משׁה 2009. 7. 26. 23:44

글쓴이 : 민영진

출처 : 대한성서공회

 

 

 

 

이방여인 룻이야기

 

흉년과 이향(離鄕) (룻기 1:1)

 

1사사(士師)들이 치리(治理)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寓居)하였는데 (『개역』) 

 

1 사사(士師)들이 치리(治理)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居留)하였는데 (『개역개정판』)

 

 1 사사(士師) 시대에 그 땅에 기근이 든 일이 있었다. 그 때에, 유다 베들레헴 태생의 한 남자가, 모압 지방으로 가서 임시로 살려고,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표준새번역』)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

 

 

 

 

“사사들이 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우리말 번역 『개역』의 「룻기(記)」는 이렇게 시작된다. 독자들에 따라서는 룻기가 퍽 재미있는 책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자세히 짚어 가며 읽어보면, 반드시 그렇게 쉬운 책만은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우선, 첫 장 첫 절부터가 이스라엘 역사에 친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뭔가 너무 많이 생략된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란 이스라엘 역사에서 어느 때이며,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할 때, 그 땅이란 또 어디인가? “사사”(士師)란 무엇인가? 또 “치리”(治理)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사사들이 활동하던 때라면, 이스라엘에 아직 왕이 있기 직전 시대를 일컫는다. 그러니까 이집트 탈출 이후 시내 광야에서 유랑 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으로 진입하고서도 한참 후 사울로부터 비롯되는 왕정(王政) 직전까지의 시기(1250-1050 B.C.)가 사사들이 활동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 시대를 “사사 시대”라고 한다.

 

“사사”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쇼펫”은 “재판관(裁判官)”을 일컫는다. “사사”라는 말은, 옛날 중국에서 법령(法令)과 형벌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재판관을 일컫는 말이었다. 중국어 성서가 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므로 일본어 번역이나 한국어 번역이 이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공동번역 성서』(1977)는 “사사(士師)”를 “판관(判官)”이라고 번역하였다. 따라서, ?사사기(士師記)?도 ?판관기(判官記)?라고 하였다. 사사들은 재판관들이었다기보다는 군대 지휘관들이었다. 열 두 지파(支派)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각 지파들이 외적의 침략을 받을 때마다 특별한 통솔력과 능력을 받은 사람이 일어났고, 그 사람 주변으로 지원병들이 몰려와서, 그들이 침략자들을 물리치곤 하였다.

 

우리말 『개역』이나 『개역개정판』에 “치리(治理)”라고 하는 통치 개념의 어휘가 나오지만, 치리로 번역된 히브리어 “샤팟”은 “재판하다”라는 뜻이다. 실제로 사사들은 통치자나 왕이 아니었다. 그들은 침략자를 물리치는 방어 전쟁이 끝나면 본래의 생활 터전으로 돌아갔다. 다시 찾은 해방이나 자유를 지킨다는 구실로 국가 권력을 형성하거나 통치권을 장악한 이들이 아니었다. 따라서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란 사사들이 사사로서 활동하던 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 『개역』의 “치리(治理)”는 그 사전적 의미가 “통치”를 뜻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우리 나라에 들어온 개신교 중에서 장로교회가 이 용어를 “교인으로서 교리에 불복하거나 불법을 범한 교인에 대하여 당회(堂會)에서 증거를 수집하여 심사하고 책벌(責罰)하는 일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히브리어 동사 “샤팟”이 지닌 “재판(裁判)”의 의미를 유추하기 쉽게 해 주는 것도 사실이다.

 

 

 

베들레헴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할 때의 그 땅이란 한 때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았고, 그후에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들어가 살던 가나안 땅이다. 지금의 팔레스타인 땅이다. 지리적 배경으로는 유다의 베들레헴과 모압 지방이 언급되어 있다. 룻기의 주인공은 바로 이 두 곳을 오간다.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한 가족이 기근을 면해 보려고 고향을 떠나 모압 나라로 이주한다. 다른 나라로 살러 이민(移民)을 간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에 흉년이 그칠 때까지 잠시 몸 붙여 살려고 간 것이다.

 

“빵 집”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땅 이름 “베들레헴”은 유다 “산지(山地)”의 한 성읍이다. 이곳의 본래 이름은 “에브랏”이었다(창 35:16,19; 48:7; 룻 4:11). 달리, “베들레헴 에브라다”(믹 5:2), “베들레헴 유다”(삼상 17:12), “다윗의 동네”(눅 2:4)라고도 불렀다.

 

야곱의 아내, 요셉의 어머니, 라헬이 둘째 아들 베냐민을 낳고서 산고로 죽었을 때 그의 묘 위치를 밝히는 곳에서 “에브랏 곧 베들레헴”이라는 곳이 성서에서는 처음으로 언급된다. 바로 이 마을 동쪽 들판이 「룻기」에 나오는 모압 여인 룻의 활동 무대이다. 거기에 있는 길을 걸어 시어머니 나오미와 바로 그 곳을 통과하여 베들레헴으로 들어왔고, 거기 있는 보리밭에서 이삭을 주웠고, 거기 들판에서 룻은 보아스를 만났다.

 

이 곳은 다윗의 출생지이기도 하고, 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된 곳이기도 하다(삼상 16:4-13). 다윗이 압둘람 굴에 숨어 있을 때 다윗의 부하 세 명이 목숨을 내걸고 물을 떠왔던 곳도 다름 아닌 베들레헴의 한 우물이었다 (삼하 23:13-17).

 

 

그러나 이 곳은 무엇보다도 기독교인들에게 익숙한 곳이다.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그 기원이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바로 그분 예수께서 나신 곳으로 알려진 곳(미 5:2)이기 때문이다. 그 직후,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두 살 아래 어린아이들을 모조리 죽이게 했던 곳이 베들레헴이기도 하다(마 2:16).

 

오늘날 이 곳은 “식육점”이라는 뜻을 지닌 “베이트 람(Beit-Lahm)”이라고 불린다. 예루살렘과 남쪽으로 인접해 있는 도시이다. 해발 2,250피트로서 예루살렘보다 100피트가 더 높다. 콘스탄틴 대제가 예수의 구유가 놓여 있던 곳에 세운(A.D. 330) 탄생교회(Church of the Nativity)는 현존하는 교회 중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바로 옆에는 라틴 교부 제롬이 30여 년 동안 머물면서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했다고 하는 굴이 있다.

 

 

 

모압 지방

 

 

 

“모압”이라는 히브리어는 “아버지의 씨”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모압은 롯이 자기의 딸과의 근친상간을 통해서 얻은 맏아들이다(창 19:37). 다음과 같은 창세기의 본문을 직접 보도록 하자.

