 와서 살았다. 그녀는 그가 총애하는 아내가 되었다.
메디나로의 히즈라, 혹은 이주(A.D. 622년)
무함마드는 메카에서는 더 이상 진전을 이룰 수가 없어 보다 호의적인 장소로 자신의 선교 사업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메카에서 북쪽으로 45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야스립으로 가기로 했다. 그곳은 그가 간 후 메디나(Medina), 곧 선지자의 도시로 알려지게 되었다. 야스립 사람들은 카아바를 지키는 사람들보다 더 마음이 열려 있었으며, 그 지역 주민 중 절반 정도는 유대인이었다. 이교도 아랍인들은 유대인들의 우월한 문화와 재물을 부러워하긴 했으나, 그들이 경제적으로 성공한 것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다. 621년에 무함마드는 매년 가는 순례 여행을 위해 야스립에서 메카로 온 열두 사람을 만나 그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그들은 자기가 사는 도시에 돌아가 더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그 다음 해 순례 여행 때는 야스립에서 온 일흔두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가 무함마드를 만나 충성을 맹세했으며, 목숨 바쳐 그를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그 역시 그들을 위해 싸우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충성을 통해 우리는 무함마드가 설립하고자 했던 사회가 어떤 것인지 보게 된다.
야스립으로 떠날 때가 가까워오자, 무함마드는 환상을 하나 보았다. 그는 13년간 고향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려 애썼으나 실패했기 때문에, 그 환상을 곰곰이 생각해 볼 때 기운이 났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메카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았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예배를 드릴 때 유대인들처럼 예루살렘을 향해 드렸다. 그는 예루살렘으로부터 하늘로 옮겨졌는데, 거기에서 과거의 사도들 및 선지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그들은 그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었다. 몇 가지 전승을 보면, 이 밤하늘의 여행(Lailat al-Miraj) 때 육체가 하늘로 올라간 것으로 나와 있다. 하지만 다른 전승을 보면 그의 아내 아이샤는 그날 밤 무함마드가 자신의 침대를 떠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비교적 실패를 거듭했던 이 기간 동안 용기와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 그리고 최종 승리에 대해 확신했던 것은 정말로 칭찬할 만하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서 그렇게 참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말이다.
메카 사람들에게 주는 마지막 메시지에서 무함마드는 그들의 불신을 엄중히 비난하고 그들이 이생에서나 내세에서나 끔찍한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추종자들에게 적은 무리를 이루어 야스립으로 가라고 명했다. 그것은 낙타를 타고 가도 몇 주일 걸리는 여행이었다. 꾸라이시가 그를 떠나지 못하게 막으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와 아부 바크르는 그 도시에서 도망가, 동굴에 사나흘 숨어 있다가 안전한 길을 통해 야스립으로 갔다. 아랍어로 히즈라(Hijra)라고 하는 이 일은 622년 여름에 일어났다. 무슬림들은 그 때를 그들 역사의 원년으로 정했다. 이슬람이 선지자와 그의 추종자들이 메디나에서 공동체를 세웠을 때 진정으로 시작되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무슬림 국가들에서는, 문서, 편지, 신문 등은 히즈라를 기점으로 날짜를 계산한다[A.H., anno Hegirae, 무슬림 음력의 시작 날짜].
유대 기독교 전통과의 단절
메카에 있는 동안 무함마드가 자신이 선지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기적을 행했다고 주장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를 보내셨음을 사람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어떤 표적을 보여 줄 수 있느냐고 물어 보면, 그는 자신의 기적은 꾸란이라고 대답했다(꾸란 각 장의 구절들[아야]은 아랍어로 표적이라고 불린다). 어느 누구도 그런 것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무함마드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성경이 진실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것을 잘못 해석했으며 그들 자신의 종교를 타락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람들 하나님을 다시 참되게 예배하라고 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자신을 보냈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종교였다. 그는 예배를 인도하면서 유대인들처럼 예루살렘을 향해 예배를 드렸으며, 유대인들의 충성과 지원을 받으려 애를 썼다. 그는 자신이 신적 존재라는 주장은 한 번도 펴지 않았으며, 사람들에게 “나도 당신과 같은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무함마드가 낙타를 타고 야스립으로 들어갈 때, 여러 부족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 동네에서 묵으라고 강권했다. 그는 그들의 권유를 거절하여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낙타에게 대신 선택하도록 했다. 낙타가 등에 탄 사람이 내릴 수 있도록 자진해서 무릎을 굽히고 앉았을 때, 무함마드는 거기에 거처를 정하고 예배를 드리기 위한 최초의 사원을 세웠다. 그는 금요일 날 첫 설교를 했다고 한다. 그 결과 이슬람에서는 금요일이 회중 집회 날이 되었다. 그는 아들 자이드를 메카로 보내 무함마드의 가족을 새로운 집으로 데리고 오게 했다. 메디나의 정치적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여러 부족들 간에 평화를 유지할 중심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무슬림이 되자, 곧 무함마드는 그 도시의 종교적 통치자뿐 아니라 사회적 통치자도 되었다. 그는 지혜롭게 다스렸고 새로 세운 수도에 법과 질서를 정착시킨 듯하다.
