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강해
예수의 나사렛 선언, 그리고 도전들
(눅 4:14-42)
정용성
들어가는 말 사회과학적 주해를 위한 변명
한 청년이 있었다. 한 동네에서 어릴 적 코흘리개로 자라는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이 되어있다. 그런데 도시로 나가서 공부를 하고 난 뒤에 정치에 입문하였다. 자신이 살던 동네로 돌아와서, 앞으로 어떤 비전과 이상을 가지고 정치적인 활동을 할지, 그 포부를 밝히는 모임을 가졌다. 동네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다 전도유망한 지역 출신의 청년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옹기종기 모였다. 그리고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지역에 대한 공약이나, 그 지역 어른들의 가슴에 상처를 주며 꽂혀있는 한(恨)을 갚아주겠다는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픔을 달래기보다는 상처를 더 덧나게 하는 말로 지역 어르신들의 심기만 건드려 놓았다. 지역민들은 조롱하였다. 이에 대한 이 청년의 반응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무릎 꿇고 사죄를 하여야 하는가? 잘못을 일일이 지적하며, 무엇이 옳은지를 지적하는 변명을 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비전과 이상을 어떠한 비난과 난관에도 불구하고, 묵묵하게 실현하여 나가야 하는가?
다소 인위적인 시나리오이지만, 어쩌면 예수가 공식 무대에 등장하여 활동을 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누가가 염두에 두고 있는 시나리오가 아니겠는가? 본인은 누가복음 4장 14-42절까지를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면서, 예수의 공생애 초기에 1세기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당시의 문화적, 사회적인 맥락 (social-cultural context)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먼저,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주된 사회과학적 모델로서 명예와 수치 (honor and shame)를 소개하고자 한다. 다음으로 본문 분석과 주해를 하고자 한다. 본문은 예수가 나사렛 회당에서 선언한 내용과 의의, 그리고 이에 대한 그 이후의 반응, 그 다음으로 갈릴리 가버나움 사역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글쓰기 전략을 세우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먼저는 해석자가 해석적 도구를 밝힘으로서, 제한된 입장에서의 읽기를 하고 있음을 독자에게 이해를 구하고자 함이다. 다음으로는 해석자가 도구를 잘 통제하고 있는지, 아니면 해석자가 도구의 통제를 받고 있는지를, 독자가 관찰하고 평가하여 주기를 요청하고자 함이다. 세 번째로 해석자가 자신의 해석적 도구에 충실하면서도, 본문의 권위에 존중하며, 본문의 음성을 들으려고 함이다. 이는 특히 사회과학적 해석방법을 채택하는 해석자들에게서, 모델이나 이론에 억지로 본문을 끼워 맞추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해석자는 본문을 당시의 사회적 맥락 속에 놓되, 본문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인정하고 그 음성을 들어야 한다.
주해에 앞서서 왜 이러한 변명을 하고 있는가? 해석자 자신의 작업에 대한 자기 검증과 더불어서, 최근의 성경 해석의 조류에 대한 우려가 어느 정도 있기 때문이다. 전제가 없는 해석이란 불가능하다. 흔히 주관적인 해석에 반대하기 위하여, 이를 연역적 해석 방법 (the deductive method)이라고 규정하고, 해석의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듯이 관찰-해석-적용으로 이어지는 방법을 귀납법적 해석 (the inductive method)라고 한다. 그러나 본문을 해석하는 관찰자가 선험적으로 어떤 전제를 가지고 질문을 던지지 않는 한, 본문은 해석자에게 답을 주지 않는다. 대화가 없는 답이란 교리적이고 화석화된 처방이다. 만일 귀납법적 해석 방법이 해석자의 주관이 해석과정에 개입하여 주도하는 억지해석 (eisgesis)을 방지하고 과학적인 객관성을 가진 해석을 추구하기 위함이라면, 해석자의 주관으로 인한 잘못된 해석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귀납법적 해석방법을 사용한다고, 해석자의 주관을 방지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가장 엄밀한 과학적 탐구에서도 인정되는 바이다 (예. 상대성 이론과 불확실성 이론 등.). 따라서 주해 (exegesis)는 연역도 아니도 귀납도 아닌, 해석자의 자리와 본문이 끊임없는 대화를 통하여 도출된 의미 (meaning)를, 해석자의 삶의 자리에 의의(significance)를 제공하는 것이다. 해석자가 전제와 질문을 가지고 들어가서, 본문의 세계관과 의미와 대화를 하면서 도출하는 것으로, 이것을 굳이 명명하지면, 대화적 또는 유도적 해석 방법(retroductive or abductive method)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로 복음주의 진영에서 귀납법적 해석방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기존의 주제 설교를 강해 설교로 전환시키려고 한 노력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하지만, 이러한 귀납법적 해석이라는 범주 속에 들어있는 취약점을 해석자가 경각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의 전제와 선입적 결론을 본문에 주입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본문과의 대화를 통해서 의미와 의의를 정직하게 듣고 통찰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1. 명예의 수치의 모델로 본 나사렛 회당 기사 (4.16-30)
누가가 묘사하고 있는 나사렛 회당에서의 이야기를 여러 각도에서 살펴 볼 수 있다. 하지만 누가가 지중해권 문화의 사회적 가치를 누가-행전을 통해서 밝히 드러내고 있는 저자이므로, 일별하여 읽어보아도 본문에 드러나고 있는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 명예와 수치의 관점에서 이뤄지고 있기에, 이 모델을 통하여 주해하고자 한다.
