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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이 나봇의 포도원이라도 됩니까?

משׁה 2010. 3. 16. 22:38

양화진이 나봇의 포도원이라도 됩니까?

임희국 장신대 교수께 드리는 공개편지

 

 

 

 

건전한 비판의 대전제

안녕하십니까. 임희국 교수님께서 지난 2월 25일자 <기독공보>에 기고하신 '기독교 유적지 법적 보호해야 할 때'라는 칼럼을 읽고 공개편지를 드립니다. 저는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담임목사 이재철, 이하 100주년기념교회)가 설립한 양화진문화원의 지강유철 선임 연구원입니다. 뵌 적은 없지만 지인들 가운데 장신대, 문화선교연구원, 공정무역기독인연합 등에서 임 교수님과 교제를 나누는 분들이 적지 않은지라 공개편지를 쓰겠다고 마음먹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기로 마음을 굳힌 것은, 임 교수님이 칼럼에서 언급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양화진)에 대한 주장이 사실과 너무 다르다는 점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식의 이중 잣대에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대해선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습니다.

임 교수님께서 신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학자가 아니라,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이사장 강병훈 목사, 이하 협의회)와 100주년기념교회를 향해 '지라시' 수준의 성명서·공문·칼럼 따위를 남발해 온 분이었다면 저는 공개편지를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임 교수님께 받은 충격과 실망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순간일지라도 저는 제 비판이 임 교수님의 칼럼을 벗어나 인격을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형제라는 사실보다 비판이 앞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양화진 출입이 통제된다'는 황당한 주장

임 교수님은 '원희룡 의원 초청 기독교 유적지 보존 및 관리를 위한 입법 청원 간담회'에서 기독교 유적지가 합법적으로 관리되지 못할 뿐 아니라 사유화되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난 2월 16일의 일이었지요. 2월 25일자 <기독공보> 칼럼에서 다시 이 문제로 글을 쓰셨습니다. "교회가 기독교 사적지에 대한 무관심에서 벗어나려면 소위 양화진 사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로 특정 교회가 양화진을 독점하며 순례객을 통제하고 있다고 주장하셨습니다만, 양화진 사태에 관심을 기울이면 다른 기독교 사적지들에 자동적으로 눈길이 간다는 임 교수님의 말씀에 저는 선뜻 머리를 조아릴 수가 없군요. 쉽게 입증이 가능한 이야기란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지요. 임 교수님의 이 발언은, "양화진 묘지를 3년째 방문하지 못하고 있으니 선교사 후손들이 묘지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주문한 인요한 박사와 피터 언더우드 씨의 요구만큼이나 제게는 황당하고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칼럼이 역사를 가르치는 신학대학 교수님이 쓰신 게 맞나 싶었습니다. 

70세를 넘긴 이만열 교수님은 2008년 6월 말 새벽 2시에 촛불 현장을 둘러보시고는 이런 칼럼을 남겼지요. "어느 방송의 속보를 듣고 비를 무릅쓰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시위 현장으로 갔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의 증인 의식 때문일까. 빗물에 질척거리는 광화문 네거리의 황량한 모습은 마치 전투를 치른 현장 같았다." (이만열, '공권력 정상화', <경향신문> 2008년 7월 1일자)

저는 임 교수님이 '양화진 사태'라고 명명하신 사건의 양측 주장이나 기독 언론의 보도를 챙겨 보시고 이번 칼럼을 쓰셨는지 궁금합니다. 한국 교회 성도들이 양화진을 어떻게 참배하고 순례하는지 한 번이라도 보셨다면 그런 칼럼이 나올 수 없지 싶습니다. 양화진은 1년 365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다만, 주일, 1월 1일, 12월 25일, 설, 추석에는 방문은 가능하지만, 100주년기념교회의 공식 가이드에게 안내받을 수는 없습니다.

통합을 비롯한 마포교구협의회 등에서는 주일에 왜 방문을 허용하지 않느냐고 불만입니다만, 양화진의 안내 봉사자들은 모두 100주년기념교회 교우들입니다. 때문에 주일에 양화진을 열라는 주문은 주일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야기입니다. 아니면 안 믿는 사람들에게 월급을 지급해서라도 봉사자를 세우라는 뜻이거나.

