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3년 10월 <그 말씀>의 누가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에 실렸던 글입니다)
누가복음에 대한 설교는 누가복음 해석에 관한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특히 병행구절을 가진 누가복음의 기사들에 대한 해석과 설교는 그 동안 공관복음의 차이에 관한 문제와 관련하여 논의되어왔는데 이점은 이미 공관복음 대조연구와 함께 편집-비평적 해석을 통하여 괄목할 만한 성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본 글에서 필자는 본문중심의 해석적 관심을 통하여 본문이 가진 의도성과 그 역동성에 초점을 맞추어 누가복음의 본문을 해석함으로써 본문의 의미를 보다 원 청중에 부합된 의미로 서술하는데 집중하려고 한다. 눅 5장에 대한 필자의 해석은 누가복음 자체의 문맥과 사건기술에 집중하여 살펴볼 것이며 여기에 (장르이해를 포함한) 문학적 해석능력은 본문이 말하는 사건의 의미를 보다 잘 재구성하게 해줌으로써 이 사건이 갖는 의미와 그 독서효과를 보다 역동적으로 제시할 것이다.
누가복음 5장은 예수님의 갈릴리 초기 사역의 기술(참고. 눅 4:14, 31)로서 크게 네 개의 기사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네 개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1) 베드로 함께 어부들을 부르심(5:1-11)과 2) 문둥병자를 고치심(5:12-16)과 3) 중풍병자를 고치심(5:17-26), 그리고 4) 레위를 부르심과 식탁교제와 금식논쟁(5:27-39). 이 경우 우리는 눅 5장을 적어도 네 개의 설교본문으로 사용할 수가 있다. 물론 누가복음의 사건 배열은 마가복음의 사건배열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강조점이나 메시지가 마가와는 다르고 또한 마태와도 다르다. 이 점은 공관복음 대조서를 관찰하면 잘 알 수 있다. 5장의 간결한 구조적 이해는 제자를 부르심에 대한 기사가 5장의 처음(1-11절)과 끝(27-39절)에 나오고 그 중간에 두 이적기사가 나온다. 5장의 주제는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인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는 사역’ 즉, 회개를 통한 죄 사함의 사역과 제자도의 부름이다. 특히 5장의 이적기사들은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 예수님의 정결사역과 죄 사함의 사역을 강조한 것으로써 이것은 누가복음 전체의 중심된 메시지(눅 24:47)이다.
1. 베드로와 함께 어부들을 부르심(5:1-11)
다른 공관복음들(마 4:18-22; 막 1:16-20)과 비교해 볼 때 이 기사의 특이점은 단연 이적적인 어획(漁獲)과 베드로에 집중된 사건의 전개방식(4[3]-10절)이다. 물론 우리는 이 기사를 ‘부름기사’(call story)로 볼 것인지 아니면 `이적기사`(miracle story)로 이해할 것인지에 따라서 설교(해석)의 내용과 방향이 달라진다. 이 경우, 본문에 대한 설교는 이적기사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믿음과 순종에 대한 강조)하거나 부름기사(제자도)에 대하여 설교하거나 아니면 베드로의 모습을 중심으로 한 인물 설교를 할 수도 있다. 물론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의 주 되심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할 수도 있다. 그리고 믿음과 제자도와 관련하여 선교적인 관점으로도 설교할 수 있다. 이 경우 설교해야 할 청중의 상황은 설교자의 설교방향과 설교구성에 중요한 단초가 된다. 그러나 이 본문이 누가복음 전체의 메시지와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 지에 대하여 누가복음 전체의 흐름과 그 의도(의미)를 잃지 않으려는 해석적 시도는 꼭 필요할 것이다.