1.1. 일세기 지중해 사회에서 명예와 수치
1.1.1. 일세기 지중해 사회에서 명예와 수치는 지고한 문화적 핵심 가치이다. 한국 사회를 흔히 빙자하여 폼생폼사, 즉 폼에 살고 폼에 죽는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지중해권 문화에 깊이 뿌리박힌 사람은 명예에 살고 수치에 죽는다. 명예란 무엇인가? 공공연히 인정을 받는 가치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와 반대되는 수치는 공공연히 부인되고 배척되는 가치가 있다는 주장이다. 명예는 (a) 부여된 명예 (ascribed honor)와 (b) 획득된 명예 (acquired honor)가 있다. 부모로부터 유전된 명예는 부여된 명예이다. 가문과 족보는 부여된 명예에 대한 집단적 주장이다. 하나님, 왕, 귀족은 침범하기가 불가능한 명예가 보장된다. 자신이 획득하고 주장하는 명예를 획득된 명예라고 한다. 명예는 우선적으로는 일종의 집단 가치이다. 어떠한 가족이나 사회적 집단에 소속되어 있느냐이다. 따라서 명예는 공중 앞에서 공공연히 주장되고 인정되고 방어되어야 한다. 그리고 명예는 일종의 효용가치가 제한된 상품 (limited good)과 같다. 즉 누가 획득하면 누가 잃는 제로 섬 (zero-sum)의 원칙이 적용된다. 따라서 21세기의 민주주의 사회와는 달리. 지중해권 문화에서는 한 사회에서 주장할 수 있는 명예는 제한되어 있고, 소수에게만 특권적으로 귀속되어져 있다. 기존에 명예가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언제든지 잃을 수도 있다. 따라서 명예를 주장하고 인정받고 방어하기 위하여, 치열한 도전과 되받기 (challenge-riposte)라는 일종의 사회적 게임이 치열하게 전개된다. 이러한 평가를 하는 대중이 있어야 이러한 게임은 인정된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동등한 지위와 신분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예를 들어서 평민이 귀족에게 도전하는 것은 무시하여도 된다. 그러나 가족 또는 친구의 범위를 넘어서면, 사회적으로 동등한 자와의 상호 교류를 통해서 끊임없이 명예를 획득하고 인정받고 방어하는 사회적인 시도를 한다. 따라서 선물제공, 식사초대, 결혼협의, 그리고 경제적 거래와 법률적 논쟁과 같은 모든 사회적 행위는 명예에 대한 도전과 되받기라는 끊임없는 사회적 게임에 속한다.
1.1.2. 도전과 되받기
도전과 되받기는 사회적인 의사전달이자 사회적인 줄다리기이다. 두 개인 또는 집단 사이에는 끊임없는 대중적인 메시지가 전달된다. 메시지는 말, 선물 초대와 같은 상징적인 사물일 수도 있고, 어떤 행동과 같은 사건이기도 하다. 전달된 메시지는 반드시 어떤 방식으로든 반응할 것을 요구하고 기대하기 때문에, 어떤 결과를 초래한다. 도전은 다른 사람의 사회적 공간에 들어가려는 주장이다. 상대가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 공간을 차지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되받기는 이에 대한 거부 반응이다. 명예를 위한 도전과 되받기는 세 단계로 진행된다. 다음은 도표는 이러한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하여 준다.
도전
긍정적 도전 부정적 도전
메시지 칭찬의 말 말을 통한 모욕
선물 행동을 통한 모욕
도움의 요청 협박
도움의 약속
인지 수신자는 명예와 수치라는 자기 가치에 근거하여, 메시지를 수신하고, 이것 이 부정인지, 긍정적인지를 인지하고,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어떻게 반 응할 것인지를 결정하게 된다.
반응 수신자는 자신의 명예가 인정되든지 아니면 거절되든지를 결정하는 공적인 판결 (public verdict)이 곧 뒤 따름을 알기에, 반드시 다음과 같은 응답하여 야 한다.
긍정적 거절 용인 부정적 거절
조롱 역도전을 무응답
경멸 일으키는 반응
멸시
(a) 수신자가 동등할 경우: 사회적 경쟁이나 게임이 수치를 당함
보복 계속 이어진다
(b) 수신자가 우월할 경우:
아무 일도 없다.
1.2. 명예를 위한 도전과 되받기 과정으로 본 누가의 나사렛 회당 기사
위에서 기술한 명예를 위한 도전과 되받기 과정의 모델을 바탕으로 누가의 나사렛 회당 기사를 살펴보자. 이 단락에서 우리의 주요 관점은 우선적으로 어떠한 도전과 되받기가 진행되며, 이 과정에서 예수의 명예가 어떻게 천명되고 반대에 부딪히는가? 이다.
4.14-15 전형적인 누가의 요약문으로, 예수의 명예가 대중의 판결에 의해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는 점에 누가는 관심을 보인다. 고대 농경 사회에는 2-4%의 사람들만이 글을 읽고 쓸 수 있다. 따라서 사회의 엘리트층이 아닌 사람들 가운데서는, 기본적으로 가십 (gossip)이라는 방송망을 통해 의사가 전달되고 확산된다. 계속 이어지는 명예의 획득과 손실의 게임에서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지를 알려줄 뿐 아니라, 적절한 상호관계를 하도록 만들어주는 일종의 지침을 제공하여 준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가십 방송망은 일상에서 벗어난 일탈된 부분을 강조함으로써 대부분이 현상 유지를 천명하여 주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갈릴리 지역에서, 예수는 상당한 호응을 얻고서, 그의 명예가 대중적으로 천명되었다.