   
 
  ▲ 100주년기념교회가 양화진을 관리하기 전(좌)과 후의 비교 사진. (사진 제공 양화진문화원)  
 
16만을 넘긴 양화진 참배객

세계 여러 나라나 지방 자치 단체에서 운영하는 박물관이나 묘지공원이 법정 공휴일에까지 열지 않습니다.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외국인묘지는 토요일 하루만 개장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양화진은 일주일에 엿새를 개장합니다. 법정 공휴일도 모두 쉬는 게 아닙니다.

100주년기념교회 교우들은 명절이나 1년에 한 번 열리는 전교인 운동회('100 Togerther!')에도 참석치 못하며 참배객들을 맞습니다. 이렇게 양화진에서 희생적으로 자원봉사를 하는 교우들이 한 주간에 500여 명이나 됩니다. 100주년기념교회에서는 선교사 후손 및 그 유가족들이 양화진을 오시겠다고 하면 시간에 관계없이 모시고 있습니다. 주차 걱정? 당연히 안 하셔도 됩니다.

100주년기념교회가 관리를 시작한 2005년 7월 이후부터 2010년 3월 5일 현재까지 16만 878명의 참배객이 다녀갔습니다. 양화진이 통제되고 있다는 임 교수님의 주장과 달리 100주년기념교회가 양화진을 관리하기 시작한 이후로 참배객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습니다. 2006년에 1,916명으로 집계되었던 참배객은 2007년에는 2만 4,078명, 2008년에는 5만 4,194명으로 뛰더니, 2009년에는 6만 8,014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숫자에 100주년기념교회와 무관하게 일정 금액을 받고 안내를 하는 '양화진선교회' 및 다른 사설 단체들의 참배객 통계는 포함되지 않습니다(100주년기념교회와 무관한 사설 기관인 '양화진선교회'는 단체 참배객들을 안내해 주면 인원에 상관없이 3만 원을 예약금으로 받습니다).

   
 
  ▲ 서거 60주기를 맞아 양화진을 방문한 헐버트 손자 내외(위)와 서거 100주기를 맞아 양화진을 방문한 스크랜튼 후손 및 이대, 상동교회, 아현교회, 동대문교회 교인들. (사진 제공 양화진문화원)  
 
임 교수님은 100주년기념교회가 참배객을 무료로 안내하기 시작한 지 4년이 채 안 된 현시점까지 '양화진선교회'가 한쪽 귀퉁이에서 돈을 받고 안내를 계속하는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아직도 양화진이 통제되고 있다고 보시는지요? 선교사 후손의 양화진 출입이 통제된다는 말은 관리를 맡은 100주년기념교회, 특히 자원봉사자들에 대한 모독입니다. 선교사 후손의 통제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009년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역사학자이시니 헐버트 박사의 손자 내외가 양화진에서 서거 60주년 추모식(2009. 8. 5)을 가진 것이나 스크랜턴의 후손들과 이화여대 및 상동교회, 아현교회, 동대문교회가 100주년 추모식(2009. 10. 8)을 거행한 사실을 모르지 않으실 겁니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기 때문에 협의회가 오로지 선교사 묘역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걸 방증하는 것이 미8군부사령관의 양화진 방문이 되겠지요. 미8군부사령관은 지난해 11월 9일에 100여 기가 넘는 미군 및 관련 유가족 묘역을 일일이 돌아보며 참배를 하였습니다. 한미친선연합회가 2009년 9월 21일부터 10월 1일까지 미군 묘역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난 후의 일이었지요.

자승자박이 된 인요한 씨의 국무총리실 감사 요청

임 교수님이 주장한 양화진의 사유화도 사실과 크게 다릅니다. 이곳이 은닉 국유재산이기 때문에 법적 소유권이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에 있지 않다며, '양화진선교회'의 신호철·경성구미인묘지회·피터 언더우드(원한석)·서울 유니온교회 등에서 제기했던 여섯 차례의 고소, 고발 건은 검찰과 법원에서 모두 사실무근으로 드러났습니다. 의지만 있다면 이런 사실은 누구든 법원이나 검찰청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이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요한 박사는, 양화진이 국유지이므로 유니온교회가 사용권을 가지고 예배를 보게 해야 하며, 협의회는 외국인의 매장을 허락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게 한다며 국무총리실에 감사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국무총리실의 감사는 자승자박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2007년 9월 3일에 있던 감사 결과가, 양화진은 국유지가 아니며, 선교기념관을 유니온교회가 교회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관련법상 불가능하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외국인의 추가 매장 또한 양화진이 '장사 등에 관한 법률'상 묘지 설치 제한 지역일 뿐 아니라 동법 14조상의 주거 지역에 해당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에비슨 선교사의 손녀를 양화진에 묻게 해달라는 연세대학교의 요청이 수차례에 걸쳐 있었고, 피터 언더우드 씨는 2007년 8월 5일 KBS 1TV의 9시 뉴스 인터뷰와 인터넷 언론 <뉴스파워>, 그리고 지난 2월 16일에 있었던 기독교 유적지 입법 청원 간담회에서 매장을 거듭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협의회는 그 소망을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현행법을 위반하지 않고서는 들어줄 수 있는 요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끈질긴 미국 선교사 후손들의 고소

