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선지자의 비전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65:17-25을 1:2-9과 11:1-9과 더불어 읽기를 위한 시도
1) 최만수 교수(계약신학대학원대학교)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은 창조주 하나님의 신-왕적 통치와 하나님의 나라(메시야 왕국)의 도래를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새 하늘과 새 땅”의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이사야서에서 유일하게 나타난다(65:17, 그리고 66:22). 이로 인하여 이사야서 안에서 보다는 밖에서의 이해 즉 창세기 1-2장의 창조와 혹은 요한 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 천년왕국 개념(21:1-5)과의 비교를 하거나, 혹은 현실적인 문제 - 사회정의 혹은 채식주의 등 -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관심에서 집중되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이해와 해석 이전에 주전 8세기의 역사적인 상황에서 살았던 이사야 선지자의 비전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65:17과 66:22)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조명이 필요하다. 게다가 “새 하늘과 새 땅” 본문인 사 65:17-23은 하나님의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심이 드러나는 사1:2-9의 결론적인 위치에 존재하고, 또한 메시야 본문인 사 11:1-9의 “메시야 나라의 모습”(6-9절)을 사 65:25절에서도 제시하고 있음을 고려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사 65:17-25절)은 이사야 선지자의 비전임을 그 내용과 구조에서 살피고, 그리고 난 후, 사 65:17-25가 하나님의 신적-왕이심을 보여주는 1:2-9와 그리고 메시야와 그의 나라를 보여는 11:1-9를 함께 읽을 수 있음을 나타내고자 한다.
Ⅰ. 이사야의 비전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
1. 이사야의 비전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이사야 65:17-25)은 이사야 선지자가 받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신-왕적)통치와 그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선포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은 주전 8세기의 예루살렘에 거하였던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의 말씀이다. 본문의 저자가 주전 8세기 예루살렘의 이사야라는 사실은 이사야서의 표제(superscription)에서 분명해진다. 일반적으로 표제는 구약 선지서에서 누가 저자인지를 알려주는 분명한 표식이다. 예레미야, 아모스, 요나 학개, 스가랴 등은 그 분명한 예들이다. 이사야서 1장 1절: “유다와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에서 이사야서 전체를 주전 8세기 이사야 선지자가 본 “이상”의 책으로 분명히 못 박고 있다. 그래서 표제를 통하여 알 수 있는 바는 8세기 중반에서 7세기 초반에 유다를 통치한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의시기에 활동한 선지자 이사야가 전체 이사야서의 저자임을 알려 주고 있다.
그런 연유로 65:17-25절에서의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이 이사야 선지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히 한다. 65:25절에서 “여호와의 말이니라”(hw")hy> rm:ïa')는 표현을 통하여 본문의 “새 하늘과 새 땅”이 전형적인 선지자의 예언적 선포(Prophetic Proclamation) 형식임을 나타낸다. 게다가 선지자의 이름은 이사야 40장 이후에서부터 계속적으로 언급이 되지 않음으로 인하여 사 1-39장에서 소개된 선지자 이사야의 이름과 예언은 그대로 사용되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이사야가 바라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초점을 두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가 바라보는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이사야(Why"å[.v;(y>)라는 이름에서처럼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그래서 이사야는 여호와가 온 세상의 주권자로서 창조자이시고, 신적인 왕이시면, 거룩하신 분이심을 보여준다.
먼저,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창조자이심을 선포한다. 이사야는 4:2-6절까지의 시온의 영광스러운 구원을 선포한 종말론적 메시지에서 시온의 구원의 날이 곧 창조의 날과 같음을 암시한다. 즉 하나님의 심판 후에 이스라엘은 새로운 창조를 경험하고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난다(3,4절). 더욱 분명히 29:15-16절에서는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조성자로서 토기장이요, 지은 자이며 빚은 자로서 형상화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삶을 살아갈 힘을 주시며(40:12-31절) 장래에 이루어질 새로운 일을 창조하여 주신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창조주이심을 알리고 있다. 65:17에서 사용된 arE²Ab는 arb의 현재 분사형으로 17-19절까지 에서는 3번 반복적으로 사용이 되었다. 이 arb는 창 1:1(`#r<a'(h' taeîw> ~yIm:ßV'h; taeî ~yhi_l{a/ ar"äB' tyviÞarEB.)에서 하나님의 “하늘과 땅”의 창조하심에서도 사용이 되었던 것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주어로 가진다. “창조하다”라는 히브리어 바라(ar;B)는 하나님만을 주어로 하는 단어로 “여호와는 천지창조의 창조자”이심을 나타낸다.
둘째로,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를 신적인 왕으로 나타낸다. 이는 곳 여호와가 우주적인 통치자이심을 뜻하는 것이다. 왕이란 단어는 이사야서에서 대략 77번 정도 사용되어진다. 이 용어는 첫 부분(1-39장)에서 63번, 둘째부분(40-55)에서 8번,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6번 사용되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지상의 인간 왕에게 사용되었지만, 첫 부분에서는 몇몇 부분만 여호와를 왕으로 명시하고(6:5; 24:23; 33:17, 22), 둘째 부분에서는 세 번 사용하였다(43:15; 44:6; 52:7). 하지만 이는 이사야서에서 전체를 통하여 여호와가 우주적인 통치자이심으로 신학적인 통일성을 주고 있다.
