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신학/조직&실천신학

삼위일체와 예배

משׁה 2009. 8. 11. 16:10

삼위일체와 예배

 

 

정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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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존재하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이다.”[1]

 

어느 누구도 섬이 아니다.”[2]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가를 규정하시는 분이다. 진술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함 없이 우리 자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유는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서 우리 존재의 의미를 발견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증거하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삼위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와 같은 관계 가운데 계신 성경이 증거 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성경이 증거 하는 하나님은 하나의 신적 본질을 공유하시며, 신적 본질 안에 공존하시며, 교제 가운데 계신 위격(인격)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부연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은 신적 본질 안에 상호 내주하심 가운데(perichoresis)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주고 받으시는 관계 속에 존재하시는 분이시다.[3] 하나님의 존재의 아주 깊은 신비 속에는 친밀한 관계, 교제 그리고 사랑의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증거 하는 하나님이 이와 같은 하나님 이시라면,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에게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의미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통해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 성자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로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배를 통해 우리는 신성을 공유 하심으로 하나님이신 위격(인격: person) 사랑의 교제 가운데로 사로잡힌바 된다는 것이며, 교제 속에서 우리는 성령을 통해 성부를 향한 (중보자로서의) 성자의 예배와 성령 안에서의 (동등한 하나님으로서의) 성자의 성부와 함께하는 교제를 나누어 맛보는 것이다. 그리고 예배를 통한 위격과 우리가 경험한 사랑은 우리를 교회 공동체에 속한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로 우리를 인도하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한발 나아가 교회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안고 나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로서의 위격의 교제는 기독교 예배(기도, 경배, 그리고 성찬) 규정하며, 우리가 삼위 하나님을 의지하여 드리는 삼위일체적 예배는 기독교 공동체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규정한다.

 

     그러나, 예배를 통해 우리들의 입술로 지속적으로 고백 됨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오늘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과 교리는 기독교 예배 공동체에서 일종의 죽은 문자 인식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현실이다.[4] 같은 예배의 삼위일체적 성격의 쇠퇴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예배를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가 습관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누구(who)’ 라는 질문 보다는 어떻게(how)’ 라는 질문에 우선성을 두고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5] 삼위일체 하나님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 속에서 예배를 통해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에 깊이 참여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 쪽에서 삼위 하나님께 예배를 어떻게(how) 드려야 하는가를 생각하기 보다는 먼저 우리의 예배를 있게 하신 삼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who) 질문 해야 한다. 같은 질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을 규정하시도록 해야 하며,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 자신의 방법으로 하나님 스스로를 예배하시는지를 배워야만 한다.[6] 같은 배움이 중요한 하나의 이유는 기독교인들의 삶의 중심으로서의 예배는 우리의 삶과 공동체를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위치 지움으로써, 우리가 창조주가 아니라 창조된 피조물임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7] 따라서 우리의 예배를 생각함에 있어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과 공동체를 존재하도록 하신 분이 누구인가를 먼저 질문 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글의 목적은 먼저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진술을 설명한 , 예배와 예배의 밖으로의 확장으로서의 기독교인의 삶을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예배를 있게 하시고, 예배 가운데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시며,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도록 돕는데 있다.

 

2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진술과 기독교인의 이해

 

2.1. 하나님을 어떻게 있는가?

 

     하나님을 어떻게 있는가? 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제기되어야 질문이 있다. 그것은 우리는 지금 어떤 하나님 혹은 어떤 신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8:5절에 언급한 것처럼 세상에는 사람들의 신앙과 예배의 대상이 되는 많은 신들과 많은 주들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성경의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여 보이신 성경에 근거한 다음과 같은 언급은 타당성이 있다고 여겨진다.[8]

 

(1) 성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다. (God the Father reveals Himself.)

(2) 그는 자신을 자신의 아들을 통해 계시하신다. (He reveals Himself through His Son.)

(3) 같은 계시는 하나님의 영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다. (This revelation is made known to us through His Spirit.)