무함마드는 처음에는 메디나의 유대인들이 그의 주장을 입증하고 지지해 줄 것을 기대했다. 아마 이 무렵 그에게 계시가 임했던 것 같다. 그 내용은 그를 믿지 사람들에게 회유적 태도를 취하고, 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명령은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꾸란 2:256, RODWELL)는 것이었다. 후에 이 구절은 폐기되었다. 일부 유대인들은 무함마드에게 그가 온 것이 자기들 성경에 예언되어 있다고 확인해 주었으나―그는 바로 그런 확인을 받고 싶어 한 것이었다―대부분은 무관심했다. 그들은 그가 자신들의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메시아는 다윗(다우드) 가문에서 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무함마드는 그들의 태도를 탐지하고는 그들을 위선자라 불렀다. 그러자 그들은 그가 온 것이 그들 성경에 예언되어 있지 않다고 솔직하게 말했으며, 그는 그들이 신성한 책을 잘못 해석했다고 비난했다. 그들이 성경 본문을 바꾸었다고 비난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언급을 빼 놓았다고 비난한 것이다.
이슬람, 독자적인 종교-정치 체계
무함마드는 히즈라 제2년에 유대인들과 완전히 단절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그들의 거룩한 속죄일을 지켰으나, 이제는 대신 라마단 금식월을 제정했다. 그는 또한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그는 그것이 이스마엘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양을 제물로 바친 것을 기념해서 희생제(이드 알-아드하)를 제정했다. 이제껏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예배를 드릴 때 북쪽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드렸으나, 기도 방향을 메카로 바꾸라는 계시가 그에게 임했다. 어느 날 그가 사원의 신자들 앞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서서 기도를 인도하고 있을 때, 그는 갑자기 방향을 남쪽으로 바꾸더니 메카를 향하고 예배를 마쳤다고 한다.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자 이런 식으로 그는 꾸라이시의 호의를 얻으려 했다. 무함마드는 카아바는 아브라함이 봉헌했고 원래 하나님을 예배하던 중심 장소였다는 말로 이러한 급격한 변화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예배에서 이렇게 방향을 바꾸는 것은 대단히 중대한 의미를 지닌 행동이었다. 그것은 유대 기독교 전통을 버리고, 성경의 전통과 관련되긴 했으나 여러 본질적인 면에서 그 가르침과 충돌되는 새로운 길을 시작함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이제 독자적인 종교-정치 체계를 확립했다.
무력을 사용하기로 결정함
메디나에서 이듬해를 보내는 동안 메카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의 삶은 대단히 곤궁했다. 돈은 다 떨어졌고, 메디나 신자들의 손님 대접도 이제는 억지로 이어져 가고 있는 형편이었을 것이다. 공동체가 계속 존재하려면 뭔가를 해야 했다. 알라는 어떤 해결책을 제공해 주었는가? 무함마드에게 이러한 계시가 임했다. “오, 선지자여, 이교도들과 싸우라…그리고 그들을 호되게 다루라”(꾸란 9:73, RODWELL). 그래서 무함마드는 보통 베두인 족장들이 재정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듯이 하기 시작했다. 신적 승인을 얻어, 메카에 있는 원수들의 대상(隊商)을 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13년 동안 평화로운 방법으로 그들을 굴복시키려 애썼으나 실패했다. 이제 그는 무력을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대상을 포획함으로, 그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한편 자기에게는 도움이 되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에 따라, 무함마드는 아랍인들이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던 성스러운 달에 메카에 속한 대상을 포획하기 위해 사람들을 보냈다. 그들은 성공을 거두고 전리품을 나누었다. 무함마드에게 계시가 임했다는 이유로 성스러운 달을 범한 것도 정당화 되었다.
