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봇의 포도원과 아합
성경 : 왕상21:1-16절
요즘 돈을 벌려면 땅을 사두거나 주식을 사 두어야 합니다. 물론 시기에 따라 땅이 돈이 될 때도 있고 주식이 돈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땅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아직 젊어서 내 이름으로 된 땅을 가지고 있는 분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땅을 바라고 있는 사람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보면,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 나옵니다. 이스르엘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이 아름다웠는데, 그 포도원을 본 아합왕이 욕심이 나서 포도원을 빼앗은 내용입니다. 열왕기서 저자는 뜬금없이 나봇의 포도원 얘기를 하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한 작은 개인에게 일어난 일을 자세하게 서술해 놓았습니다.
1. 땅에 대한 하나님의 율법.
이스르엘 아합의 거처 가까이에 나봇이란 사람의 포도원이 있었는데, 그 포도원을 아합왕이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포도원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나봇에게 포도원을 자신에게 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절 “아합이 나봇에게 일러 가로되 네 포도원이 내 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나물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합의하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정치가인 아합은 바로 나봇에게 흥정을 하려고 합니다. “나에게 포도원을 주면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주고 ‘값을 돈으로’ 준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나봇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3절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찌로다 하니”
나봇은 조상들로부터 주어진 땅을 왕에게 줄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이 일은 여호와께서 금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아합은 근심하게 됩니다. 그 포도원을 얼마나 탐을 냈던지 밥도 먹지 못하고 근심하며 침대에 누워있을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목해야할 사실은 아합의 시대까지만 해도 땅을 사고파는 일이 흔한 일이 아니었으며, 한 나라의 왕이라도 땅 만큼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땅의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여호와께서 땅을 사고팔지 못하도록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레25:23절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토지는 내 것이기에 팔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땅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셋째 날 창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서자 여호수아를 통하여서 땅을 분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정복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약속의 땅에 들어온 각 지파마다 공평하게 땅을 분배해 주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처음부터 땅을 사고 팔 수 없도록 하신 이유는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땅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흙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며 아담과 아화의 범죄 이후로부터 땅이 저주를 받아서 ‘땀을 흘려야’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창3:17절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하나님이 땅을 저주하신 이유는 사람이 땅에 있는 흙으로부터 지음 받았지만, 땅이 소산을 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쉽게 말하면 땅이 돈을 준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물질에 대한 탐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 가지려 하는 것이 죄의 본성을 가진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땅에 대한 욕망이 사람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2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안식과 희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7년이 되면 경작하던 땅도 쉬게 하였고, 50년이 되는 희년(7X7=49)이 되는 해에는 피치못할 사정으로 땅을 팔았거나 담보 잡혔을 경우에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룻기를 공부할 때 ‘기업무를 자’에 대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가족이나 친척중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 사고 팔 수 있었습니다. 그 이외에는 매매가 불가능 했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아합도 어쩔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땅을 투기하거나 매매하여서 이득을 취하고 있고, 교회가 예배당을 짓기 위하여 무리하게 땅을 사고 집을 짓고 있습니다. 저는 지역 개발로 인하여서 얻어진 부를 교회가 다른 지역에 예배 처소를 마련하고 남은 돈은 이웃에게, 즉, 고아와 객과 과부들에게 나눠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구약성경에서도 땅을 분배되지 않았고 이들은 이스라엘이 돌보도록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당신들의 멋을 위해서 무리하게 헌금을 강요하며 예배당을 짓고 있습니다. 성경과는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합도 이런 고민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에 집과 가깝고 아름다운 그곳에 자신을 위한 정원을 만들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는 나봇은 그 포도원을 믿음으로 지켰던 것입니다.
오늘날 서민들이 더욱 힘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힘들게 일을 하여도 땀에 대가를 받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땅을 사고 팔수 없도록 막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합왕의 범죄로 인하여 사고파는 것이 더욱 자유롭게 되었을 것입니다. 교회가 부를 쌓고 그리스도인이 부한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 부를 복음과 이웃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 안식은 중요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안식을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안식의 의미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안식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루를 쉬어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습니까? 내 삶을 지키시고 먹이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으십니까?
