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신학/The Fourth Gospel (요한신학)

디베랴 바다에 다시 나타나신 주님

משׁה 2010. 7. 29. 18:52

 디베랴 바다에 다시 나타나신 주님

<성경말씀: 요 21:1-14>

 

총신대학원 심상법 교수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 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 오라 하신 대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 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요한복음의 부활기사(20:1-18)는 부활후의 출현기사(20:19-21:23)와 함께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길고 자세하게 서술되고 있다(요 20-21장). 부활기사에는 두 제자의 방문과 막달라 마리아의 목격담이 포함된다. 특히 부활후의 주님의 출현기사는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3번에 걸쳐 나타나신 것(21:14)으로서 주로 제자들에게 그것도 두려움(20:19-25)과 의심(20:26-29)으로 문을 잠그고 있는 상황(20:19, 26)에 출현하여 `그들 가운데 서서` 그들에게 평강과 확신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실의에 빠져 완전히 옛 생활(어부)로 돌아간 제자들의 상황에 다시 나타나셔서 자신의 주(主)되심을 입증하심으로써 제자들을 회복하시고 특별히 베드로에게 다시 사명을 주신 스토리를 서술하고 있다. 요한복음 전체가 보여주는 대로, 부활기사 역시도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 개선(회복)에 집중하고 있음을 본다. 이처럼 부활후의 예수님의 반복된 출현은 두려움과 의심과 실의에 빠진 제자들에게 평강(기쁨)과 확신(믿음)과 위로와 사랑을 가져다주었다. 이점은 사도행전의 기사에도 마찬가지였다. 핍박과 환난의 상황에 처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출현은 커다란 위로와 확신을 가져다주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은 이 주님을 보면서 두려움 없는 믿음과 사명의 길을 걸어갔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에게도 (우리는 잘 인식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두려움과 의심과 낙심에 빠진 우리의 삶의 현장에 부활하신 주님의 출현(찾아오심)은 우리에게 넉넉한 평강과 기쁨과 확신(믿음)과 위로와 사랑의 근원이 된다.

1. 디베랴 바다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주님
오늘 우리가 다룰 예수님의 부활 후 세 번째 출현기사(21:1-14)는 디베랴 바다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입증하신) 사건이다(1, 14절 참조). 이 부활 후 출현기사는 크게 두 사건으로 서술되었는데 하나는 이적적인 고기잡음(4-8절)과 또 다른 하나는 식사 사건(9-13절)이다.

여기 1절의 "그 후에 예수께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며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라는 표현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의 삶의 현장에 반복하여 나타나셔서 자신(의 주되심)을 입증하셨다는 말로 부활하신 주님의 현현(christophany 혹은 epiphany) 을 강조(2번이나 언급)하고 있다. 특히 "나타내셨다"라는 동사는 요한복음에서 9번(1:31; 2:11; 3:21; 7:4; 9:3; 17:6; 21:1[2x]; 21;14) 나타나는데 모두 (지상사역 중에서도) 특별한 능력(이적)에 의해서 자신의 신적 능력과 영광을 알리는(입증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의 출현과 자신을 보이심(입증하심)은 단순한 출현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주되심(Lordship)을 알리는 것, 즉 신현(theophany)을 의미한다. 이런 까닭에 부활(후 출현)기사에서 이 단어가 집중하여 나타남(전체 52번 중에 15번이나 사용됨[20:2, 13, 15, 18, 20, 25, 28; 21:7{2x}, 12, 15, 16, 17, 20, 21)은 우연이 아니다. 이 기사에 3번이나 반복하여 언급된 "주(主)시다"(It is the Lord)라는 표현(21:7[2번], 12)은 바로 이점을 잘 입증하고 있다.

2. 사건의 배경(2-4절)
그리고 이어지는 2-4절의 사건의 진술은 그들이 처한 상황(배경)을 잘 보여준다. 이 사건에 나오는 제자들은 시몬 베드로를 포함하여 7명의 제자들(이들 중에서 디두모라 하는 도마[20:24-29]와 나다나엘[1:43-51]의 언급은 특이하다)로서 그들은 베드로를 따라 물고기를 잡으러 배를 타고 디베랴 바다로 나갔다. 본문에 의하면 그날 밤 그들은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다. 거의 날이 동터오는 시간이 되었을 때 주님은 바닷가에 오셨고 그들은 바닷가에 서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날이 밝지 않는 새벽이고("날이 새어갈 때에") 다소 떨어져 있었기(21:8) 때문인 것 같다.