이 승리에 고무되어, 무함마드는 상품을 싣고 시리아에서 막 돌아오는 대단히 큰 대상을 포획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몸소 3백50명의 무장 병력을 이끌고 나아가 바드르라는 곳에서 대상을 보호하기 위해 메카에서 오던 1천 명의 군대를 물리쳤다. 메카군 마흔아홉 명이 죽고, 무함마드는 추종자 열네 명을 잃었다고 한다. 전리품은 전사들끼리 나누었으며, 5분의 1은 궁핍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무함마드가 가졌다. 이것은 전리품 분배의 선례가 되었다. 바드르(바드르 전투)의 승리는 이슬람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무함마드에게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신다고 확신하게 해 주었다. 그것은 그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승자의 편이며 앞으로 승리를 거두어 이익을 누리게 되리라고 확신하게 해 주었다. 그것은 꾸라이시에게 경종을 울려 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침내 무함마드에게 패배할 것이라고 두려워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또한 많은 이교도 아랍인들이 메디나로 와서 무함마드를 자신들의 통치자로 받들도록 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슬람 개종자를 얻는 데 있어 무력이 (말로 하는 설득보다) 더 효과적임을 보여 주었다.
메디나 유대인들에 대한 공격
유대인들은 무함마드가 바드르에서 승리를 거둔 것에 대해 기분이 좋지 않았으며, 몇몇은 메디나 사람들이 전투에서 자기 동족을 죽인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을 조롱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무슬림 역사가들은 이 일로 여자 한 명을 포함한 적어도 네 명의 유대인이 무함마드의 열광적 추종자들에게 암살당했다고 말한다. 무함마드는 암살자들이 한 일을 꾸짖지 않았다.
무함마드는 유대인들이 자기의 적임을 깨닫고 그들을 제거하기로 했다. 그는 바누 카이누카(Banu Qainuqa)라는 부족이 협정을 어겼다고 비난하고, 그들에게 이슬람을 받아들이라고 통지했다. 그들이 거부하자, 그는 보름 동안 포위 공격하여 그들을 진압하고, 집에서 쫓아내고, 재산을 모두 빼앗았다.
그런 직후 1천 명의 군대가 무함마드를 쳐부수기 위해 메카에서 왔다. 그들은 메디나 부근 우후드(Uhud)라는 곳에서 무슬림 군대를 만났으며, 그들에게 패배를 안겨 주었다. 무함마드 자신도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 때문에 메카 사람들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계속 전진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 패배는 무함마드에게 수치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그는 명령을 불순종한 무슬림 군사들이 잘못한 것이며, 이 패배는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 위안을 얻었다. 최종 승리가 약속되었으며, 무함마드는 추종자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전투에서 사망자가 생기는 슬픔 가운데서도 참고 견디라고 격려할 수 있었다.
무함마드는 적대적인 여러 부족들을 싸워 물리친 후, 또 다른 유대 민족 바누 나디르(Banu Nadir) 부족을 공격했다. 그 부족은 무함마드의 일부 적에게 우호적이었다. 무함마드는 그들에게 모든 재산을 두고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들이 거절하자, 무슬림 병력을 보내 그들의 대추야자 나무를 베어 버리고 재산을 망쳐 놓았다. 그들이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나서야 낙타 등에 실을 수 있는 만큼만 가지고 떠나게 했다. 그들의 무기와 농작물은 무슬림들이 나눠 가졌다.
얼마 후 무함마드는 바누 쿠라이자(Banu Qurayza)라는 또 다른 유대 부족을 공격했다. 그들은 그 때까지는 그에게 우호적이었으나 최근 그의 전투 하나에 참여하지 않았다. 전승에 따르면 가브리엘이 무함마드에게 와서 일어나 “그 책을 가지고 있는 우상 숭배자들, 곧 바누 쿠라이자”를 치라고 명했다고 한다. 그들은 식량이 떨어지고 더 이상 저항할 수 없게 되자, 바누 나디르처럼 자기들도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해 달라고 청했다. 무함마드는 그 요청을 거부하고 무조건 항복하라고 명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야만 했다.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노예로 팔리고, 재산은 무슬림 군사들이 나누어 가졌으며 8백 명의 남자들은 메디나로 끌려가 거기서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메디나와 그 부근의 유대인들은 제거되었다.