그것을 믿고 있다면 돈돈해서는 안 됩니다. 나누지 못하고 움켜쥐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버려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기에 소중히 여길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가 무엇입니까? 바로 십일조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안내면 사업이 망하거나 몸에 병이 나거나 직장에서 잘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안내면 내게 큰 일이 닥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으로 헌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일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홀로 믿고 있는 분이 아내나 남편 때문에 십일조를 내지 못하면 망하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일조에 대해서 시험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너희들에 모든 것들이 나에게로부터 온 것이며, 내가 너를 책임진다는 믿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축복받으려고 하는 검은 마음으로 십일조를 드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땀 흘려 일하 수 있는 직장을 주시고 그 통로로 인하여서 소산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으로 드려지기를 바랍니다.
2. 이세벨의 음모.
한 나라의 왕도 어쩔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포도원을 취하지 못하고 앓고 있는 아합에게 이세벨이 포도원을 왕께 드린다고 장담하며 아합을 안심 시켰습니다.
7절 “그 아내 이세벨이 저에게 이르되 왕이 이제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하고”
이세벨은 밀서를 써서 나봇이 살고 있는 장로들과 지인들에게 함정을 만들어서 나봇을 죽이도록 만듭니다. 그 내용이 8절부터 14절에 내용입니다. 마치 밧세바를 취하던 다윗의 범죄를 연상케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던 아합은 이세벨이 말하더라도 마음을 끊어 버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끊어 버리지 못하고 이세벨이 하는 일을 방관하였습니다. 욕심에 눈이 멀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가 이와 비슷한 짓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고 가르쳐야 할 목사들이 앞장을 서서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요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천수림이다 작정헌금을 만들어서 이 땅에 지상 왕국을 만들고 있습니다.
예배당을 건축하기 전에 꼭 치르는 의식이 있습니다. 부흥회를 통하여서 사람들을 흥분 시켜서 작정하도록 만들고 그 서원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치신다고 뻥치면서 성도들을 속여서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예배자 여러분, 우리도 마음에 가지거나 이루고자 하는 포도원이 있을 것입니다. 마음에 두고 있는 형제나 자매일 수도 있고, 좋은 집이나 좋은 자동차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허영심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기에 그 마음들을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끊어 버리지 못하고 이세벨과 같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면서도 주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 거짓말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에 뜻을 이루고 있지는 않습니까?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줘 가면서 아니면 권력의 힘을 빌어서 예배당이나 기도원을 건축하는 동안에 수많은 영혼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갑니다. 그러면서 나봇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조롱하며 매장 시키기까지 합니다. 최근 이재철 목사님의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간악한 마귀 날 꾀어도 주 예수 앞으로 더 가까이
이 세상 속한 그 허영심 또 추한 생각을 다 버리니
정결한 맘 내게 늘 주소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 밑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아합과 같이 내 욕망과 탐욕에 사로잡혀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간다면 세상에 속한 허영심을 잘라 버릴 뿐만이 아니라 이세벨의 올무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합과 같은 어리석은 사람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합이 범죄한 이유는 늘 이세벨이 그를 충동하였기 때문입니다.
25절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저가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음이라”
아마도 ‘고상하다’ 또는 ‘성숙하다’는 이름처럼 이세벨은 아름다웠으며 지혜로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세벨의 가장 큰 약점은 하나님을 모르는 여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이방인이라고 해서 결혼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방인이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지키겠다는 믿음이 있으면 이스라엘 공동체로 받아 주었습니다. 모압여인 룻이나 다말과 같은 여인들이 있고, 출애굽 당시 이름 모를 민족들이 함께 출애굽을 하였습니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 때문에 이스라엘과 함께 출애굽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정경 성경에는 그 내용이 없지만, 요셉이 애굽 여인을 아내로 취하였습니다. 그것을 근거로 불신 결혼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외경을 보면 요셉의 삶과 요셉을 통하여 유일신 하나님을 만난 여인이 개종하였고 그 여인과 결혼하였다고 유대전승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은 하나님을 모르고 토라를 멸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합은 정치적인 욕심과 충동으로 이세벨과 결혼하였으며,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나를 충동하는 이세벨은 무엇입니까? 여인들에 로망스와 같은 어느 브랜드 옷이나 백인가요? 내 마음을 끌리게 만드는 연인인가요?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어도 마음은 60~70%면 충분합니다. 더 이상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잠4:23절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내 힘으로는 아합과 같이 내 마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마음을 열어 주며 탐욕과 친구할 것입니다. 마음을 바람 가는대로 물이 흐르는 대로 맡기는 것은 바보 같은 짓습니다. 우리 마음이 센티멘털해질 때,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그때는 믿음의 동역자들을 만나서 교제를 나누거나 예배의 자리에 서야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3. 아합을 다시 만나는 엘리야.