 

우리는 (1) (2) 1:1-2 통해 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모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그러나 (1) (2) 아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상기했듯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보이셨다는 진리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나 우리에게 거치는 이나 어리석은 으로 비춰질 있기 때문이다(고전1:22-23).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라는, ‘거치며 어리석은 어떻게 우리에게 설명되고 이해되어지며 믿음으로 변하게 되는 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의 사역으로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고전2:1-13).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바른 본성을 잃은 인간은 하나님께 올바르게 반응하지 못하며, 반응 없는 존재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과의 바른 인격적 관계로 들어가도록 하실 있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불가능하나, 하나님의 영은 인간을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도하신다.[9] 여기서 우리는 (3) 진술 또한 하나님의 사역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어떻게 있는가? 라는 질문은 하나님 답이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자신을 자신의 아들과 자신의 영을 통해 우리에게 보이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10]

 

2.2.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자신의 아들과 자신의 영을 통해 계시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진술이 하나님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가르침은 하나님의 삼위적 본질이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성경의 증거에 따라 하나님의 삼위적(three persons) 혹은 삼중적(threefold) 본체(substance) 서술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 하고 있는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시다:

 

(1) 자신의 아들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성부 하나님. (1:1) (God the Father who reveals Himself through His Son.)

(2) 성부 하나님께서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심을 기뻐하신 성자 하나님. (1:19-20) (God the Son through whom the Father was pleased to reveal Himself (고전1:19-20).

God the Holy Spirit.)

(3)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아버지의 자녀로 삼으시는 성령 하나님. (8: 9-11) (God the Holy Spirit by whom we become the children of God the Father in God the Son.)

 

따라서 성경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야 문제가 있다. 그것은 양태론자들(Modalism) 아리우스주의자들이(Arianism) 미혹되어 시도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삼중성은 오직 계시 안에서의 삼중성, 다시 표현하면 하나님의 세상에서의 제한된 구원의 경륜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삼중성이며, 따라서 삼중성은 하나님의 (계시되지않은) 본질의 영원한 실체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같은 생각은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함에 있어서 우리를 일종의 이분법적 오류에 빠지도록 한다. 이분법적 오류란 하나님을 계시되기 전의 하나님(God in se, God in Himself)’ 계시된 하나님(God pro nobis, God for Us)’ 으로 분리하고, 마치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같은 이분법적 사고 속에서는 구원의 경륜()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하나님의 본체를 우리에게 전달하는데 부족함이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같은 이해에 근거해서 초대 교회를 소란케 아리우스(Arius)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보다는 열등한 존재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아리우스의 신학 체계에서 빠진 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자신이었다.[11] 그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에 있어서 어떤 차이점이나 구별이 없으신 동일본질(homoousios)’ 되심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

 

     구원의 역사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삼위일체 하나님(God for us, the economic Trinity: 경륜()하시는 하나님)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던 하나님께서(God in Himself, the immanent Trinity: 내재하시는 하나님) 자기 스스로를 계시하신 것이지 자신을 피상적으로 혹은 결여된 모습으로 계시하신 것이 아니다. 만일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과 내재하시는 하나님 사이에 존재에 있어서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은 참된 구원의 하나님이 되실 수가 없게 된다. 따라서 카톨릭 신학자인 라너(Karl Rahner) 경륜()하시는 삼위 하나님(the economic Trinity) 내재하시는 삼위 하나님(the immanent Trinity)이며, 내재하시는 삼위 하나님이 경륜()하시는 삼위 하나님이다[12] 주장은 삼위일체론의 핵심을 지적한 것으로 동의 되어질 있는 언명이라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라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자신의 아들 성자 안에서 자신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 스스로를 주신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라는 질문에 대한 성경에 근거한 답이다.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한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같은 이해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본체를 규정하는데 필연적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족장들에게 그리고 출애굽 사건을 통해 스스로를 계시하신 자와 자신을 동일시 하신다. (3:6; 20:2) 또한 신약에서,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이 성탄과 부활과 그리고 성령강림의 하나님이심을 기록함으로써 하나님의 본체를 설명한다. 부연하면, 세상에 오셨고, 세상 안에서 그리고 세상을 위해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인간 예수는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예수는 우리를 능히 구원할 있고 구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성령을 통한 아버지와의 자신의 교제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실 있는 하나님이시다. 오직 예수 안에서우리는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갈 있으며, 우리의 예배와 삶을 살아 있는 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릴 있는 것이다.