예장 통합이 크게 오해하거나 애써 외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협의회는 어느 날 아침에 하늘에서 영감을 받아서 100주년기념교회를 창립한 것이 아닙니다. 훼손되는 양화진을 우두커니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형편을 타계하기 위해 협의회는 양화진과 용인 순교자기념관을 관리하고 유지하기 위해 차례로 새문안교회, 영락교회, 정동교회, 온누리교회를 찾아다니며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나름 한국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네 교회는, 개교회로서는 벅찬 일이라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100주년기념교회는 그런 우여곡절 끝에 창립된 것입니다.

임희국 교수님이 역사 선생님이시니 여쭙겠습니다. 작년에 작고하신 협의회의 정진경 이사장님이나 상임이사 김경래 장로님은 모두 80세를 넘긴 분들입니다. 주님을 위해 평생을 단아하게 헌신한 분들이시지요. 그런데 100주년기념교회로부터 쫓겨났다는 유니온교회, 그리고 명의신탁을 했기 때문에 양화진의 소유주는 협의회가 아니라고 주장을 했던 피터 언더우드 씨는 이 고령의 한국교회의 원로들에게 끝내 수갑을 채우겠다는 심산으로 검찰과 법원에 거듭거듭 고소를 했습니다. 세계의 선교 역사에 과연 이런 일이 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국가가 선교사들을 추방, 투옥, 고문, 사형시켰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선교사 후손이 선교지의 교계 원로를 감옥에 처넣어 달라고 형사고소를 남발한 경우가 또 있었습니까.

나봇의 포도원이 된 양화진

양화진이 "무분별하게 훼손"되고 있다는 주장도 터무니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100주년기념교회가 양화진 홍보관을 건축하기 위해 사용한 40여 억은 차치하고라도 양화진 묘역의 정비와 안내 봉사, 선교기념관의 보수, 그리고 양화진 역사 발굴 등을 위해 설립한 양화진연구원(2010년 현재 양화진문화원으로 확대 개편)을 위해 또 40여 억이 지출되었습니다. 통합 교단은 양화진이 이처럼 아름답게 합법적 관리 체계를 갖추고 있는 마당에 칭찬과 격려는 못할망정 왜 근거 없는 비방을 계속하는 것입니까?

수십 년 동안 방치되던 양화진이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참배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자 배가 아팠거나 양화진을 가로채고 싶어 욕심이 동했던 것은 아닌가요. 저는 평생 기독교 역사, 그것도 다리를 절면서 열 교회를 세운 김수만 장로나 봉경 이원영 목사와 같은 한국 교회사의 숨은 보배들을 세상에 알리는 데 일익을 담당한 임 교수님께서 어떻게 한쪽 주장만을 근거로 이런 칼럼을 쓰게 되셨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안타깝고 답답합니다.

양화진 문제에 대한 예장 통합의 이중 잣대

임 교수님의 칼럼에서 제가 받은 가장 큰 충격은 임 교수님께서 양화진과 통합 교단에 대해 각기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계신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을 것이라 생각지는 않습니다만, 분명 임 교수님께서는 예장 통합 교단이 기독교 유적지에 대해 저질렀던 과오에 지나치게 관대하셨거나 눈을 감았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종로구 연지동은 1894년에 복음이 들어 온 장로교가 연동교회, 경신학교, 정신여학교를 시작한 곳입니다. 연지동 언덕 일대의 2만 3,000평에는 연지동교회, 경신학교와 정신학교의 양옥 건물, 선교사 사택 등이 아름다운 경관을 뽐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랬던 연지동이 한국전쟁 이후 어떻게 변했던가요. 연지동 1번지 일대 6,000여 평의 땅 위에 세워졌던 경신학교가 해방 전에 체신부로 넘어갔다고 하지만, 전쟁 직후까지 멀쩡했던 정신여고 건물과 선교사 사택 여덟 채, 그리고 20여 채의 부속 건물들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모두 헐려 나가는 수난을 당했지요.