 

 

 

30 롯은 소알에 사는 것이 두려워서, 두 딸을 데리고 소알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서, 숨어서 살았다. 롯은 두 딸들과 함께 같은 굴에서 살았다. 31 하루는 큰딸이 작은딸에게 말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아무리 보아도, 이 땅에는 세상 풍속대로, 우리가 결혼할 남자가 없다. 32 그러니 우리가 아버지께 술을 대접하여 취하시게 한 뒤에, 아버지 자리에 들어가서, 아버지에게서 씨를 받도록 하자." 33 그 날 밤에 두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대접하여 취하게 한 뒤에, 큰딸이 아버지 자리에 들어가서 누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큰딸이 와서 누웠다가 일어난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34 이튿날, 큰딸이 작은딸에게 말하였다. "어젯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함께 누웠다. 오늘밤에도 우리가 아버지께 술을 대접하여 취하시게 하자. 그리고 이번에는 네가 아버지 자리에 들어가서, 아버지에게서 씨를 받아라." 35 그래서 그 날 밤에도 두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대접하여 취하게 하였고, 이번에는 작은딸이 아버지 자리에 들어가 누웠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작은딸이 와서 누웠다가 일어난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36 롯의 두 딸이 드디어 아버지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37 큰딸은 아들을 낳고, 아기 이름을 모압이라고 하였으니, 그가 바로 오늘날 모압 사람의 조상이다. 38 작은딸도 아들을 낳고, 아기 이름을 벤암미라고 하였으니, 그가 바로 오늘날 암몬 사람의 조상이다.(『표준새번역』 창 19:30-38)

 

 

 

모압의 후손이 모압 백성을 이룬다(민 22:3-14; 삿 3:30; 삼하 8:2; 렘 48:11, 13). 모압의 후손이 흩어져 살던 곳을 “모압 땅” “모압 지방”이라고 부른다(렘 48:24; 룻 1:2, 6; 2:6). 요단강과 사해 동쪽, 아르논의 남쪽 일대를 가리킨다(민 21:13, 26). 넓게는 아모리 차지하고 있던 광활한 지역을 일컫는다. 오늘날은 이 일대를 케락(Kerak)이라고 부른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진입 작전 마지막으로 진을 쳤던 곳이 바로 여리고 맞은 편 모압 광야였다. 모세가 바로 여기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고, 거기에서 죽어 거기에서 묻혔다.

 

1 모세가 모압 평원, 여리고 맞은쪽에 있는 느보 산의 비스가 봉우리에 오르니, 주께서는 그에게, 단까지 이르는 길르앗 지방 온 땅을 보여 주셨다. 2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 온 유다 땅과 3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에서 소알까지 평지를 보여 주셨다. 4 그리고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땅이다. 내가 너에게 이 땅을 보여 주기는 하지만, 네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한다." 5 주의 종 모세는, 주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서, 6 모압 땅 벳브올 맞은쪽에 있는 골짜기에 묻혔는데, 오늘날까지 그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7 모세가 죽을 때에 나이가 백 스무 살이었으나, 그의 눈은 빛을 잃지 않았고, 기력은 정정하였다. 8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평원에서 모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간이 끝날 때까지, 모세를 생각하며 삼십 일 동안 애곡하였다. (『표준새번역』 신 34장)

 

 

이방여인 룻이야기

 

이름들 (룻기 1:2)

2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留)하더니 (『개역』)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개역개정판』)

 

2 그 남자의 이름은 엘리멜렉이고,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이며,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다. 그들은 유다 베들레헴 태생으로서, 에브랏 가문 사람인데, 모압 지방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살았다. (『표준새번역』)

 

 

 

사람 이름

 

 

여기에 등장하는 한 가족의 구성원들인 네 사람의 이름이 소개되어 있다. 남편의 이름은 엘리멜렉이다. 그의 아내는 나오미이다. 그들의 두 아들은 말론과 기룐이다. 구약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어떤 뜻을 가지고 있다. 이름을 짓는 사람이 거기에 어떤 뜻을 담는다. 그리하여 사람 이름은 그 이름을 듣는 이들에게 그 이름이 지닌 뜻을 전달하기도 하고, 듣는 이로 하여금 어떤 뜻을 상상하게 하거나 무엇을 연상하게도 한다. 이름이 지닌 본래 뜻과 그것이 여러 독자들에게 연상시키는 뜻은 일치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룻기 얘를 위해서 룻기의 서두에 등장하는 네 사람의 이름이 지닌 뜻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네 이름들은, 룻기의 내용을 이야기로 전해 준 이야기꾼이 등장 인물들의 행위나 성격이나 특성을 연상시킬 목적에서 고안해 낸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역사적 인물들의 실제 이름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으레 그러하듯이, 이러한 주장들은 늘 논란을 계속하기 마련이다. 그런 문제가 한 편에서 계속 논의되고 있는 중이라 하더라도, 여기에서는 그 이름들이 지닌 뜻이라든가, 혹은 그 이름들이 히브리어 본문 독자들에게 연상시켰을 내용을 함께 알아보려고 한다.

 

이름은 그것을 지닌 이의 운명까지 결정한다고 생각하여, 이름을 지을 때 신중하게 짓는 구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경우나 한국인들의 경우가 일치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역술인(曆術人)을 중심으로 작명소(作名所)가 발달되어 있기도 하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우리와 비슷하게 이름에다가 어떤 뜻을 담았다. 출생할 때 있었던 어떤 사건과 관련된 이름도 있고, 어머니의 한(恨)과 희망이 구석구석 서려 있는 이름들도 있다. 좋은 뜻을 담아 평생 그 이름이 가져다 줄 어떤 행운을 바라는 그런 이름들도 있다. “안위(安慰)”라는 뜻을 지닌 “노아”(창 5:28-29),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을 지닌 “아브라함” (창 17:5), “웃음을 주었다”는 것을 뜻하는 “이삭” (창 17:19), “털보”를 뜻하는 “에서” (창 25:25), “발꿈치를 잡았다” “남의 복을 가로채다”라는 뜻을 지닌 “야곱” (창 25:26)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름들이 저마다 뜻을 지니고 있다.

 

창세기 29장 31절-30장 24절에는 야곱의 열 두 아들들의 이름에 관한 흥미 있는 곁말, 즉 말놀이(語戱)가 나타나 있다. 말놀이는 아디까지나 말놀이일 뿐 사전상의 의미나 의미론적인 고찰과는 무관하다. 그러나 이름을 짓는 당사자들에게는 물론이려니와 듣는 이들에게도 흥미가 있다.

 

야곱의 아내 레아의 경우, 아이를 낳지 못하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하나님께서 “살피시고(라아)”고 마침내 아이를 주신 것이라고 하여, 혹은 마침내 아들을 낳아 “보아라(르우), 아들(벤)이다!”라고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여, 첫 아이의 이름을 “르우벤”이라고 한다. 둘째 아들을 낳고서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하소연하는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시고(샤마)” 아들을 주신 것이라고 하여 아들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짓는다. 셋째 아들을 얻고 나서는, 이제 아들을 셋씩이나 낳았으니 남편도 별 수 없이 자기에게 “단단히 매일 것(라웨)”이라고 하여 아들 이름을 “레위”라고 한다. 넷째 아들을 낳고서는 이제야말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야다)”고 하면서 아들을 넉넉하게 둔 어머니로서의 기쁨이 담긴 “유다”라는 이름을 아들에게 준다.

 

야곱의 아내 라헬의 경우, 아들을 낳지 못해 죽을 마음까지 먹다가 자기의 몸종 빌하를통하여 아들을 얻고서는, 하나님이 자기의 호소를 들으시고 자기의 억울함을 풀어주시려고 옳게 “판단하셔서(딘)” 드디어 아들을 낳아 한을 풀었다고 하여 “단”이라고 한다. 라헬의 몸종 빌하가 또 임신을 하여 야곱과의 사이에서 두 번째로 아들을 낳자, 라헬은 자기가 언니와 “대판으로 겨루어(납툴레이... 닙탈티)” 마침내 이긴 것이라고 하여, 곧 아들 낳기 경쟁에서 승리를 쟁취한 것이라고 하여 둘째 아들 이름을 “납달리”라고 한다.