특별히 가르침으로 시작된(1절) 이 부름(이적)기사는 다른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나를 따라 오너라”라는 제자도의 부름의 명령이 없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라는 선교적인 명령이 중심을 이룬다. 본문의 사건을 이해하자면 다음과 같다. 1-3절은 사건의 배경과 함께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는 지를 언급하고 있다. 이 기사는 갈릴리의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지난 밤, 밤이 맞도록 수고했으나 고기를 잡지 못하고 허탕을 치며 돌아 온 후에(5절 참조) 그물을 씻고 있는 어부들과 그들의 두 배를 주목하신 주님께서 그 중 시몬의 배를 택하여 육지로부터 조금 띄기를 청한 후에 그 배에 앉으사 무리를 가르치신다. 가르침이 끝난 후에 주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배에 함께 한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절)고 명하자 시몬은 어제 밤의 그 악몽 같은 헛수고의 시간을 회고하며 다시 사용하기 위하여 씻겨진 그물처럼 주님의 말씀에 순종(의지)하여 그물을 내린다. 아마도 그가 이렇게 그물을 내리기까지에는 배에서의 예수의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 점은 그가 언급한 “말씀에 의지하여”(5절)라는 표현(“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새”[1절)과 “말씀을 마치시고”[4절]에서 ‘말씀’이란 단어의 반복된 사용)과 그 앞 뒤 정황을 고려한다면 전혀 무리한 해석일 수가 없다. 즉 어부 시몬이 어부가 아닌 주님의 말씀에, 그것도 상식 밖의 시간(그물 씻는 시간)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의 말씀(4절)을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전의 이적사건(4:38-39)과 함께 배에서 들었던 예수님의 말씀(3-4절[1절 참조])이 주는 믿음이었을 것이다. 그러자 놀랍게도 어제 밤에는 밤이 맞도록 수고해도 전혀 잡지 못했던 물고기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혔고 이 놀라운 일을 목도한 시몬 베드로는 주님(의 현존)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다(8절). 이 고백 역시도 배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치심 - 그 내용을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의 결과로 여겨진다. 이 고백 후에 주님은 시몬에게 사람을 취하는 사람 즉,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을 부여하고 이에 그들은 예수를 좇는 제자(베드로)가 된다(10-11절).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말씀(의 들음)과 순종과 회개와 사명부여라는 등식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복음서를 통해 누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회개’와 ‘죄 사함’, 그리고 이 복음(“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을 만방에 증거하는 일(선교적 일)이다(눅 24:47-48 참조). 이 선교적 일을 수행하는 데에 최초로 부름 받은 시몬은 이 사역에 가장 중요한 인물(예수의 제자)로 제시되며, 이적적인 놀라운 어획을 경험한 시몬 베드로의 고백(회개)의 모습과 예수의 부르심은 이 일에 가장 중요한 범례가 된다.
이처럼 우리는 본문의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상상력을 동원하여 사건의 줄거리를 보다 적절하게 재구성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을 문학적 용어로서는 ‘틈메우기’(filling gaps) 방법이라고 한다. 주해를 위한 이 ‘틈메우기’의 해석방법은 다른 공관복음서의 도움을 받아서 본문에 나타난 행간의 여백과 생략을 적절하게 메우고 보충하여 그 당시의 시간과 공간을 적절히 직조(織造)하여 사건을 재구성하여 강해한다면 이러한 강해는 청중의 삶에 매우 실제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이 경우 해석자는 사건의 발단과 전개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사건의 중심인물(‘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과 행동이 어떻게 전환되는 지, 그리고 대담자인 시몬의 형편과 행동을 살핌으로 사건이 갖는 의미의 주안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이 경우 해석자는 누가의 사건 진술방식과 스토리의 흐름을 세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령 시몬 베드로의 모습(소명)을 중심으로 이 기사를 재구성 한다면, 어제 밤의 헛수고로 그물을 씻고 있는 시몬 -> 시몬을 주목하며 그의 배를 바다에 띄우고 무리를 가르치신 예수님 -> 가르침 후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도록 명함 -> 순종을 통한 놀라운 어획을 경험 -> 죄인임을 고백하는 시몬 베드로 -> 사람을 취하는 사명이 시몬에게 주어짐.
