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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주의의 몰락

משׁה 2014. 12. 17. 16:44

교황주의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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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2~13세기에도 교황권(sacerdotium)과 제왕권(imperium)의 대결은 계속되었다. 교황권이 제왕권보다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도 있었으나 국왕들의 권력은 교황의 권력보다 분쇄하기 힘든 탄탄한 기반을 두고 있는 반면, 교황은 보편적인 통치로 국제적인 관계에서 외교적으로 현명하게 처신함으로써 교권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교황의 권위는 상황에 따라 유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제왕들의 권력은 국가간의 이해 문제로 인한 갈등 관계에서 국력과 함께 신장되어 갔다. 이제 국가주의 형성을 시작으로 교황의 권위보다 공의회 권위를 높이려는 공의회 운동이 드러나기까지의 배경을 살펴볼 것이다.

 

 

I. 새로운 환경

 

1. 국가주의 대두

 

중세 말기의 상황을 결정짓는 요인은 화폐경제의 발달이다. 12~13세기에 걸쳐 발전한 화폐경제로 인해 부르주아라는 신흥세력 계급이 생겨났다. 신용제도, 교역, 공산품 생산 등으로 부르주아 계급이 점차 강한 영향력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기득권을 지키려는 봉건영주들의 이해관계와 정면으로 충돌이 일어났다. 부르주아는 자신들의 교역이 보호를 받고 화폐제도를 통제하고 사소한 전쟁을 종식시킬 강력한 중앙집권 정부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귀족들에 대항하여 국왕들을 지지했다. 이로 인하여 중앙집권 군주제가 성숙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잉글랜드, 스칸디나비아 등은 비교적 강력한 군주제도 아래 통일된 최초의 국가형태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자신을 한 국가의 국민으로 간주하기 시작하면서 유럽의 다른 지역에 대항한 공동 연대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런 국가주의는 보편적 권위를 내세우는 교황의 주장을 잠식시켰다. 다시 말해서 보편적 권위를 내세우는 교황의 권위를 무너뜨리게 된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백년전쟁이다.

 

2. 백년전쟁(1337~1475)

 

14~15세기에 걸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백년전쟁이 일어났다. 전쟁 중 교황들은 프랑스의 비호아래 아비뇽에 거주하였고, 영국은 교황을 적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정치적 이해관계와 동맹관계에 의해서 교황을 선출하게 되었다.

 

영국 에드워드 3(Edward III)는 사촌인 필립 6((Philippe VI)가 차지하고 있던 프랑스 왕위를 탐냈다. 또 다른 부수적인 이유는 프랑스의 새 왕 필립 6세가 스코틀랜드를 지원하고 에드워드는 당시 프랑스의 군주와 사이가 나빴던 플랑드르의 도시들과 동맹을 맺은 데다 또한 프랑스 왕위에 대한 주장을 1337년에 재개한 데 있었다(처음에 주장한 것은 1328년이었음). 에드워드는 1339, 13402차례에 걸쳐 북쪽으로 프랑스 침공을 시도했으며 그 결과 파산상태로 전락했다.

 

샤를 6(Charles VI)가 프랑스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정신병 증세를 보였으므로 광인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로인해 섭정의 선출을 두고 두 파가 싸우게 되는데 영국이 그 중 한쪽 편을 들면서 다시 프랑스에 침입했다. 샤를 6(Charles VI) 사망 당시 영국 및 친영파가 우세했다. 샤를 6(Charles VI)의 아들인 샤를 7(Charles )가 왕위에 올랐으나 프랑스 왕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듯 했지만, 잔다르크(Jeanne d'Arc)의 활약으로 다시 파리로 돌아가 프랑스 왕으로 정식 즉위한다. 말하자면 그는 잔 다르크(Jeanne d'Arc)의 도움이 있었기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잔다르크(Jeanne d'Arc)가 화형당한 1431년에 샤를 7(Charles )는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고 얼마 후 프랑스의 내란이 종식되었고 1453년 영국과 프랑스사이의 전쟁도 막을 내렸다.