지금 연강홀이 있던 자리의 200여 평 땅은 예장 선교부 소유였으나 전쟁 후 개인 소유로 넘어갔습니다. 주변에 세워졌던 기독교 유적들은 기독교연합회관을 짓거나, 정신여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그리고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을 건축하면서 마구 헐려 나갔습니다. 특히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밀집해 있던 연지동에서 유일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사택이었던 '딕시'는 통합 총회가 여전도회관을 짓기 위해 헐었습니다. 지금 한국 장로교의 모태와 같았던 연지동에 초기 역사를 간직한 기독교 유적이 얼마나 남아 있습니까. 정신여고 본관으로 사용하던 세브란스관과 현재 장로교출판사가 사용하는 선교사 숙소 한 채, 그리고 500년 수령의 회화나무 고목들이 전부입니다.

기독교 유적지 공동 관리, 통합부터 나서야

이덕주 교수님이 쓰신 <종로 선교 이야기>를 보니 장로교출판사가 사용하고 있는 선교사 숙소 건물은 문화재로 지정되는 것이 마땅하나 통합 교단에서 재산권 행사나 활용에 불편할 것이란 이유로 소극적이더군요.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난 수십 년 동안 통합은 장로교 성지와 다를 바 없는 기독교 유적지들을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 분명합니다. 초기 한국 기독교를 온 몸으로 증언하던 경신학교와 정신여학교, 그리고 선교사들의 흔적을 고이 간직한 건물들을 헐어버리고 그 위에 교단 소유의 건물을 지어 수익 사업을 계속해 한 것이지요. 그랬던 예장 통합이 100주년기념교회에게 무슨 낯으로 양화진 사유화를 운운합니까. 양화진이 현행법과 세계적 표준에 맞게 체계를 갖춰 나가는 것으로부터 배울 생각은 못할망정 헐뜯고만 있으니 답답합니다.

임 교수님께서 칼럼에서도 언급했듯이 예장 통합 총회는 2009년에 척곡교회, 두동교회, 지리산기독교선교사적지 등을 사적지로 정했습니다. 통합이 양화진에 적용한 논리에 따르자면, 척곡교회, 두동교회, 지리산기독교선교사적지는 한국교회의 공동 유산입니다. 그런데 이 유적지들이 누구 소유로 되어 있습니까. 지리산기독교선교사적지는 서울대, 봉화 척곡교회는 영주노회 유지재단, 익산의 두동교회는 두동교회 재단이 소유주가 아니던가요. 예장 통합이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비난을 면하려면, 이 사적지들을 각 교단에서 파송한 대표들로 구성한 재단법인에 그 소유권을 넘겨야 맞습니다. 통합 교단은 세 유적지를 한국교회 공동 유산으로 관리하기 위해 현재 어떤 절차를 밟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교회 이름 바꾸라는 통합의 오만

저는 한국교회가 모든 교단으로부터 대표를 파송 받아 그 유산을 공동 관리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유·무형의 문화재나 사적지는 아니나 한국교회가 공동으로 관리한 게 하나 있기는 합니다. 찬송가가 바로 그것이지요. 비록 교단이 쪼개질 때는 찬송가도 각기 만들어 사용을 했습니다만 1983년 이후 한국교회는 공동으로 찬송가 관리를 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찬송가가 제대로 관리되었던가요? 그 대답은 NO!입니다. 이번 <새찬송가>의 경우도 이권 때문에 대한기독교서회와 장로교출판사가 한 팀이 되어 다른 기독교 출판사들과 싸우더니, 나중엔 교단장까지 가세한 싸움판으로 확대되었었지요. 고소와 맞고소가 줄을 이었고, 찬송가공회는 수십 년 동안 세금을 탈세한 것이 드러나 국세청으로부터 8억여 원이 넘는 돈을 추징당했습니다. 이렇게 운영에서 심각한 문제가 노출되자 찬송가공회는 재단법인을 급히 만들었습니다.

교단을 대표하는 분은 아니지만 임 교수님께 묻고 싶습니다. 예장 통합은 합법적으로 잘 관리되고 있는 양화진에 대한 협의회의 재산권조차 인정하지 않으면서 공동 관리를 운운하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작년 6월 5일 예장 총회가 협의회에 보낸 공문은 양화진의 관리를 "한국교회 전체가 연합하여 공동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다른 속셈 때문에 "행정적, 재정적인 기초를 마련하여 책임 있게 관리하겠다"는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늘어놓은 게 아니냐는 말입니다.