1) 시간(4절)
사건이 일어난 시간은 아직도 어두움이 남아있는 여명의 시간이었다("날이 새어 갈 때에"). 이 시간은 자신을 주님으로 입증하신 부활후의 출현기사의 분위기(불확실함)를 잘 대변하고 있다. 아직도 부활에 대하여 확신 없이 의심과 실의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주님이 찾아오신 시간은 여명의 시간이었다. 여기 제자들 가운데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나다나엘의 언급(2절)은 이점을 암시하고 있다. 도마의 경우 이미 앞에서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져보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떻게 여기 이 대열에 끼여 있을 수 있는가? 아직도 그는 대낮 같은(cf. 막 16:2, "안식 후 첫 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확신가운데 있지는 않는 것 같다. 그리고 나다나엘 역시도 예수님을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1:49)하였지만 부활에 대한 그의 신앙은 아직도 희미한 상태였다. 요 1:50의 "이 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는 말씀은 바로 주님의 부활하심을 의미한다. 본문의 표현대로 이 사건은 어느 정도 어두움이 지나가고 "날이 새어갈 때에" 일어났다. 예수님이 부재하셨던 밤의 시간은 지나가고, `세상의 참 빛`(요 1:3ff)이신 부활의 주님께서 새벽에 실의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이 시간은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여명의 시간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은 아직 그가 예수신줄 알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주되심)을 나타내셨다.

2) 장소(1절)
사건이 발생한 장소는 디베랴 바다로서 제자들은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요한복음에서 디베랴 바다는 오직 요 6장의 오병이어의 이적기사(6:1, 23)에만 언급되는데 특이한 점은 생선의 표현(21:9, 10, 13과 6:9, 11)과 떡의 표현(21:9, 13과 6장에는 21번이 언급되고 다른 곳에는 13:18에 딱 한 번 나온다)을 여기서 다시 보게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21:13의 "예수께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라는 표현은 6:11의 말씀인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를 매우 유사하게 반향(反響)하고 있다.

이 유사한 두 기사들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숯불에 대한 언급이라고 생각한다. 즉 부활 후 출현기사는 예수께서 숯불을 두고 떡과 생선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셨다(21:9, 13)는 점이다. 이 `숯불`이란 헬라어 단어는 공교롭게도 요 18:18에 언급된 단어로서 바로 수난기사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가 아니고) 종과 하속들과 함께 불을 쬐며 주님을 부인한 장면(요 18:17)에 나온다. 요 6 장에서 베드로는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이적과 관련하여 자신의 수난에 대한 말씀(6:52-59)을 할 때, (제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떡과 물고기만 먹고 주님을 떠나가는 상황에서 "너희도 가려느냐"(6:67)라는 질문에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6:68) 라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베드로가 주님의 수난(죽음)으로 인해서 실의에 빠져 지금 옛 생활인 어부로서 다시 물고기 잡으러가고 있다.

여기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3절)라는 시몬 베드로의 말은 어부로서의 삶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말로서 옛 생활로 돌아가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베드로의 선언에 다른 제자들도 함께 동행하였고 그들은 배를 타고 나갔으나 밤 동안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다(3절). 갈릴리 바다에서의 고기잡이는 자주 밤에 행해졌다. 그 이유는 밤에 고기가 쉽게 잡히고 또한 아침에 그것들을 팔 수 있기 때문이었다(Keener 1993:318). 이른 새벽까지 제자들은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3. 이적적인 고기잡음(4-6절)
이런 상황에 주님은 바닷가에 나타나셔서(4절) 그들이 온 밤 내내 아무 것도 못 잡으신 줄을 아시고 부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며 물으셨다(5절). 5절을 번역한다면, "물고기 한 마리도 못 잡았지?"라고 표현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한 그들의 대답은 명백하였다: "예, 전혀"(never). 이에 주님은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면 고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자 그 말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니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다(6절).

4. 이적적 사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7-8절): "주(主)시다"(It is the Lord)
이적적으로 물고기를 잡은 사건(cf. 눅 5:1-11)으로 인하여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요한)가 주님을 알아보고 소리를 질렀다. "주(主)시라"(It is the Lord). 그러자 벗은 채로 있던 시몬 베드로가 주(主)라 하는 말을 듣고서는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렸다. 실의에 빠져 물고기 잡으러 간 베드로가 밤 새 아무 것도 잡지 못한 후,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그물을 내려 많은 물고기를 잡았지만 아직도 그 분이 누구인지 알 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요한의 "주시다"하는 말을 듣고는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 내린 이 행동은 특이하다. 왜 그는 벗고 있다가 "주(主)시다" 라는 말에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 내렸을까? 주석가들은 여기에 대하여 적절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수영을 하려면 벗은 몸이 더 나을텐데. 아마도 선생이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예(禮)를 갖추려고 시도한 것 같다.