 

이 전쟁이 가져온 교회 생활의 결과는 전쟁 중 한동안 교황들은 프랑스의 비호 아래 아비뇽에 거주했으므로 영국인들은 교황을 적으로 여겼다. 후일 전체 서방교회가 두 명의 대립 교황들과의 동맹관계에 따라 분리된 대분열 때에 각국은 백년전쟁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동맹 및 적대 관계에 따라 교황들을 선택했고 전쟁 자체 때문에 대분열을 극복하기가 더욱 어려웠으며 당시의 국제관계로 국가주의적 경향이 강화되었으므로, 보편적 권위를 주장하는 교황청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3.흑사병(1347~1350)

 

당시 소빙기로 인한 기후변화와 유럽과 지중해간 활발한 교역으로 인해 북해 연안에서 발생한 페스트는 이탈리아로 옮겨가고 유럽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인구의 1/3이 사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유럽은 인구학적 경제적 안정을 잃어버렸고, 심지어 페스트의 원인을 유대인으로 몰아 유대인 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러한 사회적 불안정은 종교적 의식의 변화를 일으켰다. 합리적이고 질서 있는 우주 체계에 대한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지식인들은 이성의 한계에 대해 의심하고, 일반인들은 미신에 빠졌다. 사람들은 성지순례를 떠났고, 성유물 숭배와 매매가 성행했으며, 전염병의 공포, 지옥의 공포, 최후의 심판에 대한 공포가 유럽인들의 마음을 잠식하게 되었다.

 

4.동로마 비잔틴 제국의 멸망(1453)

 

4차 십자가 원정당시 술탄 모하메드 2(Mohammed II)는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려고 했기에, 비잔틴 황제들은 서방의 도움을 요청했다. 교황은 그 대가로 교회의 화합을 요구했지만 교황은 포위된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군주들의 도움을 얻는데 실패했다. 힘을 잃은 교황의 권위를 보여준다.

 

한편 유럽의 동쪽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투르크의 모하메드2(Mohammed II)에 의해 1453529일 점령당했다. 동방제국의 장엄한 성소피아 성당엔 모하메드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 이렇게 새로운 기독교적 로마를 꿈꾸던 콘스탄틴(Constantinus)의 꿈은 사라지고 그의 이름을 딴 도시는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 프랑스 그늘 아래의 교황청

 

1. 교황 보니파키우스 8(1294-1303)-교황청 역사의 전환점

 

전임교황 셀레스틴 5(Celestine V)의 사임으로 보니파키우스(Boniface VIII)는 교황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를 원래 교황좌를 노리던 이탈리아의 세도 가문인 콜로나가와 급진적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은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보니파키우스의 재위 초기는 성공적이었다. 그는 이탈리아의 강력한 적수인 콜로나가에 대한 투쟁을 개시하여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유배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반란을 일으켜 독일 황제 자리를 차지한 알베르트를 반란자요 군주 살해자로 규정하고 무참히 굴복시키며 교황의 특권을 고양시키는 협상을 이끌어 내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에 돌입하려는 순간이었는데 교황은 두 나라를 중재하는 역할을 함으로 유럽 제일의 존재로 굳건히 서 있었다.

 

보니파키우스 8(Boniface VIII)클레리키스 라이코스(1296)’ 칙령을 발표하여 모든 성직자들로 하여금 세속의 정부에 납세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에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Edward I)와 프랑스의 필립4(Philippe IV)가 크게 반발했다. 에드워드는 성직자들이 교황의 칙령을 따르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했으며 필립은 프랑스로부터 모든 자금의 유출을 동결시켜서 헌금이 로마로 가는 길을 차단했다. 교황과 왕의 이러한 대립은 보니파키우스 8세가 스코틀랜드를 교황의 영지로 주장하면서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를 침입하는 것을 금하는 세속정치의 간여로 더욱 약화되었다. 지루한 소모전이 계속되었지만, 이윽고 교황의 중재안을 수용하였다.

 

1300년은 보니파키우스의 교황 재위 기간의 절정의 해였다. 희년을 선포하고 베드로의 무덤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전대사를 약속했다. 당시 교황은 유럽 제일의 존재로 보였다.

 

하지만 프랑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프랑스 국왕 필립(Philippe VI)은 교황에게 정면으로 도전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삼부회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보니파키우스는 우남 쌍탐(Unam Sanctam)“이라는 교서를 발표함으로 서로 대립하였다. 보니파키우스는 아나니에서 필립의 파문령을 준비하였지만 오히려 필립의 이름으로 콜로나와 윌리엄 노가레에서 납치당해 굴욕을 당했다.