4.16-22 나사렛은 예수의 고향이다. 예수가 고향에 이르니, 안식일 회당 예배에 회당장이 예수에게 성경을 읽고 강론하기를 요청하였다. 이는 이미 갈릴리의 다른 지역에서 획득되고 천명된 예수의 명예를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청도 명예의 관점에서 보면 일종의 긍정적인 도전이다. 예수가 과연 자신의 고향에서도 이러한 명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가? 예수의 능력이 고향에서 시험대에 올랐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어떻게든 반응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쌓았던 명예를 잃고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예수가 이를 받아들였다. 이는 계속 이어지는 도전과 되받기의 게임이 진행됨을 의미한다. 마침 이사야서 두루마리가 예수에게 전달되었다. 예수는 이 중에 사 61.1-2를 읽었다. 그리고 “오늘 이 경의 말씀이 너희가 들음으로 성취되었노라” (21b)고 선언하였다. 예수는 자신이 바로 이사야가 예언하였던 바,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그 종이라고 자신의 신원을 밝히고, 자신의 활동은 바로 이 종의 사역을 시행하고 있노라고 선언하였다. 이는 구약 성경 전통이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며, 전수되고 이에 익숙하게 살아왔던 일세기 갈릴리 유대인들에게는 엄청난 선언이다. 자신의 명예를 이스라엘의 예언적 전통에 비추어서 대중 앞에서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다. 당연히 이러한 신분에 대한 주장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던 자가 새롭게 자신의 명예를 주장하면, 회당을 근거로 백성들의 존경과 위엄을 받아왔던 자들에게 도전으로서, 그들의 사회적 공간에 예수가 들어가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에 대한 되받기를 우리는 당연히 예상할 수 있다.
언 듯 보기에는 회중이 예수의 말씀이 제시하는바 명예를 그대로 인정하려고 준비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 다음에 등장하는 심각한 질문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2b). 이는 예수의 메시지가 회중에게 일종의 도전으로 전달되었음을 암시하여 준다. 지금 예수와 회당 지도자들 사이에 명예를 둘러싼 도전과 되받기의 경쟁적인 (agonistic) 게임이 진행 중임을 알 수 있다.
왜? 일세기 지중해 농경 사회는 오늘날 무한한 생산으로 풍요를 창출하는 산업화된 사회가 아니라, 제한된 재화의 사회 (a limited good society)이다. 따라서 누가 얻으면 반드시 다른 이는 잃게 마련이다. 당시의 회당은 지역 사회를 위한 성전의 대리 공간 (surrogate space)이었다. 즉 예루살렘 성전의 부속 공간으로서, 지역 회당은 중앙 성소인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와 역할이 각 지역에 영향력을 미치게 만드는 성스러운 공간이다. 이 장소에 이미 제사장을 비롯하여 지역의 사회-경제적 유지들이 자신들의 명예를 주장하며 유지하는 장소이다. 이들의 도전이 자신의 신분과 명예에 대한 도전임을 인식한 예수는 그들의 도전에 은혜로운 메시지와 권위있는 선포로 되받았다. 예수가 등장하여 이들의 명예와 권위에 도전을 하게 되었다: 옛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바, 종말에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종은 바로 “나”이고, 그의 역할이 듣는 너희에게 이루어졌다. 분명히 은혜로운 말씀이다. 그러나 과연 예수가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어떤 권위로 오래 전 선지자들이 꿈 꾸어왔던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자신의 말을 통해서 성취되어져 왔다고 선언할 수 있는가? 회당 구성원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되었던 명예가 심각하게 손상되고 있음을 인지하였다.
도전자는 반드시 수치로 응징되어야 자신들에게 부여된 명예가 유지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Ouvci. ui`o,j evstin VIwsh.f ou-toj*)하고, 그의 비천한 가족적 기원을 언급하며, 명예를 방어하기 위한 되받기를 하고 있다. 한 사람이 누구인가가 그의 개인적 능력이나 성취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사회적 집단에 속하였는가를 통하여 결정하는 것이 집단 중심의 사회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신분과 명예는 그의 가족 집단에 의해서 대부분 결정되고, 사람의 공적인 인정도 이에 준한다. 회당 참여자들은 어떻게 이렇게 명예로운 가르침이 목수와 같은 비천한 신분의 집안에서 태어난 자의 입에서 선포될 수 있는지에 의문을 표하였다. 이는 예수의 가르침이 은혜롭다는 말이 아니다 (한글 개역 성경이 주는 이미지). 대신에 어떻게 비천한 출생 신분을 가진 자가 이렇게 자신에게 부여된 명예와는 격(格)이 맞지 않는 명예로운 말을 할 수 있는가? 이다. 따라서 22절을 의역을 섞어서 번역하면 이렇다: “모두 다 그로 인하여 놀랐다. 그들은 그가 어떻게 이렇게 은혜로운 말씀을 할 수 있는지 놀라운 표정이었다.”
23-27 이제 공은 예수에게로 넘어왔다. 당연히 지중해권 사회 속에서 명예와 수치가 무엇인지에 몸에 베이도록 익숙하여 왔던 예수는 되받기를 하였다. 그들이 계속하여 자신에게 생래적으로 부여된 명예를 바탕으로 평가하고, 자신이 주장하는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신분에 의문을 표하리라고 예상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심중을 읽고서 선수(先手)를 쳐서 되받기를 하였다. “‘의원아! 너를 고치라’ (VIatre,( qera,peuson seauto,n\)는 속담을 마음에 되 뇌이면서 비웃고 있지. 그리고 가버나움에서 행하였던 일들을 고향에서도 행하여 보아라고 요구하겠지.” 이러한 속담에 맞받아쳐서, 성경을 실례로 들면서 자신의 주장을 인증(引證)하고 있다. “그래, 선지자가 어디 고향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있나! 그러나 선지자를 제대로 알아보고 판단할 수 있는 자들은 잘 알고 있는 고향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잘 모르는 외지 사람들이지. 그 실례가 바로 엘리아 시대에 사렙다 과부이고, 엘리사 시대의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이지.”