 

그러자 레아는 자기가 더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자기의 몸종 실바를 데려다가 남편에게 보내어 아들을 얻고서는 “복(가드)을 받았다”고 하여 그 아들 이름을 “갓”이라고 짓는다. 실바가 두 번째로 아들을 낳자, 행복하다(아셰르)면서, 또 여인들이 자기를 행복한(아셰르) 여인이라고 말할 것이라고 하면서 그 아들의 이름을 “아셀”일고 짓는다.

 

단산(斷産)이 되었던 레아가 야곱에게서 다섯 번째 아들을 낳고서, 아들을 보려고 자기의 몸종 실바를 남편에게 주기까지 했던 “그 값을 하나님이 갚아주신 것(사카르)”이라고 하여 그 아들 이름을 “잇사갈”이라고 짓는다. 레아가 다시 임신하여 여섯 번째 아들을 낳고서는, 자기가 아들을 여섯씩이나 낳았으니 이제는 남편이 자기에게 “잘 대해주겠지(자발)” 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스불론”이라고 짓는다.

 

아이를 임신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라헬도 하나님께서 그의 태를 열어주시어서 아이를 갖게 된다. 그리하여 아이를 낳고는 자기도 어머니가 된 것을 확인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부끄러움을 “벗겨 주셨다(아싸프)”고 하여, 혹은 이것으로 그치지 말고 하나님께서 다른 아들 하나를 “더 주실 것(야싸프)”를 바라며, 그 아들 이름을 “요셉”이라고 부른다.

 

 

 

엘리멜렉: 반왕(反王)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이름

 

 

나오미의 남편 이름 “엘리멜렉”은 “엘리”(나의 하나님)와 “멜렉”(왕)의 합성어이다. “나의 하나님이 왕이시다”라는 뜻이다. 룻기에서는 1장 2절과 3절, 2장 1절과 3절, 4장 3절과 9절 등에 이 이름이 반복해서 나온다. 구약에서 이 이름을 가진 이는 나오미의 남편 한 사람 뿐이다. 하나님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자기에게는 왕일 수 없다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찍부터 인간적인 왕 같은 것은 아주 우습게 본 이들이다. 하나님만이 왕이신데 사람이 감히 어떻게 왕이 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집트에 살던 히브리인들은 전제군주 바로와 싸운 이들이었다. 같은 무렵 가나안에 있던 히브리인들은 가나안의 봉건영주들과 싸웠다. 이집트의 전제 군주 바로에게서 벗어 난 히브리인들과 가나안의 봉건영주들을 물리친 히브리인들은 결국 왕 없는 나라를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사사 시대는 바로 왕이 없던 시대였다. 그 때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마다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기드온 사사를 왕으로 세우고 싶었으나, 기드온은 “하나님만이 왕이시라”고 하면서 왕 되기를 거부한다. 기드온의 아들 가운데 아비멜렉(“나의 아버지는 왕이다”)이란 아들이 있었는데, 자기가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외가(外家)의 세력에 힙 입어 왕위에 오르지만, 그의 왕국은 겨우 3년밖에 가지 못한다.

 

 

 

저 유명한 “요담의 우화” (삿 9:8-15)는 다름 아닌 왕을 비웃는 우화이다.

 

 

 

8 하루는 나무들이

기름을 부어 자기들의 왕을 세우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들은 올리브 나무에게 가서 말하였습니다.

“네가 우리의 왕이 되어라.”

9 그러나 올리브 나무는 그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이 풍성한 기름내는 일을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

10 그래서 나무들은 무화과나무에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와서 우리의 왕이 되어라.”

11 그러나 무화과나무도 그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어찌 달고 맛있는 과일맺기를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

12 그래서 나무들은 포도나무에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와서 우리의 왕이 되어라.”

13 그러나 포도나무도 그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과 사람을 즐겁게 하는

포도주 내는 일을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

14 그래서 모든 나무들은 가시나무에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와서 우리의 왕이 되어라.”

15 그러자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너희가 정말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너희의 왕으로 삼으려느냐?

그렇다면, 와서 나의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가시덤불에서 불이 뿜어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살라 버릴 것이다.”

(『표준새번역』 삿 9:8-15)

 

 

 

사무엘 당시 사울이 첫 왕으로 등장하지만, 구약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마지못해, 하는 수 없이, 왕정을 허락하셨다고 말함으로써, 왕 제도 자체가 하나님께서 기꺼이 세우신 것이 아님을 처음부터 밝히고 있다(삼상 8장).

 

 

 

10 사무엘은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하는 백성들에게, 주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그대로 전하였다. 11 “너희를 다스릴 왕의 권한은 이러하다. 그는 너희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다루는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다. 12 그는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으로 임명하기도 하고, 왕의 밭을 갈게도 하고, 곡식을 거두어들이게도 하고,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다. 13 그는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유도 만들게 하고 요리도 시키고 빵도 굽게 할 것이다. 14 그는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왕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15 너희가 거둔 곡식과 포도에서도 열에 하나를 거두어 왕의 관리들과 신하들에게 줄 것이다. 16 그는 너희의 남종들과 여종들과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왕의 일을 시킬 것이다. 17 그는 또 너희의 양 떼 가운데서 열에 하나를 거두어 갈 것이며, 마침내 너희들까지 왕의 종이 될 것이다. 18 그 때에야 너희가 스스로 택한 왕 때문에 울부짖을 터이지만, 그 때에 주께서는 너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다.” (『표준새번역』 삼상 8:10-18)

 

 

 

예언자들의 주류는 반왕국(反王國), 반왕제(反王制)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이들이었다. “엘리멜렉”이란 바로 이러한 반왕전(反王政)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이름이니 얼마나 도도한가?

 

 

 

나오미: 끝내 기쁨을 누린 이름

 

 

 

엘리멜렉의 아내 이름 “나오미”는 참 예쁜 뜻을 지녔다. 엘리멜렉의 아내이며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룻의 시어머니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룻기에는 이 이름이 1장 2절, 3절, 8절 등 여러 곳에서 21회나 언급된다. 히브리어에서 나오미라는 이름의 어근(語根 n“m)은 “즐거움, 기쁨, 사랑스러움, 아름다움”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예쁘니”나 “곱다니” 같은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오미는 유다 땅의 기근 때문에 모압 나라로 가서 살다가 졸지에 남편을 잃는다. 두 아들을 모압 나라 여인들과 결혼시켰는데 그 아들들마저 자식 없이 객사해 버린다.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갔을 때 동네 아낙네들이 나오미를 알아보고 “이게 나오미가 아니냐”고 하면서 반긴다. 그러자 나오미는 그들에게 이제는 더 이상 자기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라고 당부한다. 오히려 자기를 “마라”라고 부르라고 한다 (룻 1:20). 신세가 바뀌었으니 이름도 고치고 싶다는 말일 것이다. “마라”는 “쓴맛, 혹독한 쓰라림”을 뜻한다.

 

 

 

자기의 인생에 큰 변화가 생기거나 예상될 때 사람들이 그 이름을 바꾸는 예가 있다. 아브람(“큰 아버지”)이 아브라함(“많은 무리의 아버지”)로, 야곱(“남의 발꿈치를 잡다” 즉, 남을 밀치고 대신 들어앉거나 남의 이익을 가로채는 행위)이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김”)로, 벤오니(“괴로움의 아들”)가 베냐민(“오른팔의 아들”)으로 바뀐 것 등에서 개명(改名)의 예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나오미의 경우는 이름이 “마라”로 바뀌지는 않는다. 아무도 그를 마라로 부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착한 며느리 덕분에 오벳이라는 손자를 얻고, 그 손자를 아들처럼 키우며 그의 나오미가 지닌 뜻대로 즐겁게 살아간다.