비록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에서는 ‘왕’이란 직위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주도적인” 창조를 강조한다. 이 창조의 주어가 일인칭 단수(내가)에서 분명해 진다. 게다가 일인칭 단수는 66:22절에서는 인칭대명사 (ynIïa])를 통하여 강조적으로 사용이 되고 있다.
hv'_d"x] #r<a'äw" ~yviÞd"x] ~yIm:ïv' arE²Ab ynIïn>hi-yKi('
yn:ßp'l. ~ydIîm.[o hf,²[o ynIïa] rv,'a] hv'ød"x]h; #r<a''h'w> ~yvid"x\h;û ~yIm:åV'h; rv<åa]k; yK
또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자의 모습을 나타내는 24절에서 역시 여호와 하나님의 표현이 일인칭으로 사용되고 그 모습은 왕의 모습과 같은 백성을 듣고 돌보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셋째로,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거룩하심을 선포한다. “거룩한”(v/dq])이란 단어는 레위기, 시편 그리고 이사야에서 흔히 나타나는 단어이다. 이사야에서는 다른 성경에서 보다도 더욱 이 용어가 많이 나타나는데 35번 중에서 27번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laer;c]yI v/dq])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이 용어는 이사야서에서 독특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서 완전히 구별된 존재이심을 보여주고 이사야 선지자가 처음 여호와를 만났을 때를 묘사해 주고 있는 소명장(6장)에서 신적인 존재들인 스랍들은 서로에게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6:3)라고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소리 높여 부르짖는다. 더욱이 60장 9절에서 해변의 나라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회복된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룩하신 여호와의 거룩하심을 경배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곧 세상의 존재와는 완전히 구별된 거룩한 분이기에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구속자이며 참 신이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은 ‘하나님의 본성’에 강조를 두고 있다. 사 65:17에서 arb와 함께 주어지는 하늘과 땅의 ~yviÞd"x]란 이미지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본성에 뿌리를 두고,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새롭게 하시는 그리고 새로움을 시작하시는 분임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사용이 된다. 그래서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의 창조는 거룩한 하나님의 창조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은 이사야가 고대하는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여준다.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은 주전 701년에 있었던 앗수르의 왕 산헤립의 남 왕국 유다 침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야할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때의 모습을 1:7-9에 다음과 같이 이사야는 묘사하고 있다.
(7)너희 땅은 황무하였고 너희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 토지는 너희 목전에 이방인에게 삼키웠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무하였고 (8)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원두밭의 상직막 같이, 에워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 (9)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이와 같은 이사야의 역사적 인식은 이사야서 전체의 구성에서 잘 이해되어 진다. 이사야서의 서언(prologue)의 역할을 하고 있는 1-5장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과 동시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징계를 받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더욱이 1:1절의 표제에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사역이 웃시야 왕에서부터 시작하여 히스기야 왕까지 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사야는 6장에서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것을 알리고 있다. 살아남은 남은 자가 새로운 이스라엘을 형성할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전체 이사야서의 반환점인 36-39장까지의 기록이 히스기야 왕과 관련된 일 곧 앗수르와의 전쟁과 히스기야 왕의 병듦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사야서는 701년의 히스기야 시대에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러면 주전 701년의 히스기야 왕 시대의 사건은 무엇인가? 이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공이 있었다. 아하스 왕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된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죽고 산헤립이 왕이 되었을 때에 애굽의 후원을 가지고 두로, 아스글론, 그리고 에글론과 더불어 앗수르에 대항을 한다(대하 32:5). 그러나 주전 701년 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수르의 왕 산헤립은 라기스를 점령하였고 예루살렘에는 랍사게를 보내어 항복을 요구한다(대하 32:9-10). 이때 히스기야는 산헤립에게 화해를 요청하면서 은 3백과 금 30달란트를 주고 성전의 문과 기둥에 입힌 금까지도 모두 벗겨 보낸다(왕하 18: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헤립은 46개의 성들과 촌락들을 점령을 하고 2십만 일백 50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때에 하나님의 특별하심 도움으로 앗수르의 18만 5천명이 죽고 산헤립 왕이 예루살렘에서 물러갔다(왕하 19:29-31, 34).