무함마드의 아내들
카디자가 죽은 후 무함마드는 다른 아내를 몇 명 더 두었다. 그는 여섯 번째 아내와 결혼한 후 자기 양자 자이드의 아름다운 아내인 자이납과 결혼하고 싶었다. 아랍 관습에 따르면 양자가 아내와 이혼했다 해도 양자의 아내와 결혼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이납을 취해도 좋다고 허락했다는 계시가 무함마드에게 임했다. 그래서 자이드는 그녀와 이혼했고 그녀는 무함마드의 일곱 번째 아내가 되었다. 무슬림 역사가들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죽을 당시 9-11명 사이의 아내와 6-7명의 첩을 두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마리아로, 이집트 통치자가 무함마드에게 준 콥트 족 그리스도인 노예였다. 아내들은 각각 방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으며, 무함마드는 번갈아 그들의 방에서 잤다. 당연히 그 선지자의 집안에 언제나 평화가 감돌지만은 않았다.
메카와의 마지막 전투
히즈라 제5년에, 꾸라이시 부족은 무함마드와 그의 메디나 통치를 멸망시키려고 마지막으로 결사적으로 노력했다(트렌치 전투). 그들은 병사 1만 명을 데리고 메디나에 접근했다. 무슬림은 성 주위를 둘러 참호를 파서 방어했으며, 메카 사람들은 그 참호를 돌파하고 성을 점령할 수가 없었다. 식량이 다 떨어지자 그들은 메카로 돌아갔으며 다시는 무함마드와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함마드는 메카를 진압하기로 했다. 그곳은 아라비아에서 그가 가장 소유하고 싶은 곳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알라의 집으로 순례 여행을 가기를 간절히 바랬으며, 그래서 628년에 한 떼의 무슬림 순례자들과 함께 메카를 향해 갔다. 하지만 꾸라이시 부족은 그들이 성에 들어오는 것을 거절했다. 그래서 꾸라이시 부족과 협상을 한 끝에 10년간 전쟁을 하지 않기로 동의하고,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이 다음 해에 무장하지 않고 메카에 갈 수 있도록 허락하는 협정을 맺었다. 선지자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패배했다고 생각했으나, 무함마드는 그것이 대승리라고 확신시켰다. 진리의 종교인 이슬람이 “(모든 다른 종교 위에 있도록)”(꾸란 48:28, RODWELL)는 계시가 임했다. 이제부터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지위를 이슬람이 대신할 것이다.
반역을 일으키는 다른 부족들에게 여러 번 승리를 거둔 후, 629년에 무함마드와 2천 명의 추종자들은 협정으로 얻은 접근권을 이용해 메카에 가서 소(小) 순례 여행(Lesser Hajj)을 했다. 그들이 다가오자, 꾸라이시 부족은 그 도시를 비워 두고 떠났으며, 무슬림들은 비무장 상태로 들어갔다. 무함마드는 모든 이교 의식을 행했다. 아직 온갖 형상들로 가득 차 있는 카아바 신전 주위를 일곱 바퀴 돌고, 거룩한 흑석에 입 맞추고,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는 또한 열한 번째 아내와 결혼했으며, 전에 원수였던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이슬람의 중심지 메카
10년간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기로 합의하긴 했지만, 무함마드는 아라비아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메카를 정복해야겠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소 순례 여행을 마치고 메디나로 돌아가자마자, 1만 명의 군대를 일으켜 다시 메카로 가기 시작했다. 그가 그 도시에 이르렀을 때, 꾸라이시 부족의 지도자이며 무함마드의 최고 정적(政敵) 중 한 명인 아부 수피안(Abu Sufyan)은 더 이상 저항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정복자를 맞으러 나와 무슬림이 되었다. 군대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그 도시로 들어갔다. 무함마드는 카아바 신전으로 가서 우상의 형상들을 꺼내 부숴 버리라고 명했다. 그는 자신이 8년 전 도망 나온 바로 그 도시의 지배권을 획득했다. 그는 특정 범죄로 처형당한 몇몇 사람을 빼고는 메카 사람들에게 특별 사면을 선포했다. 메카는 이제 이슬람의 중심이 되었으며, 무함마드가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실로 무함마드와 추종자들에게는 승리와 큰 기쁨의 날이었다. 새로 신자가 된 메카 사람들에게는 최근 반역적 후나인(Hunain) 몇 부족을 진압하고 나서 얻은 많은 전리품을 후하게 나누어 주어 복종에 대한 보상을 해 주었다. 하지만 일부 옛 신자들을 이에 대해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력에 의한 회심