 

     만일 성육신 하신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서로 상호간의 긴밀한 앎과 존재와 사랑의 교통이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을 위해 십자가를 없었고, 자신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으로서 말한 것과 행한 것에 대한 어떤 확신 있는 보증도 없었을 것이다.[13]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처럼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아니셨고, 성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와 성부 하나님 사이에 존재에 있어서 차등이 있다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신이신 것과 같이 완전한 신이 아니시다. 같은 가정은 단지 신학적인 면에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신학이 펼쳐지는 목회 현장에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과 전혀 관계가 없는 분이 되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실 없으며,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킬 수가 없다.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며, 예배와 공동체의 삶을 통해 성령 안에서 성부와 교제하며 교통 있게 하는 중보자(Mediator) 수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진정 하나님께서 우리가 믿는 바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현현하셨는가?’ 물을 , 혹은 하나님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이신가?’ 물을 , 우리가 그렇다고 확신 있게 답할 있는 이유는 (성령) 하나님 자신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동시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구원 받을 있으며 성부 하나님의 자녀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이며, 은혜 안에서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님을 경배하며 함께 살아갈 있는 것이다.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관계와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자.

 

3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배

 

3.1.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기독교강요 부분에서 칼빈은 인간이 지닌 지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지식은, …,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들 자신에 관한 지식[14] 으로 되어있다. 지식에 대해 계속 설명하기를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하나의 끈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15] 여기서 칼빈의 진술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이신가에 대한 이해 없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서 우리 자신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러면 이런 진술이 기독교 공동체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토런스(J. B. Torrance)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는 성령 하나님을 통한 이중적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이것은 관계 1, R1 이다), 동시에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인데(이것은 관계 2, R2 이다), 관계 안에서 우리는 성령 안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의 교제에 의해 삼위 하나님의 긴밀한 사귐에 참여하게 있다. 관계는 함께 서로를 사랑함과 내어줌이란 함께 내재함’(초대 교회 사용된 단어로 표현하면, perichoresis) 으로써의 상호 내주적 일치(perichoretic unity)’ 관계 이다.”[16]

 

     하나님과 인간과 예배의 관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의 속에서 규정되어야만 한다. 관계를 토런스의 말을 빌어 다시 표현하면 그것은 성육신적 삼위일체 모델(the incarnational Trinitarian model)’로서의 예배이며, 예배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질 있고 또한 표현될 것이다. 계속해서 토런스는 예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삼위일체로 이해된 예배란 성육하신 아들의 아버지와의 교제 안으로 성령에 이끌려 참여하게 되는 선물과 같다. 진실로, 삼위일체 교리는 예배와 기도에 대한 같은 이해를 위한 규범(grammar)이다.”[17]

 

     만일 토런스가 옳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신학적인 진리이며 동시에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doxological) 진리이다.[18] 다시 말하면, 삼위일체는 단지 우리의 머리로 이해되어질 것을 요구하는 신학적 진리일 뿐만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예배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사귐 안으로 우리를 이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를 경험하도록 하는 진리이다. 그리고 아들의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의 사귐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깨닫게 되며, 또한 믿음의 공동체 속에서 그리고 사회 안에서의 우리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깨닫게 된다.

 

     하지만 예배와 인간에 대한 같은 이해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의 모습을 단순히 인간과 사회 혹은 교회 조직을 위한 일종의 패러다임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19] 단순히 인간 사회의 구조를 외적으로 바꾸려고 추구하는 대신, 다시 말하면 우리가 우리의 질서와 사회와 교회 속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모방할 있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교리적 모방(doctrinal imitation)’ 추구하는 대신, 우리는 사람들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적 사귐을 함께 나누도록 초청해야만 하며, 그럼으로써 사람들의 속에도 하나님과의 사귐의 모습이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기억해야 것은 이것이 우리가 상호 내주적 일치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의 존재처럼 있음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그보다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우리의 예배와 공동체적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 안에 참여함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다른 사람들과 나눌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 하나님의 모습은 인간 혹은 인간 사회가 모방할 있는 일종의 좋은 패러다임이 아니라, 우리로 위격(인격) 사귐(three persons in communion) 안에 참여하도록 함으로써 예배 공동체 안에서 있게 하며, 나눌 있게 하는 유일하고 실제적인 사귐의 공동체이다.