이사야 시대의 예루살렘의 모습은 완전히 변하여 새로운 자태를 가지게 될 것이다. 65:17-25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는 하나님께서 기존의 하늘과 땅을 완전히 그리고 기적적으로 변화시키는 “새로운” 창조이다. 여기서, 새로움이란 이전의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을 의미한다. 65:17에서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ble(-l[; hn"yl,Þ[]t; al{ïw> tAnëvoarIåh' 'hn"r>k;'Z"ti al{Üw>)”하는 상태인 것이다. 18절에서 새로운 창조를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다(d[;ê-ydE[] 'WlygI'w> WfyfiÛ-~ai-yKi(). 게다가 이와 같은 새 창조는 마치 창 1-2장의 창조처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즉 하나님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존재로 바뀌어 있음을 보여준다(18b`fAf)m' HM'î[;w> hl'ÞyGI ~Øil;²v'Wry>-ta, arEóAb ynI"n>h). 게다가 새 창조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하나님의 성산으로(yviÞd>q' rh:ï-lk'B.) 곧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왕국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2:1-4를 참조).
2. 이사야 65:17-25의 위치와 구조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이 하나님의 신-왕적 통치와 그의 나라로서 예루살렘에 대한 비전이라는 것은 이사야 65:17-25의 이사야서에서의 위치와 본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구조에서 잘 나타난다.
1) 이사야 65:17-25의 위치
이사야 65:17-25는 전체 이사야서의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이라는 주제의 결론 부분에 해당하는 65-66장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65-66장은 선지자 이사야가 그의 비전속에서 바라볼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결과를 나타내는 장소이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1-39장)과 구원(40-55장) 그리고 그 이후의 삶(56-66장)으로 단계적으로 이루어져 가는 비전 중에서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한 이 65-66장은 실제적으로 40-66장까지의 회복의 메시지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56-66장의 내용은 회복의 메시지(40-55장)가 선포된 이후의 회복적인 삶에 대한 메시지로 이해되어질 수 있다. 분명 이와 같은 형태가 회복과 삶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이후에 이루어질 삶을 묘사함으로 인하여 선지자 이사야의 비전속에서 바라 볼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최종적으로 성취되어질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한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물로서, 그리고 새로운 출애굽을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예루살렘)의 모습이 어떠하여야 하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
게다가 이사야 56-66장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65-66장은 마치 전체의 이사야서의 축소판처럼 심판과 회복이란 주제로 시작되는 다음과 같은 오중 구조(A-B-C-B'-A')로 볼 수 있다.
A 심판과 회복(65:1-7)
B 배교하는 종과 신실한 종(65:8-16)
C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65:17-25)
B' 악인과 의인(66:1-14)
A' 심판과 회복(66:15-24)
A-A'에서 전체 이사야서의 주제인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이란 주제를 전개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저버린 이스라엘의 심판과 그리고 (이방의) 회복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의 결과이다. B-B'는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안에서 하나님을 배교하는 종으로서 악인과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서 의인의 결말이 드러난다. 그런 후에 C(65:17-25)는 A-A'와 B-B'의 이중적 샌드위치 구조에서 65-66장의 핵심을 이룬다. 다른 말로 설명을 한다면, 전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의 결과이며 하나님을 배교하는 악인에게 심판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한 종에게 회복으로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고,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로서 “새 예루살렘”의 시대가 열릴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2) 이사야 65:17-25절의 구조
사 65-66장의 핵심으로서 이사야 65:17-25의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은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나타내는 부분(17-23)과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부분(24-25)으로 대별이 된다.
A 새 하늘과 새 땅(17-19)
B 새 예루살렘(20-23)
A' 하나님의 대답하심과 들으심(24)
B' 나(하나님)의 성산(25)
일인칭 단수를 사용함으로 본문의 주체가 여호와 하나님인 사실을 알 수 있다(A-A'). 결국 하나님의 창조하심은 하나님의 대답하심과 들으심으로 정리가 된다. 그리고 B(20-23절)와 B'(25절)에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B와 B'에서는 삼인칭을 사용하여서 하나님의 사역의 결과로 주어진(주어질) 존재들에 대하여 묘사를 하고 있다. B에서 새로운 이스라엘 곧 하나님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존재로서의 예루살렘에 묘사가 나타난다. 이런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루살렘은 25절에서의 하나님의 성산으로 표현이 된다. 성산에서는 진정한 평화가 있다. 그곳의 동물들은 모두 난폭과 이기적인 모습 하나님 앞에서의 모습으로 마치 창세기의 에덴에서의 생활로 돌아온 것과 같다.
A.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arE²Ab ynIïn>hi-yKi(') (17-19)
B. 그들이 (20-23)
A' 내가 정말로 대답할 것이고(hn<+[/a, ynIåa]w:)...(내가 들을 것이다)(~yrIßB.d:m) (24)
B' 그들이 (25)
17-25절은 17-23(A-B)과 24-25절(A'-B')로 하나님의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의 창조를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그의 나라를 각각 보여주고 있다. 17-23절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직접 창조하신 것과 그와 같은 새 창조를 통하여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리고 그곳에 거하는 백성을 기쁨으로 만드신 것이며(17-19), 그리고 20-23절에서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기적적인 창조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전개되어진다.