히즈라 제9년에 많은 부족들은 더 이상 무함마드에게 저항할 수 없음을 깨닫고, 와서 그에게 항복했다. 이 때 한 계시가 임했는데, 회심시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이전의 명령(꾸란 2:256, RODWELL)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금지된 달이 지나면 너희가 발견하는 불신자들마다 살해하고 그들을 포로로 잡거나 그들을 포위할 것이며 그들에 대비하여 복병하라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예배를 드리며 이슬람세를 낼 때는 그들을 위해 길을 열어 주리니 실로 하나님의 관용과 자비로 충만하심이라)”(꾸란 9:5, RODWELL). 이 명령의 목적은 우상 숭배를 종식시키는 것이었으며, 적어도 외적으로는 대단히 성공했다. 이교도들은 무력에 의해 강압적으로 무슬림이 되었을 뿐만이 아니었다. 아라비아 북부의 우카이델(Ukaider)이라는 한 그리스도인 군주는 자기가 이슬람을 받아들인다면 목숨을 내 놓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후에 그는 그렇게 했다. 이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예배한다는 이유로 당시에 다신교도로 여겨졌다고 추론할 수 있다.
하지만 아라비아 남부 네즈란(Nejran)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다른 정책을 시행했다. 전승에 따르면 이 큰 기독교 공동체는 무슬림이 되라고 명하는 무함마드의 편지를 받자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굴복해야 하는가? 아니면 무함마드와 싸워야 하는가? 그들은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하여 그와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감독 한 명과 지도자 여러 명이 메디나로 긴 여행을 떠났다. 그들은 사원에서 무함마드를 만났으며, 무함마드는 그들을 환영하면서 그들이 거기서 기독교 예배를 드리는 것을 허락했다. 사흘 뒤 무함마드는 그들에게 이슬람을 받아들이라고 권했다. 이사(예수)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는데, 무함마드는 예수가 자기 형제이며 그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병든 자를 살리고 죽은 자를 일으켰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으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무슬림이 되기를 거부했다.
이 때 무함마드에게 계시가 임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저주로 재판해 보자고 도전하라는 것이었다. 서로 저주하여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하나님이 결정하시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무함마드는 딸 파티마와 사위 알리(무함마드의 사촌) 그리고 그들의 아들인 하산(Hasan)과 후세인(Husayn)과 함께 나가 외투 아래 앉았다. 그리스도인들이 최고급 비단 옷으로 장식하고 그들을 만나러 왔다. 그들은 이슬람의 거룩한 가족이 검소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으며, 무함마드의 저주를 받아 멸망할 것이 두려워서, 그 재판에 참여하지 않겠노라고 했다. 이슬람 전승에 그렇게 되어 있다. 이 대단한 대결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쓴 글은 없다.
무함마드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종교를 계속 유지하면서 그의 보호 하에 있도록 허용했다고 한다. 많은 공물을 지불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들은 이런 협정을 받아들이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무함마드로서는 이것이 아마 교육받고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직접 대면한 첫 경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들 종교의 참된 가르침을 배우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았으며, 그저 그들을 진압하고 싶어 하기만 한 듯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성공했다.
대 순례 여행과 무함마드의 죽음(A.D. 632년)
히즈라 제10년에 무함마드는 대 순례 여행(핫즈)를 위해 메카로 갔다. 마지막 순례 여행이었다. 그는 아내들을 모두 데리고 갔으며 수십만 명이 그와 함께 갔다고 한다. 그는 고대 이교 관습에 따라 모든 의식들을 수행하여, 그 관습들을 자신의 종교와 통합시켰으며, 장차 올 모든 순교자들에게 본을 보였다. 거기서 그는 연설을 하면서 “(오늘날 너희에게 좋은 것들이 허락되었으니)”(꾸란 5:5, RODWELL)고 말했다.
시아파 무슬림들의 전승에 따르면, 메디나로 돌아오는 길에 무함마드가 사막의 매우 더운 곳에 대상들을 멈추게 하고 사람들을 주위에 모으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사위 알리를 곁에 세우고, 후계자로 임명했으며, 사람들에게 그를 따르라고 명했다. 다른 무슬림들은 이 전승이 사실이 아니라고 무시한다.