 

     좀더 실제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적 혹은 모습에 참여하는 방법은 본질적으로 학문을 추구함으로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예배와 기도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에 속한 형제 자매들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 되는 것이다.[20] 왜냐하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삼위이시며 동시에 일체로 존재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귐 안으로 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귐 가운데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예배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의 사람들과의 일상의 삶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의 사귐의 모습이 교회 안에서 예배를 통해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의 참여로 인한 사회에서의 삶을 통해 실천되어지는 것이다.

 

3.2. 토런스에 의해 제안된 삼위 하나님의 모델이 어떻게 예배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이해에 영향을 미치는가?

 

     토런스의 제안이 주는 첫번째 의미는 무엇보다도 그가 제안한 모델이 바르트가 주장한 계시적 접근의 단점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가 자신의 교회 교의학에서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적인 방법(fashion)으로 자신을 계시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주장한 것은 옳다. 그러나 바르트의 접근은 지나치게 방향성(uni-directional)’이라 있다. 그의 접근 방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혹은 계시하신다는 ) 것이 전부하고 있다. 하지만 만일 라너의 주장을 따라 내재하시는 하나님과 경륜()하시는 하나님이 동일한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의 삼위일체로서의 존재는 성부 하나님이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성령을 통한 성자의 성부를 향한 응답도 포함하는 것이며, 응답 안에서 우리도 예배와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귐에 참여하며 나누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가 자기 자신을 자신을 통해 계시하신다. 그가 자신을 계시하신다.’ (God reveals Himself. He reveals Himself through Himself. He reveals Himself.) 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반응하신다. 그가 자기 자신에게 자신을 통해 반응하신다. 그가 자신에게 반응하신다.’ (God responds to Himself. He responds Himself through Himself. He responds to Himself.) 라고 말할 있다. 그러나 방향성(two-directional)’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를 예배와 연관 지어서 생각할 반드시 생각해야 것이 있다.

 

     먼저, 위의 진술은 우리의 예배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어떠한 중보자도 없이 하나님께 반응할 있음을 뜻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21] 또한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믿음 안에서, 우리 자신의 회개함과 결심을 통해 하나님께 반응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때때로 같은 자세에서 우리의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22] 예배에 대한 같은 이해들은 참된 예배 없다. 참된 예배란 우리를 아버지의 은혜의 보좌 지성소 홀로 인도하실 있는 그리스도의 자기 자신을 드리는 제사로서의 예배에 성령의 인도 하심으로 우리가 참여하게 되는 예배를 의미한다.[23]

 

     예배에 대한 위의 자세와는 대조적으로 예배 가운데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반응을 본질적으로 주도하시는 분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서 성령을 통해 이루신 본질적이고 기본적인 반응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인도함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방향의 활동(the two-way movement of God)’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계시를 통해 자신을 우리에게 가까이 하셨듯이 우리를 자신에게 이끄신다.[24] 하나님의 같은 활동은 내재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의 상호 거주하시는 존재(the perichoretic being of God in himself)’ 근거하고 있으며, 또한 창조, 성육신 그리고 거룩하게 하심을 통한 삼위일체 하나님과 기독교 공동체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위한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은 예배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의 중심이다. 예배와 삶을 통해, 예배자로서의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 성자 하나님 안에서 성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경배하며,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 안에서 성령 하나님을 통해 우리에게 그의 은혜와 평강을 주신다. 따라서 우리는 삼위일체 안에서 예배 공동체를 보아야 하며 예배 공동체를 통해 삼위 하나님을 체험한다. 이뿐만 아니라 예배 공동체를 통해 우리는 인간을 개체(individuality)’ 인식하지 않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존재(being)’ 이해 한다. 또한 예배 공동체를 통해 우리는 우리들이 세상에서 다양한 문화 속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되며, 동시에 다양함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 사역에서 차별과 분리와 소외로 변하지않도록 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진실로 하나님이 세우신 예배 공동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학교 있다.[25] 하나님의 학교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과 세상을 바르게 배운다.