하지만, 24-25절에서는 하나님의 통치(응답하심과 들으심)가 하나님의 성산에서 이루어질 땅의 평화 곧 새로운 땅의 모습을 보여준다. 24(A')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소리를 들으시겠다고 선포한다. 이 들으심과 대답하심은 하나님의 신-왕적 통치를 보여준다. 특히 “부르기 전에” 그리고 “말을 마치기 전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왕적 사역을 보여준다. 그리고 25(B')에서 이스라엘의 삶의 자리 곧 그들이 하나님에게 부르짖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 같은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은 일차적으로 평화를 나타내고 있다. 동물들 사이의 평화는 하나의 은유로 나서 전체 인간 세상에 놀라운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게다가 이와 같은 통치의 장소는 하나님의 거룩한 산(성산) 곧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것을 알 수 있다(66:20).
Ⅱ. 사 65:17-25를 사 1:2-9 과 사 11:1-9 과 함께 읽기(1:2-9//65:17-23 그리고 11:1-9//65:24-25)
65:17-25에서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가 하나님의 신-왕적 통치(17-23)와 그로인한 그의 나라(메시야왕국)의 도래(24-25)라는 이중적 의미와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은 1:2-9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징계에 대한 결과이며 그리고 11:1-9에서 나타나는 메시아 왕국(의 평화)에 대한 계속적인 고대함이다.
1. 사 65:17-23//사 1:2-9 읽기: 하나님의 절대 왕권에 대한 비전
이사야의 비전으로써 이사야서는 서론(1장)에서 하늘 법정에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름에서 시작 되고(1:2-9) 그리고 결론(65-66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는 것으로 마치고 있다(65:17-25와 66:22). 그렇다면 1:2-9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하늘과 땅을 부르심은 이제 65:17-23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심으로 결론지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 1:2-9는 하나님께서 직접 하늘 법정에서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르시는 장면(2-3절)과 그 기소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져버린 유다와 그 백성의 상태에 대하여 잘 나타낸다(4-9절). 그렇게 볼 수 있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예언형식(prophetic speech)에서 전형적인 시작공식인 “슬프다”(yAhå)라는 단어가 사용됨으로써 두 부분으로 대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는 본문에서 청중이 2-3절에서는 하늘과 땅이 법정에 부름을 받고서 청중이 된다. 그러나 4-9절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한 내용을 민족과 예루살렘이 청중으로서 듣고 있다. 마지막으로 화자가 다르게 나타난다. 2-3절에서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일인칭(2b-3)을 사용하는 반면 4-9절에서는 하나님을 지칭할 때에 3인칭으로 사용되어서 화자가 2-3절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진노에서 이제는 그와 같은 상황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확인임을 설명한다고 볼 수 있다.
1:2-3 이스라엘의 변절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1:4-9 이스라엘의 상태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인식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제기된 하늘과 땅의 문제가 해소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는 65:17-23에서 시작이 된다. 그렇다면 1:2-9와 65:17-25의 각각의 구조는 그 시작과 결과의 형식으로 살펴 볼 수 있다.
1:2-3//65:17-19에서는 하나님의 유다와 예루살렘의 신적-왕적 통치를 잘 보여 준다. 이 두 부분은 모두 하나님의 왕적 선포에서 시작이 된다. 1:2-3에서는 하나님의 독백으로 시작이 된다. 반면에 65:17-19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선포를 하시고 계신다.
1:2-3
Aa 하늘이여 들어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r<a,ê ynIyzIåa]h;w> '~yIm;'v' W[Üm.vi)
여호와가 말씀하시기 때문이다.(rBE+DI hw"ßhy> yKiî)
Ab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Ac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Ab'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Ac'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65:17-19
A'a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17a)
A'b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7b)
A'c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18a)
A'a'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18b)
A'c'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19a)
A'b'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19b)
하나님의 왕적 통치는 기존의 하늘과 땅(A)을 대신할 하나님의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창조(A')시작함으로 시작이 된다. 여기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A'a)는 A'a'와 평행을 이루어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리고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왜 이와 같은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져야 하는가? 이는 Aa에서 설명이 되어진다. 하늘과 땅의 모습(A)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이다.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하늘과 땅의 존재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뀐다. 게다가 새 하늘과 새 땅은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기쁨으로 가득한 예루살렘과 그것을 즐거워하는 백성임”을 알리고 있다.
그렇다면 기존의 하늘과 땅은 왜 없어져야하며, 왜 “새 하늘과 새 땅”인 기쁨의 예루살렘과 즐거움의 백성은 창조되어지는 것인가? A'b-A'b'에서 보면 하늘과 땅은 마음에서 기억되거나 생각나지 않아야 할 정도의 존재이다. 게다가 “기쁨”과는 정반대되는 우는 소리와 (고통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가득한 곳으로 존재한다.
왜 그러한가? Ab-Ab'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언약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그와의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버렸다. 2b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아버지 되심을 분명히 한다. 양육하다는 히브리어 단어가 yTil.D:äGI와 yTim.m;êAr 라는 피엘과 푸알(수동태)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의 자녀로 선택한 언약에 신실함을 나타낸 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하였다는 칼동사 W[v.P'î를 사용함으로 그들의 의지로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하지 못하였음을 나타낸다.