이러한 종류의 되받기는 심각한 모욕으로, 다음과 같이 암시하고 있는 말이다: 이스라엘 밖의 이방인이 오히려 안면이 있고 연줄이 있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한 선지자의 명예를 잘 평가할 수 있다. 바깥사람들은 잘 인정하는데, 어째서 너희 고향 사람들은 한 사람의 출신 선지자를 제대로 인정도 하지 않고, 그 혜택도 받지 못하는가! 따라서 예수의 주장이 함축하고 있는 바는 명백하다. 예수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고향에 왔으나, 고향 사람들이 제대로 인정을 하지 않고 영접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사역으로 인한 하나님의 후의 (은혜)를 입을 수 없게 되었다. 즉 자신을 제대로 영접하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대상에서 너희들은 제외되었다는 일종의 저주의 선언이다. 마치 예수가 제자들을 보낼 때에, 영접하지 않거든 그 마을을 떠날 때에 신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는 저주선언과도 같은 맥락이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 (안식일 회당 예배에 참석한 자)은 이스라엘의 예언적 전통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최고의 선물로 생각하고 갈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고 그 은택을 누리기를 소망하였다. 이러한 자들을 대상으로 이러한 언사를 보이는 것은 심각한 되받기를 초래하는 모욕이다. 앞의 도표를 보면, 도전과 되받기 과정에서 이러한 모욕적인 언사는 부정적인 도전이다.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이러한 종류의 도전은 다른 이의 명예를 빼앗고 강탈하기 위한 일종의 협박으로 받아들인다. 심각한 명예의 손상이 우려된다. 따라서 과격한 되받기가 다음에 예상된다.
28-29 회당에 있던 회중들이 매우 격분하였다. 지금도 아랍권에 살고 있는 지중해권 사람들이 격분하면, 어떤 일을 할지 모른다. 미국이 아랍의 형제들을 침략하여 알라를 모욕하였다고 판단하였을 때에, 어떻게 그들이 되받기를 하였는지 911 테러가 가장 분명한 증거이다. 모욕을 통하여 집단의 명예에 손상을 입었을 경우에는 과격한 행동으로 자신들의 집단 명예를 회복하고자 한다. 예수를 절벽에서 밀쳐 버리려고 하였다. 지리적으로 나사렛은 갈릴리 북서지역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세워져 있다. 아마도 회당의 회중들이 격분하여 예수를 밖으로 밀쳐내고서, 계속하여 동네 절벽 쪽으로 몰아서 죽이려고 하였을 것이다. 예수의 도전이 얼마나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그들에게 수치를 안겨다 주었는지를 감지할 수 있다. 이는 회당의 회중들이 예수가 주장하였던 가치를 부여할 마음이 전혀 없었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의 선언으로 인하여 아주 심하게 수치를 당하였음을 알았다. 따라서 죽여 버리겠다는 과격한 반응이 나왔다. 도전자의 죽음은 당연이 대중적인 수치에 합당한 대응이다. 다만 폭력적인 방책에 너무 재빨리 의지하는 것은 재치의 게임이 그침이 없이 항상 존재하는 사회에서 명예를 방어하기에 실패하였음을 의도적이지 않지만 공공연히 인정하는 꼴이 되고야 만다.
30. 누가는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 무사히 모면하였음을 간략하게 보고하고 있다. 누가는 예수가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였는지를 독자들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이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누가가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것은, 명예를 둘러싸고 벌어진 이러한 도전과 되받기의 게임은 앞으로도 계속하여 진행될 것임을 독자들이 예상하도록 이야기의 결말을 열어두고 있다. 앞으로 어떠한 상황이 전개될지 모르나, 예수가 다시 나사렛에 등장하면 후속편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누가는 한 편의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복음을 저술하고 있기에 우리는 후속편을 누가복음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부분이 우리에게 주는 암시는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를 한 사람의 기름 부음을 받은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인상이다. 따라서 그의 가족들도 이러한 고향 사람들의 인식과 맥을 같이 하여 등장하고 있다.
1.3. 명예와 수치 모델 사용의 열매
명예와 수치라는 모델을 통하여 우리가 도출한 시나리오가 어떤 점에서 다른 해석 방법과 차이가 있는가? 먼저 전반적인 이야기가 왜 흐르고 있으며, 어떻게 전개될지를 해석자가 예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예수의 선언이 단순한 자신의 신분과 사역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엘리트 계층이 차지하고 있던 사회적 공간에 들어가서, 대중적인 인정을 통해서 자신의 명예를 주장하고, 이 명예가 대중적으로 수여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회중은 그를 배척하였다. 이는 예수가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 선지자들의 운명을 따라서 등장하고 행동하며 사라질 것임을 암시하여 준다.
두 번째로 명예와 수치의 관점에서 나사렛 회당 기사를 읽을 때에, 우리는 누가는 잘 알고 있어서 언급할 필요는 없었지만, 21세기에 이 성경을 한국에서 읽는 우리에게는 명확하게 와 닿지 않는 바들을, 드러나게 하여 준다. 즉 행간(行間)을 읽되, 자의적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사회 문화적인 상상력을 통해서 사회-문화의 맥락 가운데서 그 상상력이 발휘 될 수 있는 해석적 여지를 마련하여 준다.