 

     토런스의 제안이 주는 번째 의미는 우리가 삼위일체 신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 단일 주체’ (a single subject or single ‘I’)로서의 하나님의 개념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단일 주체로 생각하는 것의 문제점에 대해 카이저(C. Kaiser) 어거스틴(Augustine) 삼위일체 (De Trinitate) II.5.9. 나타난 그의 이해[26] 대해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성자께서 자기 자신을 보낸 것으로 말할 있다면, 간단히 성부께서 자기 자신 보냈다고 말하지 않으며, 그리고 성부께서 자기 자신에게 기도하며 자신을 자신에게 드렸다고 말하지 않는가? 구체적인 삼위 하나님의 서로가 서로를 향한 관계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것이 삼위일체론의 역사적 근거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의 (관념론적 삼위일체) 신학이 토대로부터 붕괴될 위험에 처했다고 여겨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27]

 

     기독교 사상사의 위와 같은 예로부터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가 예배와 인간 공동체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일부분을 규정해왔음을 보게 된다.[28]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을 단일한 신성(a single divine ‘I’)으로 보는 경향의 다른 표현이 하르낙(그리고 ) 모델에서 보았던 예배에 대한 일위일체적(unitarian) 그리고 개인주의적(individualistic) 경향으로 나타난다.[29] 하르낙은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이란 오직 성부와 관계가 있으며 성자와는 관련이 없다 주장한다.[30]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목적은 사람들을 자기 자신에게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부에게만 인도하는 것이다. 같은 이유는 하르낙에게 있어서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께 자신을 복종시킨 것은 예수께서 성부에게 자신의 겸손함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르낙과 유사하게 힉도 예수님을 하나님에 대한 비범한 경외심과 하나님의 영향에 대해 놀라운 반응을 보여준 인간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31] 힉에게 있어서 예수는 인간의 도덕적이며 종교적 삶을 위한 하나의 대행자나 예시자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같은 모델에서, 예배에서의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구별되지않는 동일한 (generic) 것이지, 구별되어 독특한 (unique)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 예배의 중심은 성령을 통해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성부께 드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monistic God) 향한 인간의 직접적이며 즉각적인 관계 혹은 멀리 떨어져있는 희미한 신에 대한 인간 중심적 경험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개별적 주체(individual subject ‘I’) 보는 대신, 앞에서 살펴본 대로, 만일 하나님의 존재 하심의 모습을 상호 내주하심 가운데 계신 (perichoretically)’으로 본다면, 하나님은 단지 개별적 주체로 매몰 없는 존재이시다. 그보다 하나님은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된 그리고 서로가 서로의 안에 내주하시는 위격의 생동하여 살아있는 교제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됨(unity) 사랑 가운데 서로가 서로 안에 내주하시는 위격 사이의 하나됨, 다시 말해서 사랑의 사귐 가운데 내주하시는(three persons in communion in love or three persons as communion) 삼위 하나님으로 보아야 것이다.[32]

 

     하나님에 대한 같은 이해에 근거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 말은 사랑의 사귐 가운데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예배 공동체를 통해 나누도록 초대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는 요한복음 17: 20-21 분명하게 설명된 바로 교제임에 분명하다.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도 가운데,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서 성부와의 상호 내주하는(perichoresis) 사귐을 경험하신다. 예배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통해, 우리 또한 성자의 성령 안에서의 성부와의 서로 내주하시는 교제 가운데로 참여하도록 이끌림을 받게 된다.