또한 Ab'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친밀함)를 저버린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자녀 됨은 혈통의 관계가 아니었다. 반대로, 소와 나귀와 주인의 관계를 통하여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던 것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정작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알다([d:êy")라는 동사는 관계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마치 부부가 서로를 내밀한 부분까지도 알고 있는 것 같은 친밀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앎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버리는 행위이다. 여기서 !n")ABt.hi는 3절의 [d:êy"라는 동사 이후에 사용되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버리고 소와 나귀와 같은 동물보다 못한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예루살렘의 창조의 결과가 가져올 것은 무엇인가? Ab에서 하나님을 배반한 하는 모습이 사라진 곳 즉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곳은 어떤 곳일까? 이것은 분명히 A'c-A'c'에서 결론적으로 설명한다. 즉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기뻐하고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곳이 되었다. 분명 이전의 하늘과 땅이 증언하여야 (예루살렘의) 모습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장소요 하나님의 징계로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가득한 곳이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새롭게 된 하나님과 그 백성의 (언약)관계가 회복된 장소로 변하여진 곳이다.
A'b'에서 옛적 하늘과 땅의 모습은 하나님의 새 창조에서는 다시는 기억되지 않는다. 게다가 A'b'에서는 하나님의 징계로 인한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 들리지 않도록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왜? 이에 대한 답이 예루살렘은 하늘과 땅의 증언으로 기쁨과 즐거움이 사라진 백성에서 이제는 그들의 모습이 기쁨과 즐거움의 모습으로 변하기 때문이다(A'c와 A'c'). 바로 이것에서 하나님의 새 창조는 “지금 그리고 여기서” 당하고 있는 이사야 선지자의 시대의 고통/심판에서 새로움이 넘치는 미래적 하나님의 구원 즉 신-왕적 통치로 전환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적통치로서 고통 속에서 울고 부르짖음을 들어야하는 하늘과 땅이 새 하늘과 새 땅 곧 기쁨이 넘치는 예루살렘으로 바뀌게 되었다면(새 창조되었다면), 기쁨과 즐거움의 예루살렘 이전에는 그곳은 어떤 곳이었으며, 어떻게 변화되기에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가? 이는 65:20-23과 1:4-9까지의 비교에서 나타난다. 이사야 선지자가 바라보는 이스라엘의 현재적인 상태는 1:4-9에서 잘 묘사된다. 이 묘사는 a-b-b'-a'의 수사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a 허물진 백성(4)
b 육제적 고통(5-6)
b' 땅의 황무함(7-8)
a'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상태(9)
위의 구조에서 1: 4-9까지의 모습은 전쟁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육체적 상태와 그들의 땅의 황무함을 동시에 보여 주는 본문이다. a-a'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나라로 전락한 이스라엘에게 임하였음을 보여준다. b-b'에서 전쟁의 소문과 전쟁으로 인한 그들의 고통스런 모습은 육체적인 것과 땅의 것 둘 다의 형태로 다가온다.
이사야의 입장에서의 현재의 모습은 5-6절(b)에서 병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온통 상처투성이고 치료를 받지 못한 상태가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자처한 것이다. 5절에서 수사적인 질문 -어찌하여 hm,î-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을 고의적으로 배신하여 현재에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 고난의 모습은 6절에서 “상한 것”([cr4;P,î) 와 “터진 것”(hr"ÞWBx;) 그리고 “짜며”('WrzO') "싸매고"(WvB'êxu)의 단어를 통하여서 이들의 병적인 상태는 단순한 육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자연스러운 질병이 아니다. 차라리 그런 상태는 외부적인 사정 즉 그들이 하나님께 대항하며 반역함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또한 외적으로 이스라엘은 황무한 땅으로 변한 모습을 보여준다(1:7-8). 땅은 하나님의 소유이다. 창세기의 에덴동산처럼 하나님의 땅은 풍요와 기쁨이 넘치는 곳이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 곧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을 맹세로 주셨다. 또한 가나안(하나님의 맹세로 주시는 땅)을 다스릴 다윗의 집안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며, 하나님의 집인 것은 분명히 하고 있다(삼하 7:13과 대상 17:14).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 건축이 완성될 때에는 분명히 하나님은 성전에서 듣고 이스라엘의 땅의 잘못된 것을 고치시리라 약속하셨다(대하 7:14).