5. 바닷가에서의 조반(9-13절): 숯불과 함께
육지에 올라오니 숯불이 있었고 거기에는 제자들을 위하여 생선과 떡이 준비되어 있었다(9절). 그들에게는 예기치 않은 조반(朝飯)의 만남이었다. 숯불과 함께 준비된 생선과 떡. 이것은 시몬 베드로에게는 아주 묘한 장면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언급한 대로 이 숯불은 요 18:18에 언급된 그 숯불과 동일한 단어이다. 하속들과 함께 숯불을 쬐면서 베드로는 고난받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던 자신. 그리고 떡과 물고기를 먹고 난 후에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셔야 된다는 말에, 따르던 사람들이 많이 떠나자 자신은 `영생의 말씀이신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장담하였던 자신. 이 모든 것들이 주님과 함께 준비된 그 숯불과 조반(생선과 떡)을 보면서 주마등처럼 떠올랐을 것이다. 어쩌면 이 장면은 베드로에게는 마치 수련회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우리의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그와 같은 시간이었을 지도 모른다. 잔인한 시간이라기보다는 아름다운 갱신과 회복의 시간이었다고 할까? 방금 도착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방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명하자 아니나 다를까 베드로가 갔다.

베드로가 가서 그물을 육지로 끌어올려 보니 큰 물고기가 그물에 가득하였는데 153마리나 되었고 그물은 찢어지지 아니하였다. 이적적인 고기잡음의 의미는 오병이어의 이적기사(요 6장)와 관련하여 읽을 때 그 의미가 잘 드러난다. 요 6:44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먹이신 무리들에게 이르시기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나니"라고 하였다. 이 말은 주님께로 나아옴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며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사람들을 그에게로 이끌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신의 공사역의 끝에서 그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리라"(12:32)고 하셨다. 주님을 떠나 온 밤 동안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지니 크고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cf. 눅 5;1-11). 그러므로 이 이적적인 고기잡음은 이제 주님께서 제자들을 통하여 그물을 내려 물고기를 잡아 자기에게 가져오게 함(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끎)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건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주님을 의지함(믿음)으로써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끌 수가 있음을 보여준다.

침묵가운데 조반이 시작되었는데 거기서 주님은 그들에게 떡과 생선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어 먹게 하셨다. 이 조반의 장면은 독자들에게 요 6:1-15의 장면을 상기시켜준다. 두 장면 모두 갈릴리에서 일어났고(6:1), 떡과 물고기가 (이적적으로) 준비되었고(6:11-13), 예수를 주로서 고백하였고(cf. 6:14-15), 또한 선교의 모티브가 깔려 있다(큰 무리가 따랐고[6:2-5], 큰 고기를 많이 잡았다[21:11]). 예수께서 준비한 특별한 조반을 대하면서 그들은 그가 부활하신 주님이신 줄을 알았다(12절). 조반은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특별한 배려(만남)였다. 이적적인 고기잡음을 통하여 그가 주님이신 줄을 깨달았던 제자들은 떡과 생선을 먹음으로써 다시 한번 이전에 주님께서 베푸신 이적(오병이어의 이적)과 그의 말씀을 기억하며 그의 주되심을 침묵가운데서 상기하였을 것이다. 숯불 곁에서 조반과 함께 과거를 깊이 회상함으로써 연약한 자신을 성찰하면서 주님의 능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요한복음의 독자는 이미 앞에서 읽은 요 6장의 오병이어의 기사와 함께 13장의 유월절 만찬과 관련하여 조반의 의미를 매우 잘 이해하였을 것이다.

<설교의 단상>
결론적으로 부활후의 이 출현기사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교훈해 준다. 무엇보다도 종말의 시간을 보내는 우리들이 어두움 속에서 때론 두려워하고 때론 의심을 하며 때론 깊은 좌절과 실의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 어쩌면 이 시간은 본문에 나오는 장면처럼 아직도 어두움이 남아있는 새벽(여명)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간에 주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반복하여 나타내신다. 그러나 때론 우리는 제자들처럼 그 주님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 가운데 나타나신 것처럼 우리 가운데 계신다. 그러다가 문득 우리는 주님을 발견하고 "주(主)시다"(It is the Lord)라고 외친다. 주일의 예배에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만나기도 하며, 우리의 일상에서도 주님을 만나 "주(主)시다"(It is the Lord)라고 외친다. 그 주님을 만나면서 우리는 우리의 지나간 날들을 돌아보기도 한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셨던(행하시고 말씀하셨던) 일들을 회상해 본다. 이 회상의 시간, 만남의 시간은 서로를 알아보면서 갖는 침묵의 시간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 6:53-57).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의 생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주님을 주일 예배에서, 새벽의 기도시간에서, 일상의 삶의 현장에서 재차 만나 위로와 확신과 소망을 가지며 베드로처럼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를 다시 한번 고백하며 제자(사역자)의 길을 간다. 이제는 우리가 죽으셨다 다시 사신 이 주님을 높이 들면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끌 수 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리라"(12:32).

<참고문헌>
Beasley-Murray, G R 1987. John. Waco: Word.
Bible Works. 4.0 version(CD ROM)
Keener, C 1993. The IVP Bible Background Commentary: New Testament. Downers Grove: IVP.
Koester, C R 1995. Symbolism in the Fourth Gospel: Meaning, Mystery, Community. Minneapolis: Fortress.
Segovia, F F 1991. The Final Farewell of Jesus: A Reading of John 20:30-21:25. Semeia 53:167-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