 

 

 

말론과 기룐: 병들어 죽을 이름

 

 

 

맏아들 “말론”은 룻기 1장 2절과 5절, 4장 9절과 10절에서 네 번 나오고, 둘째 아들 “기룐”은 룻기 1장 2절과 5절, 4장 9절 등에서 세 번 언급된다. 말론과 기룐은, 우리 나라의 형제 이름에 돌림자가 나타나듯이, 히브리어 발음으로는 같은 운(韻)을 가지고 있다. 구약에는 이것 말고도 “야발, 유발, 두발(가인)”(창 4:20-22), “우스와 부스”(창 22:21), “이드란과 그란”(창 36:26), “뭅밤과 훕밤”(창 46:21)과 같이 형제 이름에 운이 있는 것이 보인다.

 

말론의 히브리어 이름의 어근(hlwn)의 뜻은 잘 알 수 없으나, 같은 셈족 언어인 아랍어에서 “불임(不姙), 단종(斷種)”을 뜻하므로, 히브리어 독자들은 그의 이름에서 그가 자식 없이 죽은 것을 연상할 수도 있다. 히브리어 “홀레”를 말론 이름의 뿌리로 보는 이들은 그의 이름에서 “병(病)”을 연상하기도 한다.

 

길룐이란 이름 역시 그 지닌 뜻이 어둡고 부정적이다. 히브리어 어근(klwn)은 “작은 그릇, 연약함, 파멸, 끝장” 등을 뜻한다. 그리하여, 히브리어 독자들은 “말론과 기룐”에서 “허약하여 죽은 형제”를 연상하기도 했을 것이다.

 

 

 

『개역』 의 고유명사 표시

 

 

 

엘리멜렉, 나오미, 말론, 기룐, 이들 네 사람은 모두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2절)로 소개되어 있다. 『개역』 성경에 보면 고유명사에는 줄을 그어 표시하였는데,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사람 이름에 외줄을, 그리고 장소 이름에나 족속과 민족 이름 등에는 겹줄을 그어 구분한 것이다. 2절에 나오는 네 사람의 이름에는 모두 외줄이 그어져 있다. 그리고 유다라든가 베들레헴이라든가 에브랏 등의 경우에는 그 이름에 겹줄이 그어져 있다. 이것은 중국의 한문 성경과 일본어 성서, 그리고 우리의 옛 번역인 『셩경젼셔』에서부터 오늘의 『개역』에 이르기까지 줄곧 내려오는 전통이다. 『공동번역』 (1977)과 『표준새번역』 (1993)에서는 고유명사를 고딕체로 표시하였을 뿐, 사람 이름과 장소 이름을 구분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여기 2절에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으로 세 개가 한꺼번에 붙어 나오는 이름들은 어떤 관계일까? 1절의 “유다 베들레헴”이 유다 안에 있는 베들레헴이니까, 2절의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은 유다 안에 베들레헴, 베들레헴 안에 에브랏, 이러한 식일까? 베들레헴이 시(市)라면, 에브랏은 동(洞)쯤 되는 것일까? 그것은 오해이다. “유다 베들레헴”과 “에브랏”이 우리말 『개역』에서 함께 나란히 나오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이러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여기에서 에브랏은 장소 이름이 아니고 족속 이름이다. 따라서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은 “유다 베들레헴 출신의(혹은 태생의) 에브랏 족속 사람들”을 뜻한다. 그러나 『개역』에서 장소 이름과 족속 이름을 다같이 겹줄로 표시한 데다가, 한꺼번에 이어서 써 놓았으니, 장소 이름과 족속 이름을 구별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미가 5장 1절과 룻기 4장 11절에서는 베들레헴의 다른 이름으로 에브랏이 언급되었으니, 장소 이름 에브랏(히브리어 에브라타)과 족속 이름 에브랏(히브리어 에브라팀)을 혼동할 수 밖에 없다. 더욱이 『관주』 성경은 여기 나오는 에브랏에 창세기 35장 19절을 전후 참조 구절로 제시하여, 룻기 1장 2절의 에브랏을 지명으로 착각할 수도 있게 하였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지명 에브랏(에브라타)이 아니고 족속 이름 에브랏 사람들(에브라팀)이다.

 

또 “모압 지방(스데 모압)”이란 말도 우리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여기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사데”는 복수형으로서 문자대로의 뜻은 “지방들(regions)”이다. 왜 모압 “나라”가 아니고 “지방”인가? “지방”이라고 하니까 다른 나라 같지 않다. 그래서 엘리멜렉 가족이 외국으로 간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 안에서 이동한 것 같은 오해도 불러일으킨다. 히브리어 “사데”를 “나라”로 이해하자는 주장을 펼 생각은 없다. 다만, 독자들이 “모압 지방”이,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나라인 것만은 밝히고 싶다.

 

이방여인 룻이야기

국제 결혼 여성 (룻기 1:3-5)

3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으며 4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거기 거한지 십년 즈음에 5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개역』)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개역개정판』)

 

 

 

3 그러다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자, 나오미와 두 아들만 남았다. 4 두 아들은 다 모압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한 여자의 이름은 룻이고, 또 한 여자의 이름은 오르바였다. 그들은 거기서 십 년쯤 살았다. 5 그러다가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으니, 나오미는 남편에 이어 두 아들마저 잃고, 홀로 남았다. (『표준새번역』)

 

 

 

문학 기법(技法)

 

 

 

십여 년 이민 생활이 한 두 절에 담겨져 있는가 하면(룻 1:3-5), 하룻밤의 사건이 한 개 장(룻 3:1-18)에 상세히 기록되기도 하는 것이 룻기에 나타나는 문학적 기법이다. 네 식구 가운데서 한 사람, 그 집안 어른인 엘리멜렉이 죽는다(3절). 룻기에 나오는 이야기는 어떤 부분에서는 지루하리만큼 상세하게 진술되지만, 또 어떤 부분에서는 생략이 심하고 사건 진행이 급하게 묘사되기 때문에, 사건들 사이의 시간적 거리감이 없어지거나 모호해지기도 한다. 고향을 떠나는 것(2절)과 엘리멜렉의 객사(3절) 사이의 시간 차, 엘리멜렉의 죽음(3절)과 그 두 아들의 결혼(4절)과 그들의 죽음(5절) 사이의 시간차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이 없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은 모압으로 가자마자 죽었을까? 우리의 룻기 본문을 가지고는 알 수가 없다. 두 아들의 결혼은 엘리멜렉이 죽고 나서 얼마 있다가 있었던 일일까? 모압 나라에서 산 지 10년 즈음에 두 아들마저 죽었는데, 여기 “거한 지 십 년 즈음”이란 결혼하고서 10년쯤 살았다는 것인가, 아니면 결혼과는 무관하게 그들이 거기서 이민 생활한 햇수를 합산하여 말하는 것인가? 이러한 점들도 우리 이야기에는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는 여기 “십 년”을 그들의 이민 생활 기간을 통산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교차대구법(交叉對句法)

 

 

 

나오미의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은 “모압 여자” 가운데서 아내를 맞이한다(4절). 요즈음 말로 국제결혼을 한 셈이다.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다. 2절에서 아들의 이름 진술 순서가 “말론과 기룐”이라고 해서 여기 며느리들의 이름 “오르바와 룻”도 같은 서열의 순서라고 볼 수도 있다. 말론과 그의 아내 오르바, 기룐과 그의 아내 룻,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다. 실제로 이렇게 설명하는 주석들도 있다. 그러나 4장 10절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이라는 언급을 보면, 오히려, 짝은 “말론과 룻,” “기룐과 오르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들 이름은 큰아들-작은아들 순서(말론과 기룐)이고, 다음에 이어지는 며느리들은 작은며느리-큰며느리 순서(오르바와 룻)이다. 이러한 것을 교차 대구(交叉對句, chiasmus)라고 하여 평행 대구(平行對句,parallelism)와 구별한다. 이것은 룻기의 특징이기도 하다. 예를 더 들면, 1장에서는 말론-기룐 순서로 언급되다가 4장에서는 기룐-말론의 순서로 나오기도 한다 (9절).