2. 문둥병자를 고치심(5:12-16)
이어지는 기사는 ‘온 몸에 문둥병이 들린 사람’을 고친 예수님의 이적기사다. 이 기사는 예수께서 동네에 계실 때 한 문둥병자가 예수의 말씀을 듣고 동네로 나아와 주님으로부터 고침(깨끗함)을 받은 이적기사로서 본문의 설교는 예수님의 긍휼하심과 그 능력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고 병자의 믿음에 설교의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하여 그가 두려움 없는 사랑의 사람(의원)이시며 능력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후자의 경우는 병자의 ‘병의 심각함과 절박함’(온 몸에 문둥병이 들림)과 ‘간절함’(엎드려 간구)과 ‘저돌성’(사람을 만날 수 없는 문둥병자, 그것도 온 몸에 문둥병이 걸린 사람이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로 와서 주님께 나아왔다는 사실)을 통해 그의 ‘두려움 없는 믿음’을 보게 된다. 문둥병자의 이러한 반응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가 깨끗케 되기를 원하셨고(“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13절]”), 그를 만져주셨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두려움 없는 사랑의 행동’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님의 중심된 사역이 있다면 그것은 정결사역 즉 죄를 용서함이다. 이것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이며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과 기쁨이 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특히 5장에서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17절)과 ‘의원’(31절; cf 4:23)으로서 묘사된 주님의 모습은 이 이적기사의 해석적 배경이 되기에 충분하다.
예수님이 말씀만으로도 그를 깨끗하게 할 수 있지만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말씀하신(13절)” 모습은 정결의 대속적 사역과 그 적극성을 잘 암시해 준다. 문둥병자의 간구에 단지 멀리서 “가라사대”가 아니라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의 모습은 예수님의 ‘두려움 없는 긍휼의 사랑’을 잘 보여준다. 율법(정결법)에 의하면 결코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문둥병자(레 13:45-46), 그것도 보기에 조차 혐오스러운 ‘온 몸에 문둥병이 들린 사람을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신의 손을 내밀어 그를 접촉하신 주님(불결해 지신 주님)의 모습은 독자들에게 율법(정결법)을 어긴(율법의 경계를 넘어선), 아니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두려움 없는 위대한 희생적 사랑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문둥병자를 만져 치유하셨기 때문에 제의적으로 불결하게 되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마을을 떠나 광야로 가심(16절)은 마치 백성의 죄를 대신 지고 광야로 간 구약의 ‘아사셀의 염소’의 모습(레 16:20-22)과 비교될 수 있다.
율법(레 14:1-32)에 따르면, 문둥병의 치유과정은 제사장의 역할과 제물에 의해 시행된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치유는 이러한 제의적 의미를 성취하고 있음을 암시해준다. 문둥병자를 고치신 주님의 모습은 대신 맞음(불결하게 됨)으로 우리가 나음(깨끗하게 됨)을 입게 되었다는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 가장 극명하게 성취한 모습으로, 지금 주님은 이러한 대속적 사랑(속죄적 희생)을 실천하시고 계신다. 이것은 요한이 말한 “말과 혀로만”의 사랑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보여주신 사랑(요일 3:18)이며 “두려움 없는 사랑”(요일 4:18)의 모습이다. 이 모습은 또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라는 진리를 몸소 보여주신 산 교훈이다.
주님이 그를 만지며 깨끗케 됨을 선언하자 문둥병이 즉시 없어지게 됨(13절)은 주님의 위대한 능력의 결과임을 의미한다. 특히 율법을 따라 제사장에게 그것을 보이고 깨끗케 되었음을 확증하라는 예수님의 제안(14절)은 그 동안 문둥병자가 고통당했던 모든 사회적인 단절과 불행으로부터 회복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임을 잘 보여준다. 깨끗케 된 문둥병자는 동네로 돌려보내고, 제의적으로 불결해진 자신은 동네를 떠나 광야에 홀로 지내시는 모습(15-16절) 속에서 주님의 위대한 대속적 사랑을 본다.
사실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려 깨끗함을 간구한 그 문둥병자의 간절함과 절박함은 죄인인 우리 모두의 간절함과 절박함이 되어야 한다. 특히 누가의 관점에서 병든 자를 죄인으로 묘사한 점(눅 5:31-32)을 비추어 볼 때, 이 병자의 모습이나 문둥병의 모습은 개인과 공동체에 있어서 죄의 심각한 결과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율법도 어찌할 수 없어 축출하고 격리해야만 하는 이 병자를 예수께서 치유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 이루어지는 메시아의 위대한 사역(눅 7:22)이다. 이것은 주의 은혜로 죄인을 깨끗케 하는 복음의 위대한 모습이기도 하다.