하지만 이스라엘은 황무하며, 이방인의 손에 의하여 황폐하고 불에 탔다. 더구나 이방인에게 삼키어지는 신세가 되었다. 마치 이스라엘은 농경 사진이나 영상의 이미지인 “포도원의 망대”와 “원두밭의 상징막” 같이 외로이 고립되어졌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에워싸인 성읍”처럼 군사적인 표현을 통해서 희망이 없이 외세에 찌든 초라한 모습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왕하 18:15-16절에서 히스기야 왕은 엄청난 공물을 바친 후에야 겨우 폐망을 면한다. 이는 이스라엘이 실질적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대한 미래적 비전은 이에 대한 치유가 신적통치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을 보여 주고 있다(65:20-23). 이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즉 육체적인 회복(20절)과 땅의 회복(21-23)될 것을 보여주고 있다. 20절에서 이사야는 미래/종말에 주어질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현재의 상처투성인 육체의 치유를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백세까지 생명의 복을 누리게 되는 일은 지극히 일상적일 것이다. 비록 그곳에서 죽음이 존재할지라도 이제는 그 죽음이 왕 노릇하는 일이 없어진 생명의 평화가 넘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즉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 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를 받은 것이리라(lL'(quy> hn"ßv' ha'îme-!B, aj,êAxh;äw> tWmêy" hn"v' ha'Ûme-!B, r[;N:©h; yKiä).”
반면에 65:21-23절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의) 땅의 회복을 분명히 알리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땅의 회복은 다음과 같은 구조(a-b-a'-b')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a 그들은 가옥을 건축하고, 포도원을 재배하며(21-22a)
b 내 백성(yMiê[;)...나의 택한 자(yr"(yxib.)(22b)
a'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않고(23a)
b'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hw"hy> ykeÛWrB. [r:z<÷)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한다(23b)
그곳에서는 일차적으로 다시는 전쟁이 없을 것임을 알리는 것과 같다. 평화가 정착/구축이 되어서 모두가 건축한다 그리고 그들의 포도원을 다시금 재배하기 시작한다(a) 이는 (21)에 건축한 가옥이 그대로 남아있고 외국인(타인)이 건축한 집을 빼앗는 일도 없는 정도의 평화가 있다. 그리고 자신이 지은 농작물인 포도원을 그대로 타인이 먹지 않고(재난으로 인한) 재배자인 자신이 먹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차적으로 - 일차적인 회복의 이유가 설명되는 것으로 - 이스라엘이 다시금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리/위치를 잡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주어진다. b-b'에서 그 이유를 설명을 한다. 그들(이스라엘)이 다시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려질 것이며(내 백성yMiê[, 내 택한 자yr"(yxib), 그들이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hw"hy> ykeÛWrB. [r:z<÷)으로 다시금 그들의 모습(정체성)을 찾게 되고 더불어서 자자손손이 그와 같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갈 수 있는 것이다.
2. 65:24-25와 11:1-9 읽기
65:24-25절은 11:1-9의 메시야 대망을 새 하늘과 새 땅과 연결을 시키고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창조주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의 실현은 어떤 모양일까? 이 물음은 11:1-9에서 나타나는 메시아 왕국으로 실현이 되어지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한다. 특별히 11:1-9절은 10장 33-34절의 레바논의 빽빽한 산림(the high trees of Lebanon)에 대한 하나님의 작벌로 비유되어지고 있는 앗수르의 거만한 왕에 대한 징계/심판과 바로 이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곧 이스라엘의 미래 회복 - 밑동이 잘려진 나무에서 한 가지가 올라오는 이새의 가지 - 을 통하여서 새로운 세상이 올 것임을 알리는 메시야 본문이다. 마치 10:33-34절에서 앗수르의 거만한 왕의 심판처럼 반대로 11:1-9에서는 다윗 계통의 의로운 왕으로 인한 부흥/회복을 알려주고 있다. 이사야 11:1-9와 65:24-25의 관계는 11:6-9와 65:25에서 '같은' 표현들과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11:1-9는 1-5와 6-9로 구분을 할 수 있다. 11:1-9를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지만, 그 의미는 하나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 구조적인 소 의미 단락은 메시아 통치의 “한 의미의 두 단계”를 잘 보여주는 65:24-25b와 대응을 이루어지고 있다.
먼저 11:1-5는 메시야의 통치를 설명한다. 이는 메시야를 의미하는 이새의 줄기에서 나오는 한 싹(1-2절)과 그의 통치(3-5절)로 대별이 된다. 1절과 2절이 평행 구절을 이루고 있다.
yv'_yI [z:GEåmi rj,xoß ac'îy"w>
`hr<(p.yI wyv'îr"V'mi rc,nEßw>
hw"+hy> x:Wrå wyl'Þ[' hx'în"w>
`hw")hy> ta;îr>yIw> t[;D:Þ x:Wrï hr"êWbg>W 'hc'[e x:WrÜ hn"©ybiW hm'äk.x' x:Wrô
11:1절은 “이새의 줄기에서 싹”(yv'_yI [z:GEåmi rj,xoß)과 “그 뿌리에서 가지”(hr<(p.yI wyv'îr"V'mi rc,nEßw>)는 인간 왕권-즉 다윗 (집안)왕권-의 무너진 곳에서 “기적적인” 새로운(another) (다윗) 왕의 통치를 기대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때 싹/가지rj,xoß/rc,nEß란 메타포가 다윗 계보에서 나실 메시야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기서 이새 곧 다윗의 아버지의 이름이 언급이 되어(이새의 뿌리와 줄기) 미래에 주어질 왕은 단순히 왕의 계보에서 주어질 왕이 아니라 전혀 다른 - 새로운 - 왕일 것임을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존재-다른 다윗 왕 - 는 2절에서 분명해진다. 그는 하나님의 영(hw"+hy> x:Wrå)의 임재와 함께한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영의 임재가 있었던 사람은 구약에서 모세, 다윗 엘리야 등 특별한 역할이나 사역을 가진 자들이었다(민 11:17; 27:18; 삼상 16:13; 왕하 2:15; 사 41:1; 59:21; 61:1). 그리고 그 영의 임재는 바로 하나님의 자신(신적-왕)의 임재이다.