예를 들어서, 왜 이사야 문헌의 인용에 대하여 나사렛 사람들이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왜 대답하였으며, 다음으로 예수의 되받기에 대하여 왜 그토록 나사렛 사람들이 격분하였는지를, 이러한 문화적인 맥락에서 이해 할 때에 명확하게 드러난다. 예수가 나사렛 회당에서 인용한 이사야 구절은 이미 재해석되어 있다. 칠십인경의 이사야 61.1-2에서, 먼저 중요한 구문 “신원의 날” (h`me,ran avntapodo,sewj)을 누락하고, 다음으로 대신에 사 58.6의 “억눌린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려고”를 첨가하였다. 이에 대하여 몇몇 주석가들은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한 이유로서, 이스라엘을 괴롭힌 하나님의 대적에 대한 복수를 언급하지 않은 것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적 모델을 통해서 일을 때에, 우리는 예수가 이방인의 복수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고 신적 은혜의 보편성으로 짓눌러 버렸다고 해석할 필요가 없다. 명예를 위한 사회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복수의 날들에 대한 언급이 전혀 필요가 없다. 예수의 메시지 자체로도 당시 회중들에 대한 긍정적인 도전이 된다.
세 번째로 이 단락은 누가복음 전체의 구도에 있어서 중요한 단락이다. 다른 공관복음과 대조하여 볼 때에,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 왔다”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가 선포되기 시작하였음을 누락하고 있다. 대신에 누가는 이 나사렛 선언으로서 이를 대치하고 있다. 이사야 61.1-2는 바로 누가에게는 하나님 나라 복음의 선포이다. 즉 예수의 사역은 바로 이러한 선언에 따라서 진행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신원과 운명은 이 선언을 어떻게 충실하게 지키며 이행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나사렛 회당의 선언은 앞으로 누가복음을 읽는 독자가 과연 이 예수가 자신이 공적인 무대에 등장하며 밝힌 선언대로 사역을 하는 자인지를 지켜보아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는 독자들에게 명예로운 자인가? 아닌가를 판단받게 될 것이다. 후에 옥중에서 요한이 사자를 보내어서, 오실 이가 바로 당신이냐?고 물었을 때에, 예수는 이 나사렛 선언의 관점에서 자신의 신원과 활동을 설명한다 (7.22). 예수는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는 자로서, 자신의 신원과 사명을 진술한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는 사역자는 바로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에 명예를 존중하며, 그 사역에 충실한 자세가 필요하다. 나사렛 예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러한 자신의 사역의 길을 충실하게 걷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기름 부으심에 수반되는 명예를 존중하는 자세를 예수는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보였을 뿐만이 아니라, 그 생애 또한 그 기름 부으심에 충실하게 살았다.
2. 나사렛 회당 기사의 해석을 위한 보충적 주해.
명예와 수치 모델에 준하여 우리의 해석을 제한하여 본문을 읽으면서, 이 단락의 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본문주해 또는 논쟁들을 따로 모아서 언급할 필요가 있다. 먼저는 이사야 61.1-2의 인용이 가지고 있는 의미이고, 다음으로 “의원아! 너 자신을 고치라”는 속담의 의미이다. 그리고 일세기 유대인 회당에 관한 논쟁이다.
2.1. 사 61.1-2 인용문의 의미
먼저 본문을 문법적으로 대충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Luke)
Pneu/ma kuri,ou evpV evme,
ou- ei[neken e;crise,n me euvaggeli,sasqai ptwcoi/j(
avpe,stalke,n me( khru,xai aivcmalw,toij a;fesin
kai. tufloi/j avna,bleyin(
avpostei/lai teqrausme,nouj evn avfe,sei(
khru,xai evniauto.n kuri,ou dekto,n)
(LXX)
pneu/ma kuri,ou evpV evme,
ou- ei[neken e;crise,n me euvaggeli,sasqai ptwcoi/j
avpe,stalke,n me iva,sasqai tou.j suntetrimme,nouj th/| kardi,a| khru,xai aivcmalw,toij a;fesin
kai. tufloi/j avna,bleyin
kale,sai evniauto.n kuri,ou dekto.n
kai. h`me,ran avntapodo,sewj
이 본문에서 강조점은 일인칭과 자유하게 함에 주어져 있다. 누가 예수는 이 이사야 본문을 인용하여, 예수의 신분이 무엇이며, 공적인 사역이 무엇인지를 독자들로 하여금 예상하도록 만들고 있다. 먼저 이사야 본문은 분명히 예수를 가리키는 인칭 대명사에 강조점이 주어져 있다. 이는 예수가 이사야가 예언한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임을 드러낸다. 명예를 위해서 경쟁적인 투쟁을 벌이는 이 사회에서, 자신의 신분에 대한 강조는 분명히 일종의 긍정적인 명예에 대한 도전이다. 다음으로 누가 예수는 이사야 본문을 인용할 때에, 이미 재해석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하였다시피, 칠십인경의 이사야 61.1-2에서, 먼저 중요한 구문 “신원의 날” (h`me,ran avntapodo,sewj)을 누락하고, 다음으로 대신에 사 58.6의 “억눌린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려고”를 첨가하였다. 이러한 구조를 통하여 “자유하게 함” (a;fesin)이 강조로 놓여져 있다. 예수 자신의 주된 사명이 “자유하게 함”이라는 점을 문장 구조를 보아서 알 수 있다.
2.1.1. 복음이란 무엇인가?