3. 중풍병자를 고치심(5:17-26)
연이어 기술된 중풍병자를 고친 이적기사 역시도 예수님의 가르치심의 사역(17절) 중에 일어난 기사로서 이로 인해 종교지도자들과 논쟁이 발발된다. 이 기사에 대한 설교는 이적기사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아니면 논쟁기사로서 취급해야 할 것인가에 따라서 설교의 방향이 달라질 것이다. 이적기사라고 할 때에는 병자나 친구들 - 이 경우엔 그를 주님께 데리고 나온 친구들 - 의 믿음을 강조할 것인가 아니면 치유자(예수님)의 신분과 능력을 강조할 것인가 하는 점도 설교를 듣는 회중의 상황 혹은 필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 기사는 ‘주님이 과연 누구신가’(21절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문)에 대하여 설교의 초점을 맞출 수도 있고, 중풍병자의 친구들의 믿음(20절의 주님의 선언)에 대하여 설교의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어쩌면 이 두 가지가 설교에 병합될 수도 있다. 물론 독자는 이 기사를 통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던진 질문에 대하여 적절한 답변을 얻게 된다. 과연 예수는 하나님을 모독한, 즉 신성모독죄를 범한 수치스러운 사람인가? 아니면 거룩하신 능력의 하나님(주님)이신가? 이 질문에 대하여 누가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중풍병자에 대한 치유사역(정결사역)을 중풍병자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건으로 종결지음(25-26절)으로써,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사람, 즉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하신 분(주님)이심을 제시한다(24절).
종교지도자들이 누가복음에서 처음으로 소개되는 이 이적기사는 그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지역으로부터 나왔다(“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는 사실로 인하여 예수님에 대한 종교지도자들의 반대가 온 이스라엘로부터 나타났음을 암시한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이적사역은 사방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눅 4:14, 37). 특별히 나사렛에서의 안식일 강론(눅 4:28-29)과 문둥병자를 고치신 소문과 그로 인하여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따름(5:15)은 종교지도자들의 적대적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으리라고 본다. 누가가 지적한 대로 ‘말과 일에 능한’ 나사렛 예수의 사역 즉, 메시아(선지자)로서의 사역(눅 24:19)이 그의 가르치심과 이적사역의 모습 속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특히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는 17절의 언급은 누가의 이러한 관심 즉 성령의 권능을 가진 능력 있는 주님으로서의 모습을 잘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 처음으로 믿음과 죄의 용서가 언급(20절)되고 있는데, 이점은 죄의 용서가 제의적인 것으로부터 오직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점을 예수님의 사역을 통하여 보다 명백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전까지 죄 용서의 사역은 세례 요한의 사역(1:77; 3:3)으로 언급되어졌는데, 여기서부터 저자는 예수님의 사역으로 소개하고 있다.
믿음으로 죄 용서가 주어짐이 선언되어진 이러한 상황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매우 당혹스러운 상황이었고 이것은 일종의 신성모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실제로 누가 과연 하나님을 모독한 것인가 하는 점은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이 기사를 통해 독자는 하나님을 모독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된다. 즉, 거동할 수 없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한 사람이 아니라 이 놀라운 주의 능력으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일에 대하여 예수를 신성모독자로 말한 종교지도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한 사람으로 남아있게 된다. 이 기사는 사람들의 유전만을 지키며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역을 멸시한 종교지도자들의 잘못을 따르지 않도록 우리를 경고한다(39절 참조).
4. 레위를 부르심과 식탁교제와 금식논쟁(5:27-39)
눅 5장의 나머지 부분은 레위라는 세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주님의 제자가 된 후에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풂으로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놀라운 식탁교제를 제공함으로써 참된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그리고 새롭게 도래한 메시아의 시대란 어떤 것인지를 알리고 있다. 특히 식탁교제와 금식에 대한 종교지도자들과의 논쟁은 메시아의 시대의 의미를 보다 잘 제시해 준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당시 백성들의 경멸의 대상이었던 세리를 조건 없이 제자로 부르심을 보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군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짐을 배운다. 오늘날로 말하면 오히려 그 시대의 경건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새 시대의 일군으로 적합하게 준비된 사람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어부와 세리를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부르셨다.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를 주목하시고 그를 부르시자 세리는 일어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는다(28절). 그리고 이어 누가는 그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 큰 잔치를 베풀었다(29절)고 말한다. 제자로 부르심에 대한 세리의 반응은 세 가지로 나타났는데 1) 망설임 없이 그곳에서 일어나 2) 모든 것을 버려두고 3) 주님을 좇았다. 단지 그 자리에서 일어난 것을 끝나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고 주님을 좇았다. 특별히 그가 주님을 위하여 베푼 연회는 회심의 결과로 이해되어지는데 이 연회는 (소외된)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훌륭한 기회가 되었다. 당시 갈릴리에서의 큰 잔치는 일종의 공적 행사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잔치에 참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사람들은 메시아의 새 시대를 경험하게 된다. 주의 제자로 부름 받은 레위(세리)의 이러한 반응은 주님의 제자로서 오고 가는 세대의 훌륭한 범례로 소개되며 역사적으로 그는 훌륭한 주의 사도(‘마태’)가 되었다.