 

마침내 프랑스의 필립은 군대를 보내어 보니파키우스 8세를 습격하도록 하여 그의 생명을 위협을 당하게 된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사흘간 감금당했다가 한 달 후에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베네딕트 11(Benedetto XI)가 교황이 되어 필립의 이런 처사를 정죄하는 칙령을 발표했는데 그도 역시 4주후에 죽고 말았다.(사람들은 그가 독살당한 것으로 믿고 있다.)

 

2. 교황 클레멘트 5(1305-1314)-아비뇽유수의 시작

 

보니파키우스 8세와 베네딕트 11(Benedict XI) 두 명의 교황이 잇따라 죽은 뒤 새로 임명된 교황 클레멘트 5(Clement V)는 프랑스 왕의 영향력 아래 있었고 로마의 불안한 정세 때문에 1309년에 프랑스 남부 아비뇽(Avignon)으로 교황청을 옮겼다. 아비뇽 교황청은 70년 동안 그곳에 있었는데, 역사는 이 기간을 "교회의 바빌론 유수 시기" 라고 한다. 70여 년간 지속된 아비뇽 유수 기간에 7명의 교황이 재위하였다.

 

클레멘트 5(1305-1314) 요한 22(1316-1334) 베네딕트 12(1334-1342) 클레멘트 6(1342-1352) 인노센트 6(1352-1362) 우르반 5(1362-1370) 그레고리 11(1370-1378)

 

이렇게 오랜 기간 로마에 교황청이 부재한 현상이 교황제도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는데 교황제는 모토(母土)에서 이식되면서 더 이상 기독교 세계의 중심에서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 즉 아비뇽 교황청은 기독교 세계에서 교황에 대한 존경을 뿌리째 흔들었다. 교황청이 일개 프랑스산하의 기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 교황청의 도덕상은 유럽 전역에서 악명이 높았다. 시기와 견제로 분열되었고 족벌주의와 뇌물 성직매매가 부끄러움 없이 자행되었고 교황가문의 씀씀이가 전례 없이 방만해져 틈만 나면 남발된 면죄부와 종교세가 수입 증가의 원천이 되었다.

 

. 서방교회의 대 분열 및 결과

 

1. 그레고리11(1370-1378) - 아비뇽유수를 끝냄

 

그레고리(Gregory XI)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에 시에나의 카타리나가 교황의 로마 귀환을 촉구하였다. 마침내 교황은 1377117일 기나긴 아비뇽 포로생활을 끝내고 로마로 돌아왔다. 하지만 로마시민들은 다음에 선출된 교황이 아비뇽으로 돌아갈 것을 염려했다. 그리고 추기경들이 로마를 떠나 프랑스로 도망칠 가능성이 있다는 소문 때문에 폭동이 일어났고 폭동들은 로마인 출신, 이탈리아인 교황의 선출을 요구했다. 그래서 콘클라베는 새교황인 우르반 6(Urban VI)를 선출했다. 하지만 우르반 6세는 개혁을 부르짖으면서도 가까운 친척들을 요직에 임명함으로 족벌주의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이에 추기경들은 대항했고 그 세력은 점점 증가했다. 결국 추기경들은 비공개로 모여 새 교황을 선출했다.

 

우르반 6(1378-1389) vs 클레멘트 7(1378-1394)

 

이제 동일한 추기경들에 의해서 선출된 두 명의 교황이 공존하게 되었다. 그 중 하나인 우르반 6세는 스스로 새로운 추기경들을 임명했고 또 다른 교황 클레멘트 7(Clement VII)는 과거와 연결된 추기경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보니파키우스 9(1389-1404)

인노센트 7(1404-1406) vs 베네딕트 13(1394-1423)

그레고리 12(1406-1415)

우르반 6(Urban VI)가 사망하자 로마에서는 보니파키우스 9(Bonifatius IX)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는 우르반의 개혁정책을 포기하고 성직매매를 성행시켰다. 대립교황에 대항하기 위해서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친불파인 클레멘트 7(Clement VII)가 사망하자 아비뇽에선 베네딕트 13(Benedictus XIII)가 세워졌다. 이후 로마에서는 인노센트7(Innocent VII), 그레고리 12(Gregory XII)가 세워졌다.

 

결론

 

이러한 분열에 대해 유럽전체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이를 감지한 로마의 추기경들과 프랑스도 각자의 교황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여 여러 해 동안 발전되어온 공의회(council) 운동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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