예장 통합은 지난해 협의회에 공문을 보내 100주년기념교회를 다른 장소로 옮기라느니, 이름을 바꾸라느니 하는 간섭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걸 보면서 참담했습니다. 아무리 양화진이 탐이 나도 그렇지, 어떻게 한국을 대표하는 교단이라고 하면서 100주년기념교회를 향해 간판을 다시 달라는 공문을 보낼 수 있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 길게 거론하는 것조차 기품을 잃는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예장 통합이 100주년기념교회 이름을 변경하라고 했으니 저도 한마디 거들겠습니다. 통합 교단은 왜 교단 소속의 건물에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까. 언제, 누가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이라는 이름을 써도 좋다는 허락을 해 줬습니까.

예장 통합의 아직도 계속되는 이재철 목사 죽이기

이재철 목사님의 면직 건에 대해서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이재철 목사님은 대한민국 헌법 21조가 보장하는 '결사의 자유'에 따라 교단을 탈퇴했습니다. 여기서의 결사의 자유가 개개인의 단체 결성은 물론 단체의 가입·잔류·탈퇴의 자유 등이 포함된 개념이라는 것은 헌법학계의 통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서노회 재판국은 이미 교단 소속이 아니라 재판 관할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재철 목사님의 궐석 재판을 강행했습니다. 명백한 원인 무효의 재판이었지요.

서울서노회는 교단 헌법 시행 규칙 88조도 잘못 적용했습니다. 재판국의 재판에 계류 중에 있지 않는 항존직원이 교단 탈퇴서를 제출하면 헌법 권징 제5조 제1항 제7호에 의거 권고 사직된 것으로 봐야 함에도 이를 어긴 겁니다. 재판 계류는커녕 기소조차 안 된 이재철 목사님을 재판했으니 이 또한 원인 무효의 재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장 통합은 반성은커녕 사사건건 이재철 목사님의 목회를 치졸하게 방해하고 있습니다. 작년 10월, 이재철 목사님은 사랑의교회 대각성집회에서 설교할 계획이었습니다. 9월 말까지 주보와 영상 뉴스로 이재철 목사님의 대각성 집회를 홍보했고, 설교 본문까지 받아 놓았던 사랑의교회가 돌연 강사를 교체했습니다. 두바이한인교회(목사 신철범)가 지난 해 11월에 창립 30주년 기념 예배 초청 강사로 이재철 목사님을 부르자 통합 총회는 또 다시 총회장 명의의 공문을 보내 재고를 압박했지요. 지난 1월 8일에는 지용수 총회장 이름으로 20개 교단에 공문을 보내 이재철 목사의 면직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을 '이재철 씨'라고 호칭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목회 방해는 지난 3월 1일로 예정되었던 모 여성 구국기도회의 설교자였던 이재철 목사님과 선교기념관으로 예정된 기도회 장소도 못 쓰게 만들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시아스포츠선교회의 요청으로 4월 22일에 예정되어 있던 양화진 1일 방문 집회도 같은 이유로 무산되었습니다.

   
 
  ▲ 예장통합이 지난해 11월 두바이한인교회에 공문을 보내 "예장통합 교단에서 이 씨가 설교하거나 강의하면 교단 질서가 혼란해지기 때문에 강사 섭외를 재고하라"고 했다.  
 
저는 통합 교단에 소속된 임 교수님과 뜻을 가진 신실한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이런 보도나 이야기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내 문제가 아니라 관심이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교단지가 제공해 주는 정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몸에 배어서 지적 반성의 촉수가 무뎌진 것입니까.

임희국 교수에게 거는 기대

이 공개편지를 통해 거론한 문제들, 이를테면, 양화진 문제나, 이재철 목사의 이단 규정 시도나, 목사 면직 등의 문제들은 단순히 100주년기념교회만이 아니라 양심 있는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예의주시하고 있는 문제라 믿고 있습니다. 간곡하게 바라기는 장차 목사가 될 신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시고, 총회의 역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실 뿐 아니라 한국교회사학회 회장으로 섬기시는 임 교수님께서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잘못된 판단과 기품 잃은 처사를 계속하는 예장 통합 총회를 바로 잡아주십시오. 아울러 목사님이기도 하시니 목자의 가슴으로 저 뿐만 아니라 이 문제로 상처받고 고통 받는 성도들에게 무엇이 진실인지를 밝혀 주십시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지강유철 / 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장기려, 그 사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