죄 용서에 대한 논쟁에 이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들의 율법준수와 경건에 비추어서,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불경건한 사람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다”(32절)고 하였다. 다른 곳에서 누가는 주님의 오심의 목적을 달리 표현하였는데 그것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는” 일(눅 19:10)이다. 이 일은 주님의 근본 사역이며 교회는 이 사역을 위해 매진해야 한다. 소위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찾는 일이 아니라, ‘죄인 부르기/초대하기’며 건강한 자들을 모으기가 아니라 병든 자를 찾아 그들을 회복 혹은 치유(구원)하여 온전한 주의 일군으로 만드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사회의 버림받은 소외계층에 대한 주님의 높은 관심(누가의 관심이기도 함)을 오늘 교회는 배워야 한다. 의사 누가는 의원으로서 병든 자에 대하여 가지는 예수님의 태도와 삶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와 바리새인들과의 금식 논쟁(33-39절)은 참된 제자도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데 그것은 제자들의 경건이 단지 금식과 기도로만 되어지는 개인 경건 혹은 제의적 경건으로만 끝날 것이 아니라 소외계층에 대한 돌봄으로 나아가야 함을 잘 보여준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바라 본 세례 요한의 경건이란 오직 금식과 기도에 국한되고 있지만, 누가가 바라보는 세례 요한의 경건은 훨씬 실제적인 면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로 나눔의 삶, 정직하고 성실한 삶을 말하고 있는데 이점은 눅 3:7-14에서 잘 언급되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죄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역을 단지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일”로 폄하하고 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세리와 죄인들이란 오직 불결한 자들로서 그들은 이러한 소외계층의 비애를 알지 못하고 이들에 대한 돌봄(치유와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소외된 계층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돌봄[자비]의 사역’이 주님의 주된 사역임을 누가는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는데 특히 누가가 강조하는 식탁교제의 모티브는 이점을 잘 제시한다. 오늘 우리의 교회도 누가가 강조하며 보여주는 소외된 계층(세리와 죄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돌봄의 사역(용서[영접]와 접대의 사역)을 우리의 주된 교회사역으로 삼아야 한다. 최근 밥퍼의 사역이나 감자탕 교회의 이야기, 그리고 중국에서 나병환자들을 섬기며 사역하는 김요섭 목사의 돌봄의 사역은 이러한 실천의 아름다운 한 모습이다.
끝으로 본문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질문(33절)에 대하여 예수님이 하신 혼인잔치에 대한 비유와 함께 다른 두 비유로 종결되고 있다. 예수님이 언급한 혼인잔치의 비유는 이미 눅 4:18에서 언급한 탕감과 해방(자유)을 선언하는 ‘주의 은혜의 해’와 같은 구원의 새 시대의 축제적인 모습이다. 이 축제(잔치)의 분위기는 눅 15장의 세 비유들을 통해서도 잘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비유 역시, 메시아의 시대는 옛 시대와는 달리 질적으로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왔음을 의미한다. 이 구원의 시대에는 인종적, 계층적, 성적 차별을 넘어서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죄용서와 영접을 받고 주님의 식탁에서 함께 먹고 마실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을 경험할 수 있다. 예수의 사역을 통해 나타난 이 메시아의 시대는 질적으로 새롭고(kainos), 시간적으로 새로운(neos) 시대를 의미한다. 주님의 비유처럼 이 시대는 새 옷으로 꾸며진 시대이며 새 포도주와 새 가죽부대로 이루어진 시대이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새 시대의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특히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라고 하는 39절의 누가의 역설적인 경고는 우리로 하여금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범한 잘못처럼 단지 지금의 종교적 관행에만 젖어 진정한 새 시대의 삶(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깊은 경각심을 갖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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