무함마드는 메디나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에 걸렸다. 그는 자신이 죽은 후 추종자들 간에 분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지도자들에게 서로 충성하고 후계자에게 순종할 것을 권했다. 그는 자기가 너무 아파서 예배를 인도할 수 없을 때에는 아부 바크르에게 예배를 인도하라고 지시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곧 그가 무함마드의 후계자가 된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632년 6월 8일, 무함마드는 아내 아이샤의 방에서 그녀의 무릎에 누워 죽음을 맞는다. 바로 그 자리에 무덤을 파서 아라비아의 선지자를 매장했다고 한다. 후에 선지자의 사원이 건립되었으며, 무덤은 순례지가 되었다.
이슬람의 진보
무함마드가 죽자마자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무함마드가 정말로 알리를 후계자로 임명했다 해도, 지도자들은 그를 후계자로 뽑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최종적으로는 아부 바크르에게 충성을 바쳤기 때문이다. 아부 바크르는 첫 번째 칼리프(대리인[혹은 알라의 대리자])가 되었다. 그 후로 칼리프가 세 명 더 있었는데, 모두 다른 무슬림들에게 암살당했다. 네 번째 칼리프가 알리였다. 전쟁이 이어졌고, 무슬림들은 다른 무슬림들을 죽였다. 하지만 이러한 심각한 내부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무슬림 군대는 세계를 정복하러 나섰다. 그들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것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는 증거라고 믿었다.
종교적 열심과 노략하고 정복하려는 열정으로 불붙은 무슬림 군대는 단기간에 페르시아 제국과 비잔틴 제국 군대를 쳐부수었다. 그들은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했고 북아프리카를 누비면서 강력한 기독교 국가였던 곳들을 정복했으며, 스페인을 점령했다. 732년에 들어와서야 그들의 서진 정복은 프랑스 투르 전투(Battle of Tours)에서 찰스 마텔(Charles Martel)의 저지를 받아 중단되었다. 그들은 동쪽으로도 옥서스(Oxus) 강과 인두스(Indus) 강까지 모든 땅을 정복했다. 이슬람은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든 전쟁에 의해서든 계속 전진하여, 마침내 아시아와 아프리카 전역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세계 인구의 5분의 1이 무슬림이다.
평가와 부족한 점
우리는 이슬람 설립자인 무함마드의 이야기를 정확하고 공정하게 이야기해 보려 했다. 우리는 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그에 대해서는 온갖 의견이 표명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가장 완벽하고 거룩한 선지자로 묘사되었다. 또 마귀의 화신으로, 단테에 따르면 멸망 받을 자의 우두머리로 여겨지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을 미혹했기 때문이다. 그가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에 맞서 놀라운 성공을 거둔 대단히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는 지도자로서 사람들의 충성을 이끌어 내고 유지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우상을 매우 싫어하고 자신이 한 분 참된 하나님이라고 생각한 알라에게 열정적으로 헌신한 대단히 종교적인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단일성 교리를 선포한 그의 용기와 불굴의 인내는 실로 감격적이다.
하지만 이 위대한 사람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의 기준에 비추어 평가해 보면 그에게는 뭔가가 부족하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진지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선포하는 자로서 임무를 시작한 듯하다. 하지만 삶의 어딘가에서 그는 길을 잃어 버렸다. 자신을 인도해 줄 만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물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잘못된 길을 택했으며, 그로 인해 자신이나 자신을 따르는 무수한 무리들이 진리에서 멀어졌다. 의도적으로든 무지 때문이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무시함으로, 무함마드는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주시기까지 그와 모든 인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무함마드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적 방편과 심지어 개인적 취향을 자신이 가르친 도덕적 윤리적 원리보다 위에 두었다. 그는 심지어 이교도인 아랍인들조차 잘못이라고 생각한 행동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계시를 이용한 듯하다. 그리고 이슬람이 기독교를 대신하고, 자신이 선지자의 인(Seal of the Prophets)으로서 그리스도를 대신한다고 말함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거부했다. 하나님의 모든 참된 선지자의 메시지는 그보다 앞서 온 선지자들의 메시지와 일치해야 한다. 무함마드의 메시지는 여러 중요한 점에서 이전의 선지자들 및 사도들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모순되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무함마드가 하나님이 선지자였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가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리라고 예언하신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다(마 24:24-25). 우리는 그런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애쓰고 기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