 

     성자의 성령 안에서 성부와의 같은 사귐에 의지해서, 우리는 성부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있으며 하나님께 우리의 기도와 찬양을 드릴 있는 것이다(10: 19-22). 또한 하나님께서도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의 기도와 찬양을 받으시며, 우리도 우리의 기도와 찬양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령을 통해 아버지께 전달됨을 믿음 안에서 있게 된다. 실로 이것은 놀라운 교환(a wonderful exchange)’으로,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드린 것을 우리를 대신하여 성령을 통해 성부께 드리며, 그리고 드린 것이 성부로부터 성자 안에서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받은 것들로 인해 순간 마다 감사와 기쁨으로 우리의 삶을 지속해 가는 것이다.[33] 그러므로 놀라운 교환이 우리의 예배 가운데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의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하시는 분은 단일한 ’(a monistic God)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마지막으로 토런스의 제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서로가 서로를 향한 자발적인 순종(혹은 복종) 있다는 것이다.[34] 삼위 하나님의 위격, 특별히 성령 안에서의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 우리는 같은 순종의 아름다움을 보게 된다. 어쩌면 같은 주장은 지금까지의 우리의 논의와 대치되는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삼위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 동등하시며, 하나이신 분이기에 각각의 위격(person, 혹은 인격) 서로가 서로에게 종속되거나 혹은 위격이 다른 위격보다 우월하실 없기 때문에 위격이 다른 위격에게 순종한다는 것이 모순처럼 들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순종은 복음서에서 발견되는 하나의 역설(paradox)이다. 하나님이신 분이 그가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분께 철저히 순종하셨다(2:5-11). 만일 우리가 사실로 인해 어려움이나 혼란에 빠진다면,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우리가 크다는 혹은 으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겸손(humility) 뜻이 아닌 (power) 뜻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10:42-45). 다른 예로서, 예수님께서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14:28) 말씀 하셨을 , 의미는 아버지가 존재에 있어서 아들보다 우월하거나 혹은 크다는 의미가 아니라 구원의 경륜 속에서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향한 순종과 사랑의 마음을 담은 표현이다. 순종으로 드러난 사랑에 대해 복음서는 증거하기를, 구원의 역사 가운데 계시된 하나님의 삶의 모습은 단지 순종과 겸손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표현된 사랑도 함께 포함하고 있음을 증거 한다. 발타자(H. U. von Balthasar) 기술한 것처럼: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성자는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곳인 지옥을 경험하실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성부를 위한 자신의 사랑의 표현으로써의 자신의 길이 그것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는 자신의 사랑을 순종의 모습으로 드리실 있으셨고 순종으로 드러난 사랑 안에서 그는 마치 버림받은 사람으로서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됨을 경험하셨다.”[35]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성령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성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드리신 것처럼, 하나님을 예배함을 통해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감을 통해 우리도 겸손으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섬겨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삶에 참여함으로 형성된 그리스도인들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일 것이다.

 

4. 결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서로 사귐 가운데 존재하시며, 자신을 성령을 통해, 성육신 하신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삼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예배와 공동체 안에서의 삶을 규정하시며, 예배와 삶을 통해 성자와 성령 안에서 우리로 성부께 나아가도록 하신다. 뿐만 아니라 삼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와 자체를 자신의 거룩하신 가운데서 변화시키신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학 학문 분야와 목회적 차원에서 다양하게 제기되는 그리스도인의 예배에 대한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예배 드려야 것인가 라는 방법론과 같은 이해에 근거하여 다양한 예배의 방법들의 실험적인 시행에 집중하기 보다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을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예배와 삶은 우리 자신에 의해 주체적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고 끝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 우리가 드리는 예배, 그리고 우리의 삶에 대한 질문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먼저 질문 ,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의 우리의 예배는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성자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시는 사랑을 체험하며, 같은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삶으로 온전히 반영하여 드러낼 있을 것이다.

 

     예배와 경배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는 오직 책에 기록된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신을 주심으로 우리로 그를 알게 하시고 사랑하도록 하신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과 겸손으로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모습을 서로 나누며 그리고 우리가 사는 사회 속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섬기자. 글을 Julian of Norwich 글을 번역하지 않고 소개함으로 마무리 한다.

 

“In that same vision, the Trinity suddenly filled my heart with the deepest joy, and I knew that all those who go to heaven will experience this joy forever. For the Trinity is God: God is the Trinity; the Trinity is our Creator and keeper. The Trinity is our eternal love, joy and bliss,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This was revealed to me in this first vision and indeed in all of them, for it seems to me that wherever Jesus appears the blessed Trinity is also present.”[36]



[1] John O’Donnell, Trinity and Temporality (Oxford: OUP, 1983).