나사렛 선언에서 인용된 “좋은 소식을 전한다” (euvaggeli,sasqai; 랍비의 רשׂב, buśśar)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차적으로 우리는 이 용어의 의미를 이사야의 문맥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복음을 표현 할 때에 이사야와 같이 동사를 주로 사용한다 (눅 10번; 행 15번; 명사는 행전에서만 2번). 특히 복음을 이사야 본문 중에서 사 61.1-2와 사 52.7에 근거하여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a. ‘복음 전파자’가 보냄을 받았었다 (4.18).
b. 그는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4.18). 이를 누가는 메시아적인 뜻으로 확실하게 이해하였다: 그리스도는 기쁨의 실제 메신저이다. 사 61.1 이하는 예수의 h-lqon 말씀을 위한 모델이자 합법화시켜주는 근거이다. 또한 “나는 다른 도시들에도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여야 하는데, 이는 내가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다” (4.43)는 진술도 또한 사 61.1 (또한 사 52.7)의 영향을 받고 있다.
c. 그 복음의 수신자들은 가난 한 자들, 불상한 자 (מיונע)들이다 (18절). 이들은 그들 스스로 또는 세상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자들이지만, 하나님께 그들의 모든 소망을 두고 있는 자들이다 (참조. 마 5.3).
d. 그 복음의 주제는 구속 (redemption)이며, 모든 메여있는 자들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해방시키시는 위대한 해의 시작이 선포되어 왔었기 때문이다 (4.19).
e. 누가는 메여 있는 자들을 해방시키는 것을 무엇보다도 연약한 자들의 기적적인 치유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으로 이해하였다. 눈 먼 자들의 시력 회복 (사 61.1 LXX)은 문자 그대로 의도되어진 것이다 (7.22). 바로 이 이유로 인하여 메시아적인 복음은 기적들에 의하여 성취될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이사야적인 맥락에서 복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통치의 핵심은 해방 (자유하게 함)에 있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이 명백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어서 활동을 한다 (참조. 나훔 1.15; LXX 2.1). 예언적 완료 화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보좌에 등극하심과 사탄에 대한 승리가 복음을 통해 선포된다. 특히 “너희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사 52.7은 시온을 향하여 메신저가 박력이 넘쳐나는 인상적인 소식을 전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무질서의 권세가 극복되었으며 (51.9), 통치자들이 이제 패배를 당하였다 (52.5). 또한 1QM 17.6 이하와 11QMelch 16에서 사 52.7과 61.1 이하와 더불어 선포되어졌던 멜기세덱 (=미가엘, 하늘의 의로운 왕)의 보좌 등극의 복음은 결정적인 승리 즉 벨리알의 삭탈 관직을 전제로 한다. 사 52.7의 기쁜 소식은 탈굼에서도 바로 이와 같이 재생되어졌다.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가 드러났다!” 이미 “복음”과 “나라” 사이의 연결 고리가 존재하였다. 따라서 복음은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실현되는데, 그 은혜의 수혜자들은 가난한 자들이며, 주요 내용은 해방이다.
2.1.2. 가난한 자는 누구인가?
눅 4.18을 비롯하여, 누가에게서 가난한 자들은 6.20, 7.22, 14.13, 14.21, 16.20, 22에 다른 종류의 불쌍한 자들이 함께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 불쌍한 부류의 사람들의 목록을 열거할 때에, 가난한 자는 맨 앞 또는 맨 뒤에 언급된다. 이는 가난한 자란 바로 이들을 포괄하는 대표적인 용어임을 알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 가난한 자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결핍을 경험하되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자들이다. 종교적으로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서 제외되었다 (레 21.16-24; 1QSa 2.5-7). 이들은 따라서 종교, 사회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회에서 사회적인 교류에서 항상 변두리에 처하여 있는 자이다. 사회의 주변부에서 전혀 어떠한 경제적, 종교적, 사회적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이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서, 그들을 묶고 있는 모든 결박으로부터 해방시켜서 자유하게 함이 바로 복음이다. 누가에게서 가난한 자란 경제, 종교, 사회적인 차원이 서로 얽히고 섥혀있는 사회적으로 주변부에 처한 자들이다.
2.2. “의원아! 너를 고치라” (VIatre,( qera,peuson seauto,n\)
그리스 고전 문학에서 이 표현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는 논증에 채택되어 사용된다: (a) 다른 이들에게 보이는 후의를 자신과 관련이 있는 자들에게 베풀기를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b) 자신과 관련된 자들에게 이로운 일을 베풀기를 거절하면서도, 다른 이들에게는 이득을 끼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Green 1997: 216-17). 이에 대한 탁월한 연구는 John Nolland와 S. J. Noorda의 글들이다. 이 속담은 Gen. Rab. 23. 4과 Plutarch, Moralia 32.71F에 기록되어 있다. 이 속담은 보복성 말대꾸나, 또는 모욕적인 말로 대부분 사용된다. 고대 사회에 의사는 현대 사회의 의사와는 달리, 위생적인 측면에서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환자를 치료하다가 의사 자신이 도리어 병에 감염되어 죽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보고 “아서라 이 사람아 너 자신이나 잘하지”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에 병행하는 표현을 복음서에서 찾을 수 있다면,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향하여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23.35)에서 찾을 수 있다.
누가 본문에서 이 용어는 “너 자신에게도 하지 못하는 것을 왜 남에게 제시하느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속담은 우리의 표현으로는 “너 꼴이나 알아라”는 뜻으로, ‘감히 네가 어디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네 신분에 맞는 말을 하라’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2.3. 1세기의 유대 회당
한 때 신약계에 괴연 1세기 팔레스타인에 유대회당이 건물로서 존재하였는가에 대한 논쟁이 뜨겁게 진행되었지만, 이제는 거의 대부분이 유대회당이 건물로서 존재하였다고 본다. 이에 대한 설득력이 있는 논증들이 전개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은 누가가 회당 예배를 묘사하고 있는 면이 이세기 이후의 유대회당 예배의 모습이라고 주장한데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의문의 이면에는 우리가 잘못된 회당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는데서 비롯되어 있다. 흔히 우리가 범하고 있는 오류는 유대 회당은 바리새파가 장악하고 있으며, 이는 제사장들이 관장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필적하는 종교적 기구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된 이해이다. 또한 회당은 율법을 가르치고, 성전은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역할이 구분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QEODOTOS . OUETTENOU . IEREUS . KAI
ARCISUNAGWGOS . UIOS . ARCISUN[AGW]-
G[O]U . UIONOS . ARCISUN[A]GWGOU . WKO-
DOMHSE . THN . SUNAGWG[H]N . EIS . AN[AG]NW-
S[I]N . NOMOU . KAI . EIS . [D]IDACHN . ENTOLWN KAI
TON . XENWNA . KA[I . TA] . DWMATA . KAI . TA . CRH-
S[T]HRIA . TWN . UDATWN . EIS . KATALUMA . TOI-
S . [C]RHZOUSIN . APO . THS . XE[N]HS . HN . EQEME-
L[IW]SAN . OI . PATERES . [A]UTOU . KAI . OI . PRE-
S[B]UTEROI . KAI . SIMWN[I]DHS 이러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 잡기에는 고고학적 증거를 하나만 들어도 충분하다. 일세기 당시 예루살렘 상류층이 살던 지역에 세워졌던 유대 회당의 비문으로 소위 데오도투스 비문이라고 부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번역을 할 수 있다.