 

 

 

룻기 1장 1-6절에도 이러한 교차대구 기법이 보인다.

 

 

 

A. 흉년 (1절)

B. 모압으로 떠남 (1-2절)

C. 엘리멜렉의 사망 (3절)

D. 두 아들의 결혼 (4절)

C'.두 아들의 사망 절)

B'.모압을 떠남 (6절)

A'. 풍년 (6절)

 

 

 

여기에서 우리는 A-B-C, 그리고 C'-B'-A' 의 교차 대구법을 본다. 흉년과 이향(移鄕)과 사망(A-B-C)은 결혼(D)을 축으로 하여, 다시 사망과 귀향(歸鄕)과 풍년(C'-B'-A')으로 전개된다. “결혼”이 룻기 1장의 처음 일곱 절 문단에서 그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번역문에서의 성차별 표현의 문제

 

 

『개역』의 번역문을 보면, 베들레헴 출신의 그 “한 사람”(1절), 곧 “그 사람”(2절) 엘리멜렉이 죽자, “그 여인”(5절) 나오미는 “두 아들과 남편 뒤에” 홀로 남는다고(5절) 진술되어 있다. 『개역』 본문을 읽는 주의 깊은 독자들은 5절의 “아들과 남편”에서도 교차 대구법이 적용된 것을 볼 수 있다. 2절에서는 “남편과 아들”의 순서로 언급되다가 여기 5절에서는 “아들과 남편”의 순서로 언급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시 생각해 볼 것은 이러한 문학 기법에 관한 것이 아니고, 우리말 번역 본문에 나타난 표현상의 성차별 문제이다. 너무 과민한 탓이 아니겠느냐고 할지 모르겠으나, 우리의 번역 본문이 엘리멜렉을 언급할 때는 “사람”이라 하고, 나오미를 언급할 때는 “여인”이라고 한 것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특히 2절 같은 경우에, “그 남편(혹은 남자)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라고 하면 될 것을 『개역』은,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라고 했다. 1절에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라고 한 것도 그렇다. “유다 베들레헴에 한 남자가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라고 할 수는 없었을까? 남편이나 남자는 “사람”으로, 아내나 여성은 “여인”으로 표현하니까, 남자는 사람이고, 여자는 사람과는 구별되는, 사람이 아닌 그 무엇이라는 암시가 모르는 사이에 독자들에게 스며들지 않겠는가?

 

“사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이쉬”는 남녀를 다 통칭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여자와 대조되어 나올 때는 단연 “남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점은 『개역』의 여러 곳에서 쉽게 발견된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2장에 보면, “레위 족속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출 2:1) 라는 말이 있다. 여기 이 번역문의 논리를 따른다면,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과 여자”가 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라고 잘 표현된 본문이, 그만 신약에 인용되면서,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마 19:5; 막 10:7; 엡 5:31)로 되어, “남편-아내”라는 도식(圖式)이 다시 “사람-아내” 구도(構圖)가 되어 버리고 만다.

 

 

귀향 길

 

 

나오미는 아직 모압 지방에 살면서 한 소문을 듣게 된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을 “권고(眷顧)”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이다(6절). “권고하다”라는 말이 일반 독자들에게 그렇게 쉬운 말은 아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권고”는 어떤 행위를 취하도록 권하여 말하는 것, 혹은 타일러 말하는 것으로서, 한자로는 권할 권(勸)에 고할 고(告)를 쓴다. 그러나 여기 우리 본문에서 말하는 “권고”는 돌보아 줌을 뜻하는 것으로서, 한자로는 돌아볼 권(眷)자에 돌아볼 고(顧)자를 쓴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권고”는 대다수가 바로 이 뒤의 것이다. 히브리어 “파카드”는 “관심을 기울이다, 방문하다, 돌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호와께서 “양식을 주셨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양식은 기근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준 구호 양곡과는 다르다. 히브리어 원문을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먹거리(레헴: 빵, 양식)를 주셨다는 것이다. 히브리어 “레헴”은 양식 일반, 곧 먹거리를 가리키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의 본문에서는 농사가 잘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아마 “풍년”을 주셨다고 생각하면 1장 1절의 “흉년”과 잘 어울릴 것이다.

 

유다 베들레헴을 포함한 “그 땅”(룻 1:1)에 기근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오미는 그의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그가 살던 모압 지방을 떠나 고향으로 갈 채비를 한다(룻 1:6). 여기 “일어나다”라는 동사는, 여기에서는, 누었다가, 혹은 앉았다가 일어난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행위의 시작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경우 “일어나다”는 “출발하다, 움직이다”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히브리어 원문의 단어를 가능한 한 글자대로 번역해 보고자 했던 『개역』은, 이러한 경우에도 거의 다 “일어나다”라고 직역하였다. 우리의 본문에서 “일어나다”는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모압을 떠났다는 행위를 소개하는 말이다. 본래 엘리멜렉 가족은 모압에 잠시 동안 몸 붙여 살려고 갔었다. 『개역』은 이것을 “우거(寓居)하다”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 “라구르”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이제 그 나그네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간다.

 

 

이방여인 룻이야기

길 위의 세 여인 (룻기 1:6-10)

6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7있던 곳을 떠나고 두 자부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다가 8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혀 울며 10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개역』)

 

 

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7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0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개역재정판』)

 

 

6 모압 지방에서 사는 동안에, 나오미는 주께서 백성을 돌보셔서, 고향에 풍년이 들게 하셨다는 말을 듣고,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 지방을 떠날 채비를 차렸다. 7 나오미가 살던 곳을 떠날 때에, 두 며느리도 함께 떠났다. 그들은 유다 땅으로 돌아가려고 길을 나섰다. 8 길을 가다가,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제각기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너희가, 죽은 너희의 남편들과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여 주었으니, 주께서도 너희에게 그렇게 해주시기를 빈다. 9 너희가 각각 새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주께서 돌보아 주시기를 바란다." 나오미가 작별하려고 그들에게 입을 맞추니, 며느리들이 큰소리로 울면서 10 말하였다. "아닙니다. 우리도 어머님과 함께 어머님의 겨레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 (『표준새번역』)

 

 

 

길을 떠나는 세 여인

 

 

 

떠난다. 10여 년 동안 몸 붙여 살던 이국 땅 모압을 떠난다. 나오미로서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지만, 모압 여인인 두 며느리들에게는 낯선 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시어머니 나오미로서는 모압 여인들인 며느리들을 유다 땅으로 데리고 갈 생각은 없었다. 길을 가다가 시어머니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말한다(8a절). 나오미는 그들을 향하여 제각기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다(8b절). 그러면서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복을 빌어 준다. 그들이 남편들이 살아 있을 동안 남편들에게 잘해 주었고 또 시어머니에게도 잘 대해 주었듯이, 여호와께서도 그러한 며느리들을 선대(善待)해 주시기를 빈다(8c절). 여호와께서 그 며느리들을 보살피시어 제각기 새 남편을 만나 새 가정 이루고 안정되고 평안하게 살게 해 주시기를 빈다(9a절). 이렇게 빈 다음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작별의 키스를 한다. 그러자 며느리들은 큰 소리 내어 운다(9c절).