[2] John Donne, “meditation xvii” in Devotions upon Emergent Occasions (1924).

[3] Colin, E. Gunton, The Promise of Trinitarian Theology (Edinburgh: T & T Clark, 1997), p. 195.

[4] British Council of Churches, The Forgotten Trinity: 1. The Report of the BCC Study Commission on Trinitarian Doctrine Today (London: BCC, 1989), p. 4.

[5] J. B. Torrance, Worship, Community and the Triune God of Grace (Carlisle: Penternoster, 1996), p. 59.

[6] C. Cocksworth, Holy Holy Holy: Worshipping the Trinitarian God (London: Darton, Longman and Todd Ltd., 1997), p. 3.

[7] Gunton, 위의 , p, 175.

[8] 같은 성경의 진술에 근거해 바르트 역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있다고 말한다. 그가 제시한 하나님의 계시하심의 전형은 다음과 같이 정리 있다: God reveals Himself. He reveals Himself through Himself. He reveals Himself.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1 (Edinburgh: T & T Clark, 1975), p. 296. 같은 바르트의 계시적 접근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 것은 이해되나, 너무 지나치게 방향성(uni-directional)’ 만을 강조한 경향이 있다. 예배와의 관계에 있어서 점에 대해서는 아래의 논의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9] R. T. France, The Living God (Leicester: IVP, 1970), pp. 52-53.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심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위한 근거일 아니라, 우리가 이야기 하는 하나님이 성경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동시에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필연적이며 사실적 근거이신 하나님이시다.

[10] 답변이 오늘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려고 사용된 유비들은(analogies), 그것이 인간 사이의 관계에 근거하든, 혹은 인간의 정신적 심리적 작용에 근거하든, 아니면 피조된 세계에 근거하든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종속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11] A. I. C. Heron, “Homoousios with the Father” in T. F. Torrance (ed.), The Incarnation (Edinburgh: The Handsel Press, 1981), p. 68.

[12] Karl Rahner, The Trinity (London: Burns & Oates, 1970), p. 22.

[13] T. F. Torrance, The Mediation of Christ (Exeter: Paternoster Press, 1983), p. 70.

[14] 칼빈, 기독교강요 (서울: 성서서원, 2005), Bk. I/1/i.

[15] 위의 , I/1/ii.

[16] J. B. Torrance, Worship, Community and the Triune God of Grace, p. 20. 본문의 ‘perichoresis’ 단어의 의미는 원래 상호 내주(mutual indwelling)’ 혹은 상호 침투(mutual inter-penetration’ 뜻을 지닌 헬라어로 초대 교부들, 특히 갑바도기아 교부들에 의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로서의 존재와 하나님으로서의 존재를 함께 설명하기 위해 신학적으로 사용된 단어이다.

[17] 위의 , p. 18. Torrance 같은 이해는 특별히 요한일서 3절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본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koinonia)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koinonia)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18] J. B. Torrance 의하면, “참된 신학이란 예배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위의 , p. ix.

[19] 이에 대해 몰트만(Moltmann) 삼위일체는 우리 사회를 위한 프로그램이다.” (The Trinity is our social Programme) 라고 말한다. J. Moltmann, “The Reconciling Power of the Trinity in the Life of the Church and the World” in The Reconciling Power of the Trinity, Geneva Conference of European Churches, C.E.C. Occasional Paper No. 15 (Geneva: C.E.C., 1983), p. 56. 몰트만의 같은 견해는 신론이 인간 삶의 개개의 일면들을 규정한다는 의미에서는 맞다고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 자체는 인간적 그리고 사회적 존재들(entities) 동일시 없으며 반대도 동일하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사귐의 모습이 교회와 사회 안에 있는 인간 공동체에 반영될 있는 것은 오직 예배 공동체를 통한 실천들을 통해서 있을 것이다.

[20] 훼퍼는 동료 그리스도인과의 사귐의 교제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기를 사귐을 통해 우리가 삼위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모습의 실제적인 표지 있다고 했다. Dietrich Bonhöffer, Life Together 18th ed., (London: SCM, 1995), p. 9.