“회당장의 아들이자 회당장의 손자이며, 제사장이자 회당장인 베타노스의 아들인 데오도투스는 토라의 읽기와 계명의 가르침을 위하여 회당을 세웠노라. 이 회당에 덧붙여서 절실히 필요한 유숙객들이 숙박하기 위하여 호스텔과 방들과 수도시설을 세웠다. 이 기초석은 그의 선조들과 장로들과 시몬인들에 의해 놓여졌다.”
이 비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회당이 제사장의 손으로 세워졌고 또 율법의 가르침과 읽기, 그리고 여행객들의 숙박을 위한 손 대접의 역할까지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회당은 성전과 밀접하게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회당은 중앙 성소인 예루살렘 성전의 부속 공간이다. 따라서 성전에 적용되던 대부분의 거룩한 법들이 이에도 적용된다.
3. 나사렛 선언 이후의 예수의 활동 (4.31-44)
앞으로 누가의 독자들이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있다. 이는 예수가 나사렛 회당에서 밝힌 자신의 신원과 사명에 과연 충실하게 사역을 하고 있는지 이다. 나사렛 선언과 그 회당에서 일어난 일은 앞으로 누가 복음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일종의 프로그램이다. 4.31-44에서 누가는 이사야가 예언하였던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신 예수가 그 선언에 충실하게 사역을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가르치는 사역 (4.31-32, 43)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이고, 귀신을 쫒아내는 축사 사역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하게 하는 사역이고, 병자를 고치는 치유 사역은 억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는 사역이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사역이 어떤 메시지를 전하여 주는지를 탐구할 차례이다.
3.1. 더러운 귀신을 쫒아내는 예수 (4.31-37)
이사야의 비전에 따라서 예수는 자신의 신원과 사명을 확인하고 선언하였다. 이사야는 무질서의 권세가 극복되고 (51.9), 세상의 통치자들이 패배하였으며 (52.5), 그에 따라 이제는 “주가 다스린다” (52.7)고 선언한다. 1QM 17.6 이하와 11QMelch 16에서는 사 52.7과 61.1 이하를 근거로 멜기세덱 (=미가엘, 하늘의 의로운 왕)이 보좌에 등극하였는데, 이는 복음이 벨리알의 관직을 삭탈하는 궁극적인 승리를 의미한다.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예수의 등장은 이미 사탄의 권세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이에 따라서 누가는 이사야의 예언에 따라 예수가 사탄의 권세를 이제 소탕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3.1.1. 먼저 일세기 당시의 귀신들림이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살펴보자.
일세기 지중해권 세계관에서, 모든 일의 인관과계는 일차적으로 인격적인 존재에 의해서 비롯되며, 인격체들과 인간 그리고 비인간적인 존재에 변화를 가져온다고 보았다. 일상적인 인간 사회 뿐 아니라 자연과 우주도 마찬가지로 어떤 인격체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아 움직인다. 인간의 통제 범위 밖에 있는 일들, 즉 기후 변화, 지진, 병, 풍요 등은 우주적 사회의 위계질서에 따라서 권세를 가지고 움직이는 비인간적인 인격체에 의해서 통제를 받는 받는다고 보았다. 다음과 같은 우주적인 위계질서가 확립되어 있다:
a. "우리" 하나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b. "다른" 하나님 도는 하나님의 아들들, 또는 천사장들
c. 직급이 낮은 비인간적인 인격체: 천사들, 영들, 귀신들
d. 인류
e. 인간 아래의 피조물들
귀신이나 부정한 영들은 인간 행위를 제어하는 능력을 가진 인격화된 세력들이다. 귀신들림을 비난하는 것은 인간의 통제 범위 밖에 있는 세력들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을 만들어 낸다는 신념에 기초하여 있다. 악이 선을 공격하면, 사람들은 학살을 당하는 것으로 예상하였다 (예. 눅 13.16). 귀신이 들린 자는 그 사회에서 정상이라고 간주하는 행동규범을 벗어난 일탈자들로 분류된다. 한 사회에서 일탈자는 설명이 요구된다. 하나님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귀신에 의한 것인지. 이는 일탈자들이 한 사회의 일상을 벗어날 경우에, 위협이 되는지 아니면 도움이 되는지를 파악하고, 위협이 될 경우는 추방 또는 격리하여야 하는 대상이다. 고대 사회에서 한 사회의 구성원이 물려받은 사회적 신분이나 역할을 하도록 예상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치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자들 (예를 들어 예수나 바울)은 수상하며 검증을 거쳐야 한다. 예수가 때로는 귀신이 들렸다는 비난을 받거나 (눅 11.15),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쫒아낸다는 비난은 이러한 사회적인 인식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귀신 들린 자를 자유하게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귀신이 더 이상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쫒아내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공동체에 있어야 할 자리로 그 사람을 회복하는 행위이다.