 

남편을 여읜 며느리를 “어머니의 집”으로 보낸다고 한 진술은 예사스러운 것이 아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과부가 되었을 때 유다는 며느리더러 “아버지의 집”에 가 있으라고 말한다. 그래서 다말은 그의 말대로 “아비 집”에 가 있다 (창 38:11). 과부가 된 경우에도 그러하지만, 이혼을 당한 경우에도 혼자된 여인은 “아비 집”(親庭)에 가서 산다(레 22:13).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룻기에만 이러한 경우에 “어미의 집”으로 되어 있다. 그것을 이상하게 느낀 것은 우리만이 아닌 것 같다. 그리스어 『칠십인역』들 가운데 하나는 “아버지의 집”으로 번역했고, 고대 『시리아어역』은 “부모의 집”이라고 번역하였다. 우리 같으면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했을 것이다. 어쨌든 젊은 과부가 “어미의 집”으로 되돌아가도록 요청 받고 있다.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말한 것 가운데 “너희가 죽은 자와 나(즉 “산 자”)를 선대한 것 같이”라는 말이 나온다(8절). 여기에서 “죽은 자를 선대했다”는 것은 며느리들이 남편들 사후에 이미 죽어 버린 자들을 위하여 어떤 선한 일을 했다는 말이 아니다. 말론과 기룐이 살아 있던 동안에 그들의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잘해 주었다는 말이다. 룻기 2장 20절에서는 이 표현이 교차 대구법으로 반복되는 것을 본다. 1장 8절에서는 “죽은 자와 산 자”의 순서로, 2장 20절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순서로, 그 순서가 교차되어 나오는 것을 문학기법상 교차 대구법이라고 한다. “그(보아스)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라는 진술에서는 “산 자”가 먼저 언급되고 “죽은 자”가 그 다음에 언급된다.

 

“선대(善待)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헤쎄드”는 언어마다 거기에 딱 들어맞는 대응어가 없어서 번역자들이 이 말을 번역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룻기에서는 이 단어가 1장 8절, 2장 11절, 3장 10절 등에서 나온다. 결혼 및 가족 관계의 성실성(룻 1:8; 2:11), 대인 관계의 특별한 호의(룻 3:10),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호의(룻 1:8) 등이 다 “헤쎄드”란 말로 표현된다. “변함없는 사랑,” “인애(仁愛)”, “자비(慈悲)”, “은혜” 등이 자주 거론되는 우리말 대응 단어들이다.

 

“남편의 집”이란 새로 만난 남편과 이루는 새 가정이다. “평안”(平安)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므눅하”는 “고요함”, “평온함”, “안전함””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안정된 생활을 가리키는 것이다.

 

 

 

며느리와 시어머니

 

 

 

시어머니는 두 며느리들에게 제각기 헤어지자고 한다.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유다 땅으로 가고, 두 며느리들도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러자 며느리들은 목놓아 울면서 헤어지지 않겠다고 말한다. 시어머니와 함께 시어머니의 백성에게로 가겠다고 한다(10절).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며느리들이 역시 과부인 그들의 시어머니에게 보여주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은 읽는 이들을 무척이나 흐뭇하게 해 준다. 며느리들로서는 심각한 각오가 아닐 수 없다.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 한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가자마자 남편이 죽고, 거기서 두 아들을 미국 여자들과 결혼시켜 미국인 며느리들을 보았다고 하자. 그런데 그만 그 두 아들마저 죽고 두 며느리들만 남았는데, 시어머니가 한국으로 돌아가려 하자 미국인 며느리들이 한국인 시어머니를 따라 나서는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자는 것이다. 미국 여인 대신 일본 여인이나 월남 여인이라도 좋다. 그 여인들이 낯선 곳에 가서 산다고 할 때, 그들이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것이다. 국제 결혼을 하여 미국의 군대 주둔 지역에서 살고 있는 우리 나라 여성들에게 격려를 보낼 필요가 있다. 그들이 겪는 온갖 시련과 외로움과 슬픔의 이야기는 그들의 기쁨 못지 않게 강렬한 것이다. 그들의 삶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입은 아물 길 없는 상처를 그대로 노출시킨 것이다. 큰며느리 룻과 작은며느리 오르바의 결심이 아름답게 보이는 까닭도 바로 여기 있다. 남편의 나라에 가서 살고 있는,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나라 여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이 언제까지나 함께 하시기를 빈다.

 

 

이방여인 룻이야기

시형제 결혼 (룻기 1:11-14)

11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들의 남편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12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밤에 남편을 두어서 아들들을 생산한다 하자 13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 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14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개역』)

 

 

 

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 내 딸들아 되돌아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개역개정판』)

 

 

 

11 그러나 나오미는 말렸다. "돌아가 다오, 내 딸들아.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려고 하느냐? 아직, 내 뱃속에 아들들이 들어 있어서, 그것들이 너희 남편이라도 될 수 있다는 말이냐? 12 돌아가 다오, 내 딸들아. 제발 돌아가거라. 재혼을 하기에는, 내가 너무 늙었다. 설령, 나에게 어떤 희망이 있다거나, 오늘 밤 내가 남편을 맞아들여 아들들을 낳게 된다거나 하더라도, 13 너희가, 그것들이 클 때까지 기다릴 셈이냐? 그 때까지 재혼도 하지 않고, 홀로들 지내겠다는 말이냐? 아서라, 내 딸들아. 너희들 처지를 생각하니, 내 마음이 너무나 괴롭구나. 주께서 손으로 나를 치신 것이 분명하다." 14 그들은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울었다. 마침내,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맞추면서 작별 인사를 드리고 떠났다. 그러나 룻은 오히려 시어머니 곁에 더 달라붙었다." (『표준새번역』)

 

 

 

남편과 사별한 며느리들

 

 

 

함께 가겠다는 며느리들을 한사코 만류하는 시어머니에게서 우리는 외국인 며느리들이 남편의 나라에 가서 겪을 온갖 고난을 예측하는 지혜를 읽을 수 있다. “내 딸들아 돌아가라”고 말한다. 함께 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11a절). “나의 태중에 너희의 남편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11b절)는 것이다. 아마도 이 말은 다음 항목에서 설명될 시형제(媤兄弟) 결혼법 해설에서 더 언급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다만 이 말이 나오미에게는 이미 임신 능력이 없다는 것, 그래서 며느리들을 위해 장래의 남편 감을 낳을 수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만을 밝히고자 한다. 나오미는 룻과 오르바에게 자기는 이미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한다”(12a절)고 말한다. 여기 “남편을 둔다”는 히브리어는 직역하면 “한 남자에게 속한다”는 것으로서 결혼을 뜻한다 (레 2:12; 민 30:7; 신 24:2; 렘 3:1).

 

그러나 늙어서 아이를 낳지는 못해도 그것이 결혼 못할 이유는 아니다. 주석가들에 따라서는 룻기의 이 말을 성 관계를 갖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호 3:3; 레 21:3). 우리말 『개역』 성경은 이 말을 12-13절의 세 경우 모두 “남편을 두다”라고 번역하였다. 여기에서는 나오미가 임신을 가능케 하는 달거리가 사라져 버린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밤에 남편을 두어서”는 “오늘밤에 남자와 성 관계를 맺어서”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들을 낳은들(12b절), 지금 며느리들이 그것들 자라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시어머니로서 며느리들이 그렇게 기다리게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13a절).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 두기를 멈추겠느냐”(13b절)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남편을 둔다는 것은 단순히 결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부부 생활”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13c절)라는 말은,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의 처지가 너희 처지보다 더 비참하다”라고 번역될 수도 있다.