`hw")hy> ta;îr>yIw> t[;D:Þ x:Wrï hr"êWbg>W 'hc'[e x:WrÜ hn"©ybiW hm'äk.x' x:Wrô
이때 ‘임재한’ 하나님의 영의 삼중적 성격(characters)은 신적-왕으로서의 하나님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지혜와 총명,” “모략과 재능,” 그리고 “지식과 여호와를 두려워(경외)”하는 표현은 하늘로부터 올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모략과 재능”은 9:5에서 주어진 신적 이름이여,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함”은 "모든 것의 기본(the basis of the whole)"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이와 같은 성격들은 삶의 중요한 국면들을 지도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영의 임재와 함께 하는 존재는 분명히 선한 (신적-) 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기적적인 하나님 자신의 임하심/통치하심은 65:24a를 묘사하고 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hn<+[/a, ynIåa]w: War"Þq.yI-~r<j,( hy"ïh'w>).
여기서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통치/임하심이 하나님의 백성의 부르짖음의 결과가 아니라(War"Þq.yI-~r<j,(), 하나님의 자신의 결정이었음을 강조한다. 이는 하나님의 보좌인 하늘에서 직접적으로 이스라엘에게 개입하심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이스라엘과의 사이에서 무너진 언약의 회복과 함께 그의 신적-왕으로서의 통치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새로운 (메시야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분명 역대하 7:14절에 다윗 계통의 왕의 통치에서는 하나님의 인간사의 개입(응답하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겸비한 모습으로 서고 그리고 그들의 문제를 두고 부르짖음이 있을 때 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메시야-신/왕적 통치 안에서는 그의 백성들이 먼저 겸비하여질 조건과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어야 할 조건이 필요 없는 이상적인 세상 곧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의 문제를 미리 아시고 해결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응답으로서 나타날 메시야-신적 왕의 통치는 어떤 모습으로 시작이 될 까(나타날 까)? 이는 11:3-5//65:24b에서 설명을 하고 있다. 11:3-5은 다음과 같은 구조적인 설명을 한다.
11:3a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3b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jAPêv.yI. ***-al{))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x:yki(Ay ***-al{)w>)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4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jp;Ûv')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x:ykiîAh)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신적 왕(메시아)의 통치의 원칙은 두 가지로 보인다. 외적인 것은 여호와를 경외함을 즐거워함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속성인 공의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모습인 성실을 동시에 자신의 몸에서 나타내게 하는 것(11:3a와 5). 이와 같은 모습을 ‘허리띠를 삼는’ 것과 같은 것으로 표현을 한다. 마치 신적-왕의 옷으로 정의와 공의를 비유하여서 왕적 통치이념을 구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적으로는 3b와 4절에서 그 (메시아)통치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여호와를 경외함 즉 공의와 성실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때에 3b와 4a에서 ‘심판하다’와 ‘판단하다’는 동사를 사용하여서 실행에 옮기는 것을 강조한다. 그 대상이 약자들을 대표하는 “빈핍한 자”와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세상의 겸손한 자”들임을 밝히고 있다. 게다가 이 통치/판단의 근거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하나님의 신-왕적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4b의 중북적인 사용(pivotal pattern)을 통해서 ‘입의 막대기’와 ‘입술의 기운’에서 나오는 것이 악한 세상과 악인 모두에게 공의와 성실에 기준하여 행하여지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 주어진다.
공의와 성실 자체가 되어져 버린 하나님(메시아)의 나라는 65:24b에선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즐거워하는 모습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의 백성은 말하고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말을 듣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들으심은 그들의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배에 임재(좌정)하고 계심을 의미한다(구원의 실재가 이루어졌음을 나타낸다). 이사야 1장 10절 이후에서 묘사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예배의 행위-하나님을 향하여 올리는 말 곧 기도-는 하나님에게 연납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그 ‘말하는’ 백성의 신적-왕이심을 선포하신다. 이때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는 일인칭 “내가”를 사용함에서 더욱 분명히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백성들의 말을 들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탄원이나 소원의 기도가 하나님의 들으심을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가족으로서) 땅위에서 ‘탄식과 소원’이 있을 수 없는 상황으로 이끌림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신적-왕(메시야)으로서의 통치가 이루어지면 그 결과는 11:6-9//65:25에서 보여준다. 하나님의 통치(메시야의 통치)는 종말론적인/우주적인 그리고 완전한 평화의 시절이 다가옴을 알린다. 이전의 시대와 완전히 구별되는 새로운 시대이다. 그리고 에덴의 회복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11:6-9까지에서 '바라보고' 65:25에서 그 바라봄의 '성취'를 강조한다.