[21] J. B. Torrance, 앞의 , p. 12. 여기서 토런스는 예배에 대한 같은 이해를 하르낙(그리고 ) 모델(the Harnack(Hick) model)” 이라 부르는데, 모델에서 우리는, 예수와 함께, 남자와 여자로 혹은 형제와 자매로 서서, 성육신하신 아들에 대한 어떠한 경배도 없이 아버지께만 예배한다. 모델에서 예수는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시다. 어떠한 중보자도 혹은 성육신 하나님의 신화(myth of God incarnate)’ 조차도 우리에게 필요 없다 주장한다.

[22] 같은 자세는 실존적, 현재적 경험 모델(the ecistential, present day experience model)” 이라 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의 같은 반응은 오직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의지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J. B. Torrance, 위의 , pp. 13-16.

[23] J. B. Torrance, 위의 , p. 49.

[24] T. F. Torrance, Trinitarian Perspective (T & T Clark: Edinburgh, 1994), p. 2. 이와 비슷하게 톰슨(J. Thompson) 또한 예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삼위일체와 연관 속에서 신학과 예배를 이해함에 방향의 활동(movement) 있다. 앞에 기록한 대로, 하나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활동,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한 성부의 인간을 향한 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움직임, 성자를 통해 성부를 향한 성령의 감동 하심에 의한 인간의 반응이다.” J. Thompson, Modern Trinitarian Perspective (New York: OUP, 1994), p. 100.

[25] C. Cocksworth, 앞의 , p. 123.

[26] 여기서 어거스틴은 성자는 오직 성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에 의해 (왜냐하면 그들의 연합(unity) 때문에)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같은 어거스틴의 이해는 삼위일체를 설명함에 있어서 자신이 유비로 제시한 마음, 지혜, 사랑(mens, notitia, and amor), 또는 기억, 이해, 의지(momoria, intelligentia and voluntas) 근거한 것으로 이를 통해 그는 하나님의 단일성(unity) 강조하였다고 있다. 한편 어거스틴의 같은 생각은 서구 신학 전반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단일성은 확보되었으나, 삼위 하나님의 다양성(diversity) 훼손된 경향이 있다는 견해가 있다. 이에 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Colin Gunton 글을 보라. “Augustine, the Trinity and the Theological Crisis in the West,”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43 (1990), pp. 33-58.

[27] C. B. Kaiser, The Doctrine of God (London: Marshall, Morgan & Scott, 1982), p. 79.

[28] J. B. Torrance, 앞의 , pp. 60-61.

[29] 각주 21 참조하라.

[30] A. Harnack, What is Christianity? (New York: Harper, 1957), pp. 144f.

[31] Stephen T. Davis, “John Hick on Incarnation and Trinity” in The Trinity, (ed.) Stephen T. Davis, Daniel Kendall SJ., and Gerald O’Collins SJ. (Oxford: OUP, 1999), p. 266.

[32] 이에 대해서는 Alan Torrance , Persons in Communion (Edinburgh: T &T Clark, 2000) 보라.

[33] J. B. Torrance, 위의 , p. 2.

[34] 바르트 또한 이점에 대해 교회교의학에서 서술하고 있다. Barth, Church Dogmatics IV/1 (Edinburgh: T & T Clark, 1956), p. 209. 그러나 바르트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을 설명함에 있어서 위격(person)’이란 표현보다는 존재의 양식 혹은 양태(the mode of being)’ 표현을 씀으로 인해 삼위 하나님 사이의 자발적인 순종의 아름다움을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위격 사이의 참되며, 인격적이며, 역동적인 순종과 겸손을 표현하는데 미흡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35] H. U. von Balthasar. S. W. Sykes (ed.), Karl Barth – Studies of His Theological Methods (Oxford: Clarendon Press, 1979), p. 177에서 재인용. 여기서 지옥을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곳이라 보는 발타자의 시각은 카톨릭의 지옥 이해와 연결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36] Julian of Norwich, Revelations of Divine Love (London: Darton, Longman and Todd, 1988), Ch.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