 

위의 나오미의 말(11-13절)에서 우리는 그가 강조한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을 짚어 볼 수 있다. 낯선 백성에게로 며느리들을 데려갈 수 없으니 제 나라, 제 백성에게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시형제(媤兄弟)와 결혼하는 것마저도 그 가능성이 없으니 돌아가라는 것이다. 나오미 자신의 절망적인 처지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며느리들마저도 딱한 처지가 되어 시어머니의 마음이 더욱 아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8절에 언급했듯이, 친정으로 돌아가 있다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시는 새 남편을 만나 행복하게 잘 살라는 것이다.

 

이상 8절과 11-13절에서 우리는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의 며느리들을 생각하는 깊은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시형제(媤兄弟) 결혼 제도

 

 

 

지금 여기에서 옛 이스라엘이나 고대 중동 지역의 여러 민족들 사이에 있었던 결혼 제도나 과부들의 처신 등에 관해서 상세히 언급할 계제가 아니지만, 여기 시어머니와 며느리들의 대화에 담긴 그들 사이의 사려 깊고 서로 아끼는 감정의 밀도는 누구나 충분히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행해지던 시형제 결혼 풍습에 관하여 언급할 필요가 있다. 룻기의 사회적 배경을 이루고 있는 시형제 결혼 제도와 풍습은 우리의 결혼 제도와는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다. 신명기 법전에 보면 옛 이스라엘에는 다음과 같은 법이 있었다. 『개역』 성경에서 인용한다.

5 "형제들이 함께 살다가, 그 가운데 하나가 아들이 없이 죽었을 때에, 그 죽은 사람의 아내는 딴 집안의 남자와 결혼하지 못한다. 남편의 형제 한 사람이 그 여자에게 가서,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 그의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다해야 한다. 6 그래서 그 여자가 낳은 첫 아들은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어받게 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 이름이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표준새번역』 신 25:5-6)

 

 

  이것이 바로 시형제 결혼제도이다.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돌아가서 재혼하라고 강하게 권하면서 말할 때, 자기에게는 임신 능력이 없다는 것, 그래서 며느리들의 남편감이 될 자식들을 낳아 줄 수가 없다는 것, 설령 자기에게 임신 능력이 있어서 지금 당장 남자와 동침하여 아기를 가진다 한들 그것들이 자라기를 기다리느라고 재혼도 하지 않고 수절할 수야 없지 않겠느냐는 것 등이 바로 이와 같은 시형제 결혼제도를 전제로 하고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드디어 작은며느리 오르바는 시어머니와 작별 인사(입맞춤)를 하고 떠난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를 “붙좇아” 간다. “붙좇다”는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은 아닐지 모르나 “공경하거나 마음으로 가까이 섬기며 따르는 것”을 뜻하는 우리 토박이 말이다. 히브리어 “다바크”도 참 좋은 뜻을 지닌 말이다. 부부 사이에 겪는 “가까움의 감정”으로서, 사랑을 뜻하는 “아하브”와 함께 평행을 이루어 쓰이기도 한다. 잠언 18장 24절에서는 형제애보다 더 가깝고 결속력이 큰 우정을 나타내는 데 “다바크”라는 단어를 썼다. 단순히 “가깝게 따르라”라는 뜻으로는 2장에서 세 번 사용되어 있다(룻 2:8, 21, 23).

 

 

이방여인 룻이야기

룻과 나오미 (룻기 1:15-19a)

15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16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의 되시리니 17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18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19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개역』)

 

 

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8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19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개역대정판』)

 

 

15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18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19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표준새번역』)

 

 

 

남편과 두 아들을 여읜 나오미

 

 

지금 우리는 구약성서의 룻기를 함께 읽고 있다. 그 동안 우리는 1장의 앞 부분을 읽어 왔다. 오늘로서 1장 읽기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이번에 읽을 1장의 뒷부분(룻 1:15-22)의 본문을 펴 보기에 앞서, 1장 전체의 내용을, 언제(時間), 어떤 일이(事件), 어디에서(場所) 일어났으며, 여기에 관련되어 등장하는 사람들(人物)이 누구였는가 하는 진술의 틀을 가지고 정리해 보기로 한다.

 

“이스라엘에 아직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살던 때(삿 17:6; 21:25)가 바로 사사(士師)들이 활동하던 때이다. “해방된 이스라엘”이 자유를 한껏 누리던 때, “엘리멜렉”이란 이름에 나타나있듯이 왕 제도가 부정되고, 친정을 “어머니의 집”이라고 한 것에서 보듯 남녀 차별이 부정되던 때, 종교적으로 관용이 허용되던 때였다. 특히 나오미가 룻을 돌려보내고자 하면서 그에게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15절)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그들이 섬기던 본래의 종교로 돌아가라고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방 여인을 며느리로 맞았던 것은 귀환 이후 시대에 이방여인과 결혼한 유대인들을 강제로 이혼시킨 것(라 9-10장)에서 우리는 시대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사사 시대의 한 기 기간에 한때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몹시 심하여[自然災難],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한 가족이 모압 나라로 가서 몸붙여 살아 보려고 그리로 떠난다. 남편 엘리멜렉과 아내 나오미, 큰아들 말론, 작은아들 기룐, 이렇게 네 식구이다.

 

모압 나라로 가서 산 지 얼마 안되어 남편 엘리멜렉이 죽는다. 과부가 된 나오미는 두 아들을 모압 여자들과 결혼시킨다. 큰며느리는 룻이고, 작은며느리는 오르바이다. 그런데 십여 년만에 두 아들마저 죽고 만다. 나오미는 이렇게 남편과 자식들을 다 잃게 된다[人命災難]. 과부 세 사람만 남는다. 그 무렵 나오미는 그의 고향 땅에 먹거리가 넉넉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모압을 떠날 차비를 한다. 나오미로서는 두 젊은 며느리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가 문제이다. 시형제(媤兄弟) 결혼을 시킬 아들들도 없는 터여서, 젊은 며느리들을 각자의 친정으로 돌려보내려고 한다. 거기에 가서 새 남편을 만나 새 가정을 꾸미고 잘 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작은며느리 오르바는 끝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설득되어 아쉬운 작별을 한다. 그래서 나오미는 큰며느리에게도 손아래 “동서”(同壻)가 갔듯이 친정으로 가라고 타일러 본다.

 

여기에서 “동서”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예베멧”이다. 우리말에서 “동서”라고 하면, “자매의 남편끼리 또는 형제의 아내끼리 서로 일컫는 말”을 가리킨다. 그러나 “예베멧”은 “남편이 죽고 과부가 된 아내와 결혼해 줄 남편의 형제”를 일컫는 “야밤”의 여성형이다. 그러니까 “예베멧”이란 “남편이 죽으면 대신 남편이 되어 줌으로써 친족 의무를 수행할 남편의 형제”(야밤)의 “아내”를 일컫는 말이다. 다시 말해 “동서”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예베멧”은 시형제 결혼 제도의 배경에서 나온 말로서, 남자 형제들과 결혼한 여자들끼리의 관계만을 일컫는 말이다. 이 용어는 룻기의 사회적 배경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말이다. 자매의 남편끼리는 “예베멧”이라고 하지 않는다.