11:6-7 함께 먹음65:25a 함께 먹음
(여호와의 성산에서 yviÞd>q' rh:ï-lk'B.)
11:8-9 해함이 없음(장난치고)65:25b 해함이 없음
이 (바라보는) 평화는 동물간의 평화의 수립/정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보다는 “함께 먹음”과 “해함이 없음”이란 두 주제로 엮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평화와 안전이란 두 조건이 이곳에서 완전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윗 왕국의 무너짐/패망이 가져올 상황에 대한 이해는 메시아 시대의 도래로 인하여 새로운 희망을 소망하게 하는 중요한 동기를 주는 것이다.
그 장소적인 중요성은 여호와의 성산에서(yviÞd>q' rh:ï-lk'B.) 이루어지는 평화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시적인 표현으로 이는 마치 Pivot 역할을 하는 것이 있음을 알리고 있다. 즉 하나님의 평화는 둘 다의 본문에서 여호와의 성산에서 먹고 생활함을 의미한다.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통치의 중심이 될 곳 즉 “새로운 예루살렘”임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2:1-5참조). 이를 Motyer는 에덴의 회복으로 이해하여서 장차 이루어질 (즉 그리스도의 재림하신 이후에 건설될) 하나님의 왕국의 모습으로 본다. 이전의 모습을 가진 존재들은 사라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야 할 존재들만이 있다. 즉 굶주린 늑대의 사라짐과 두려움을 잃어버린 양의 등장 등이 그러하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있다.
결국 65:24-25은 하나님의 통치의 현장이 “의로운 메시야”의 왕국이며 그곳에서 메시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평화가 실현이 되는 것임을 재차 확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이사야 선지자의 비전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주 왕의 통치와 그로 인한 그의 나라(메시야나라)에 대한 선포이라고 할 수 있다. 선지자 이사야가 살았던 주전 8세기의 예루살렘의 상황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꿈꾸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존재는 하나님의 창조주이심과 그가 직접통치하는 왕국(메시아 왕국)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를 드러내는 이사야 65:17-25절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구원을 선포하는 전체 이사야의 결론 부분에 위치하였고 또한 이스라엘의 “구원의 이후”의 삶을 제시하는 56-66장에 있어서 이사야 선지자의 비전이 새 하늘과 새 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65:17-25)의 이중구조는 하나님의 창조주이심을 바라보는 1:2-9와 그리고 메시야의 나라를 기대하는 11:1-9와 함께 읽을 때에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된다. 65:17-23절의 새 예루살렘의 창조는 하늘과 땅의 증인으로 부름(1:2-9)에서 기적적으로 변화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이유를 알 수 있게 한다. 게다가 65:24-25에서 하나님의 대답하심과 들으심의 내용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와 연결이 되는 것은 11:1-9에서 주어지는 메시아 왕국/통치로 실현될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더욱이 65:25와 11:6-9의 중복적인 내용은 하나님의 성산에서 주어지는 평화와 안전인 것을 알 게 된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바라본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은 단순한 하늘과 땅의 재창조 혹은 새 창조를 통한 이스라엘(예루살렘)에 임한 사회적인 정의 혹은 군사적인 강대성 혹은 새로운 사회의 질서의 정착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차라리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길 소원하는 것이며 이는 곧 하나님의 나라 곧 메시야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길 소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분명 65:17-23절은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가 무너진 1:2-9에 대한 답이었고 65:24-25절은 선지자 이사야의 메시아 기대가 실현되는 나라가 다시금 표현되어지는 소 단락으로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 결국 사 65:17-25에 대한 읽기의 귀착은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그 나라 (메시야의 나라)가 이루어지길 소원함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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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New Heavens and A New Earth" as the Prophet Isaiah's Vision:
Reading Isaiah 65:17-25 with 1:2-9 and 11:1-9
2) Man-Soo Choi (KyeYak Graduate School of Theology)
As the Prophet Isaiah's vision, "new heavens and a new earth"(65:17-25) leads readers to the divine-kingly reign of God the Creator and the coming Kingdom of God. The vision was given to Isaiah in the eighth century BC, who was a channel of God's disclosure of the divine King, as well as who expected the restoration of Jerusalem to the kingdom of God. Yet, the vision is to understand in the text and context of Isaiah 65:17-25 interwoven with God's Judgement and Salvation. To do it, 65:17-23 can be read with 1:2-9, and 65:24-25 with 11:1-9. The former focuses on God the divine-King, the letter on His Kingdom.
【Key Words】
"new havens and a new earth," the Prophet Isaiah, Isaiah's vision, Isaiah 1:2-9, Isaiah 65:17-25, Isaiah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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