17절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다섯 번째 이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선지자들과 선지자인 엘리야는 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움직였고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나봇의 사건을 보시고 엘리야를 통하여 아합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공식적으로 만나는 세 번째입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아합을 찾아 갑니다. 그런데 엘리야를 본 아합은 엘리야를 향하여 ‘나를 대적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0절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나의 대적이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그런데 사실 아합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북이스라엘이 아닌 아합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고 있습니다.
19절 “너는 저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하셨다 하고 또 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하라”
21~26절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또 네 집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의 노를 격동하고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가라사대 개들이 이스르엘 성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찌라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저가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음이라 저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한것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
아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진노였고 가증하게 여겼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세벨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유다가 망한 것이 이세벨을 따랐기 때문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상이 없습니까? 물론 불신 가정 속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아니고서는 보이는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은 없을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보이지 않는 우상들입니다. 그 보이지 않는 우상의 근원은 자기 사랑에 있으며 탐심에 있습니다.
골3:5절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 우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합이 이세벨과 정략 결혼을 한 이유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신을 섬겼던 이유도 탐심 때문이었습니다. 탐심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16절 “아합이 나봇의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그리로 내려갔더라”
18절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거하는 이스라엘 왕 아합을 만나라 저가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그리로 내려갔나니”
열왕기서 저자가 두 번씩이나 강조하는 것은, 아합이“내려갔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읽으실 때, 내려간다는 표현은 나쁜 표현입니다. 음부를 말할 때, ‘내려갔다’는 표현을 씁니다. 요나서를 보시면 ‘요나가 여호와의 낮을 피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이나 예루살렘으로 갈 때에는 지리적으로 상관없이“올라간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러니까 이제 아합의 제일 밑바닥까지 내려갔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두 번 반복은 강한 강조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렇게 탐심의 결론은 내려가는 것입니다. 지금 믿음의 밑바닥을 헤매고 있습니까? 어떤 탐심에 붙잡혀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청년이다 보니까 이성 문제가 제일 많은 것입니다. 제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도 95%가 이성문제입니다. 제 친구는 여자 친구 때문에 신학을 그만 둔다고 말하고 한 후배 녀석은 양다리를 걸치다가 쪽박 찼습니다. 지금도 밤마다 슬픈 노래를 부르며 마음을 달래고 있습니까? 노래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동역자들에게 중보기도 요청을 하고 신뢰 가는 사람을 찾아가서 말을 해야 합니다. 마음속에 담아두고 홀로 생각하다가 보면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기 쉽습니다. 특히 저와 같이 내성적인 사람이 더욱 그러합니다.
아합은 북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심판을 받을 때에는 끔쩍하지 않다가 아합의 가족을 비롯하여서 사람들을 치신다고 말하자 회개하고 있습니다.
27절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한지라”
왜 이렇게 사람은 끝까지 와서야 깨닫는 것일까요? 히브리인들이 토라를 버렸듯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주간도 얼마만큼 성경을 읽으셨습니까?
◊결론◊
아합은 이세벨에 충동 되었고 자신에 탐욕에 눈이 멀어서 나봇의 죽음을 방관하였으며 이스라엘로 우상을 숭배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떠나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엘리야처럼 주의 말씀에 사로잡혀 하나님 앞에 늘 겸비된 자로 서며, 순간순간 올라오는 마음의 탐심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