 

 

 

룻과 함께 귀향하는 나오미

 

 

시어머니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큰며느리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운명을 함께 나누겠다고 정한 뜻을 조금도 굽히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룻은 시어머니를 설득하고 있다(룻 1:16-17).

 

 

 

A.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强勸) 하지 마옵소서

 

B. 어머니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 유숙(留宿)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C.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의 되시리니

B'.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 나도 죽어

거기 장사(葬事)될 것이라

 

A'.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나오미는 비록 룻을 설득시켜 친정으로 돌려보내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나오미는 며느리 룻에게서 이처럼 놀라운 사랑의 고백을 듣게 된다. 룻의 고백은, 우리가 자주 언급했듯이, 문학 기법으로는 교차 대구법을 따라 짜여져 있다.

 

 

 

A. 이별할 수 없다

B. 살아서도 함께

C. 신앙고백

B'. 죽어서도 함께

A'. 이별할 수 없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는 고백을 축으로 하여 A-B와 B'-A'가 교차 대구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본다.

 

룻이 한 말 가운데 “유숙”(留宿)이란 말이 있다. 이것은 히브리어 “룬”(혹은 “린”)의 번역으로서 그 뜻이 서로 잘 맞는 말이다. 여기 사용된 히브리어나 우리말이 둘 다 손님이나 나그네로 남의 집에서 머물러 묵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룻의 고백에서 사용된 “유숙하다”라는 말은 단순히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길에 유숙하는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나오미가 비록 정착하지 못하고 안정된 삶을 누리지 못한 채 나머지 여생을 남에게 몸 붙여 사는 나그네 신세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고달픈 삶마저 함께 나누겠다는 것이다. 생사마저 같이 하겠다는 말에서 룻의 성실은 절정에 이른다. 다윗의 부하 잇대에게서도 유사한 진술이 있다 (삼하 15:21).

 

젊고 귀엽고 어진 며느리인 룻의 모습이 그의 고백 속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렇게 착한 며느리를 가진 시어머니 나오미는, 비록 남편을 잃고 두 아들마저 다 잃고 홀로 남았다 하더라도, 이 어진 며느리가 그의 곁에 있는 한 남은 생이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 자기 며느리에게서 이토록 갸륵한 위로와 격려와 희열에 가득 찬, 살맛 나게 하는 말을 듣는 행운을 잡은 시어머니는 그렇게 흔하지 않을 것이다.

 

 

이방여인 룻이야기

풍족하게 나갔다가 비어 돌아오다 (룻기 1:19b-22)

베들레헴에 이를 떼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나오미가 그들에게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내가 풍족(豊足)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22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개역』)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豊足)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개역개정판』)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豊足)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표준새번역』)

 

 

 

나오미와 마라

 

 

결국 두 여인 나오미와 룻은 베들레헴으로 돌아간다. 10여 년 넘게 다른 나라에 가서 살다가 외국 며느리까지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이르렀을 때 온 성읍이 그들 때문에 “떠들었다”고 한다(19절). “떠들다”라는 우리말이나 히브리어 대응 단어인 “훔”이나 영어 번역인 roar(으르렁거리다), murmur(중얼거리다) 등은 모두 어떤 의성어와 같은 요소를 지니고 있어서 퍽 재미있는 단어들이다.

 

베들레헴 아낙네들은 나오미를 보고 “이가 나오미냐?” 하고 놀란다. 히브리어 원문이나 우리말 번역문이 모두 의문형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은 수사학적 질문에 불과한 것이다. 오히려 이 말은 질문이라기보다는 놀라운 감탄과 감정을 강하게 노출하는 표현이다. “아니, 이게 누구야? 나오미 아니야?” 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베들레헴 마을 아낙네들은 10여 년 전에 헤어졌던 나오미를 알아보고 그의 이름까지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나오미는 “행복한 여자”, “기쁜 여자”라는 뜻을 지닌 “나오미”라는 이름이 자기에게는 이제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자기를 “마라”(“괴로운 여자”)라는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부탁한다.

 

“나오미”는 가끔 “노오미”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직 우리 나라에서 번역된 여러 성서에 룻의 시어머니를 “노오미”로 읽고 있는 것은 없지만, 다른 나라 말로 번역된 룻기 가운데는 “나오미”를 “노오미”로 표기한 것이 더러 있다. 히브리어 본래의 발음은 “노오미”이고 그리스어 『칠십인역』에도 그렇게 되어 있지만, 기독교에서는 전통적으로 “나오미”라고 불러왔기 때문에, 오히려 “나오미”로 표기하는 번역들이 더 많은 실정이다. 여기에서 길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히브리어 모음 기호 가운데 문제가 되는 하나는, 장모음 “아” 와 단모음 “오”의 부호가 같아서 혼돈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같은 부호라 하더라도 “복합공점 오” 앞에 나오는 “아/오” 부호는 “오”로 읽는다는 원칙이 있다.

 

 

 

특별한 계기에 사람이 그 이름을 바꾸는 예가 가끔 있다. “아브람(큰 아버지)”의 이름이 “아브라함(많은 무리의 아버지)”으로 바뀐 것이라거나, “사래”가 “사라(여왕)”로 바뀐 것, “야곱(아무개의 발꿈치를 잡다)”가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김)”로 바뀐 것, “벤오니(괴로움의 아들)”가 “베냐민(오른팔의 아들)”으로 바뀐 것 등이 다 그런 것들이다.

 

 

 

가득 참과 텅 빔

 

 

 

룻기에서 나오미에 관한 기록 가운데 그가 겪은 고난에 대한 진술은, 13절 하반절에서 먼저 언급되었다가 20-21절에서 집중적으로 거듭 강조되고 있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13b절),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다”(20b절),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도다”(21b절),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도다”(21c절) 등은 모두 나오미가 외국에서 겪은 힘들고 어려웠던 생활을 반영한다.

 

그러나 “나오미”와 “마라”는 옛 이름과 새 이름의 관계가 아니다. 여기에서는 모종의 곁말, 즉 말놀이(語戱)가 있다. 자기는 “기쁨”을 뜻하는 “나오미”라는 이름을 가질 형편이 못되니, 쓰라린 자신의 처지에 걸맞게 “괴로움”을 뜻하는 “마라”라는 이름으로 자기를 불러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그런 이름으로 부르지는 않는다.

 

나오미가 베들레헴 아낙네들에게 한 말 가운데 자기가 고향을 떠날 때는 “풍족(믈레아)”했었는데, 여호와께서 자기로 “텅비어(레이캄)” 돌아오게 하셨다는 말이 있다(21절). 고향을 떠날 때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있었으니 풍족했었지만, 그들을 다 잃고 왔으니 여호와께서 자기를 빈털터리로 만드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룻기에는 이러한 상반되는 것들의 대조가 자주 보인다. 먹을거리 없음(1절)과 먹을거리 있음(6절), 완전 가족(2절)과 결손 가족(3절 이하), 나오미(기쁨)와 마라(괴로움)(20절), 풍족과 텅빔(21절), 이향(1절)과 귀향(19-22절) 등이다.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온 것은 보리를 거둘 무렵이었다고 한다. 팔레스타인에서 보리 수확은 4-5월에 한다. 밀 수확은 그보다 몇 주 늦은 5-6월에 한다. 보리는 봄에 거두어들이는 것이므로, 보리 수확의 경우에 “추수”(秋收:가을걷이)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