3.1.2. 본문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는 자인 예수는 권세가 있었다 (32절). 그 권세는 인간에서 비롯된 권세가 아님을 누가는 연이어서 주장하고 있다.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다 (33절). 안식일에 성전의 부속공간에 회당에 귀신들린 자가 있다는 사실은 당시 유대교가 어떤 상태에 있음을 주지시켜주는 일종의 표시이다. 예수는 귀신을 제압하는 권세를 졌다 (35절). 예수가 사탄의 권세보다는 우주적인 위계질서 상으로 더 높음을 명백하다. 나사렛 회당에서 선언된 예수의 신원과 사명이 다시 확증되었다. 그리고 가버나움의 구경꾼들이 이 광경을 보고 인정하였다. 예수의 주장된 명예는 확증되고 유지되었다.
그런데 귀신들은 인간들보다도 더 정확하게 예수의 신원을 알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증거를 받지 않았다. 예수는 단순히 능력을 행하는 축사자 (exorcist)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적인 세력의 인정과 찬사로 인하여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의 증거를 무시하였다. 대신에 예수는 가십 방송국에 의해 이러한 예수의 소문이 퍼져나가게 만들었다. 이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예수의 새로운 신분과 명예를 지역 공동체에 공지하는 역할이며, 다른 하나는 그 지역 공동체에 귀신들렸던 자의 신분과 지위를 사회적 회복하기 위함이다. 사탄의 권세에서 개인적으로 놓임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집단 중심의 사회에서 한 개인이 사회적인 인식에서도 자유로워져서 회복되는 것도 중요하다.
3.2. 병을 고치는 예수 (4.38-44)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 걸렸다. 예수께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장모가 일어나서 수종을 들었다 (38-39). 그리고 각색 병든 자들을 안수하여 고치고, 귀신들을 쫒아내셨다. 나사렛 선언의 프로그램을 따라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누가는 그리고 있다.
3.2.1. 고대 사회에서 의료 체계는 어떤가?
과학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 질병은 신체 기관의 오작동이며, 이는 적절한 생의학적 처리에 의해 고쳐질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병든 사람이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회복시키는데 주력한다. 그러나 고대사회에서는 건강과 병듦은 문화적으로 규정되어 있음을 잊어서는 시대착오적인 해석적 오류를 범한다.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 존재 (신분)를 행함 (기능) 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따라서 그 사회의 치유자들은 병 걸린 사람이 제대로 기능을 하는 것보다는 존귀한 가치를 지닌 상태로 회복하는데 주력하였다.
인류학자들은 의학적인 병 (disease)과 사회적인 질병 (illness)을 구별한다 (우리말은 뉘앙스가 분명하지 않다). 전자는 생의학적인 기능장애이고, 후자는 사회적 연결구조가 붕괴되고 의미를 상실하여 존재 자체가 무시당하는 상태이다. 질병은 의학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어서, 신채적인 원인이 아니라 사회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다. 질병은 사회적 규범과 가치로부터 일탈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현대 사회에서 문둥병은 기능장애에 해당하지만, 고대 팔레스타인에서는 그 사회에서 격리조치를 하여야 한다. 신체장애자들은 제단으로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레 21.16-24). 그러므로 신약에 언급되어 있는 것은 병이 아니라 질병, 즉 비정상적인 문화적인 인간 조건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병의 원인보다는 증상에 초점을 맞추어서 치료하였다.
3.2.2. 예수의 치유 사역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예수 당시에 직업적인 치유자들이 의사들이 신약이 빈번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마 2.17; 5.26; 눅 4.23; 8.43; 골 4.14), 비기독교 문헌에서는 대부분이 속담으로 흔히 인용되어 있다. 전통적인 치유자들은 농민들이 활용하기에 좀 더 용이하였다. 예수는 성령으로 충만한 선지자로서, 더러운 귀신들과 다양한 병들을 소멸하시고 사람들을 공동체로 회복하였다. 이러한 정통적인 치유자들은 모든 증상을 중요하게 받아들였고 (예. 눅 8.26-33), 증상과 신념 체계 사에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눅 13.16). 한 사람의 삶의 의미를 다시 회복하여 초점을 맞추는 것은 진정한 회개이고 당시 사회에서 사회적인 질병 치유에 본질적이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서 치유되고, 회복되어 수종을 드는 것은 예수 사역에 있어서 치유 사역이 가지는 의미의 파라다임이다.
나가는 말
예수의 나사렛 회당 기사와 이에 뒤따르는 일련의 활동을 상고하였다. 눅 4.16 이하의 나사렛 선언은 예수의 신원과 사명에 대한 선언이다. 누가의 독자들은 이 선언을 근거로 예수의 신원과 사명을 평가하도록 요청을 받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 이사야가 예언하였던 종말론적인 해방과 회복을 위한 사명을 수행하신다. 예수가 이스라엘의 예언적 전통 속에서 이렇게 존귀한 신분과 직임을 맡은 자라고 선언하는 것은 명예에 대한 일종의 긍정적인 도전이다. 이에 대한 되받기는 당연히 예상되지만, 나사렛 회당의 기사는 치열하게 경쟁적인 도전과 되받기가 역동적으로 전개되었고, 또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또한 예수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될지도 독자로 하여금 예상하도록 만든다.
그 뒤따르는 기사들은 예수가 과연 이러한 자신의 선언에 걸맞게 사명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장면이다. 예수는 이사야 61.1-2의 프로그램에 따라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쫒아 내시며, 병에 걸린 자들을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 속에 다시 회복시키는 사역을 계속하여 능력 있게 진행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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