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성전파과와 새로운 교회시대의 열림
1. 서설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사건은 매우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를 지니다. 이는 그 사건과 더불어 사도교회 시대가 종료되고 보편교회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도교회 시대는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가 중첩되는 특별한 언약의 시기였다.
신약 성경의 계시 완성과 더불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자 새로운 보편교회가 모습을 갖추어 세상 가운데 드러나게 되었다. 성전파괴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을 말해주고 있다. 언약의 완성은 과거에 주어진 언약이 이제 불필요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의 의미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항상 하나님의 몸된 교회 가운데 살아 존재한다. 구약의 언약과 율법의 정신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가운데서 항상 역동하고 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곧 성전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살면서 메시아를 소망했듯이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안식 후 첫날인 매주일 교회에 모여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게 된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한 하늘 왕국에 속한 자임을 고백하며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사도교회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보편교회 시대가 열리면서 성도들은 기록된 말씀과 성령을 통해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는 인간들의 종교적 이성과 감성이 하나님을 섬기는 기본적 방편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새로운 보편교회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그에 순종해야만 한다. 새로운 시대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기록된 성경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신앙의 절대적 기준이 된다.
2. 예루살렘 성전파괴와 이스라엘 민족의 역할 완성
예루살렘 성전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모리아산 바로 그 자리에 건축되었다. 이는 예루살렘 성전 건물과 더불어 그 장소에 특별한 언약적 의미가 담겨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예루살렘 성전은 아브라함 언약에 기초한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약속에 의해 허락하신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바치도록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사건은 나중에 있게 될 메시야의 십자가 사역을 미리 예표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하기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월절을 제정하셨다. 그 절기를 하나님의 어린 양과 연관되는 피의 명절이었다. 애굽에서 조성된 이스라엘 민족을 시내 광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모세를 통해 성막을 허락하셨다. 그 성막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주셨다.
다윗과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의 모리아산 위에 시내산 성막을 정착시킨 것은 아브라함 언약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예루살렘 성전은 아브라함에게 연관된 모리아산 제사와 모세로 말미암은 시내산 성막이 합치된 다윗 언약의 본질적인 내용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그 바로 그 자리에 모세를 통해 건립한 성막을 정착시킴으로써 앞으로 도래하게 될 메시야 왕국의 실체를 보여주셨다.
AD 70년의 로마제국에 의한 성전의 파괴는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고 다윗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이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선포하고 있다. 그것은 비록 성전 건물뿐 아니라 장소적 의미가 완료되었음을 동시에 선포하고 있다. 나아가 이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도구를 사용하기 위해 선택하셨던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역할이 종료되었음을 동시에 말해 주고 있다. 이것은 보편교회 시대가 열리게 됨을 예고한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포함된 구속사적 사건으로서 마땅히 일어나만 할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 점을 분명히 예언하셨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구약에 계시된 모든 율법적 의미가 종결되고 유대인들의 역할히 완전히 끝났음을 선포하고 있는 사건임을 잘 기억해야만 한다.
3. 세속 국가와 교회
하나님은 세속 국가의 모든 권력자들을 하나 하나를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것이 아니라, 국가 제도와 그 가운데서 공권력을 행사하는 관리 체계를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국가 제도를 확립하셨으나 그 권력자들을 직접 세우지는 않으셨다.
4. 오직 성경(sola scriptura)과 성령 하나님
기록된 성경을 통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없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은 결코 인간의 지혜와 판단으로 말미암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님의 지혜만이 성도들을 영원한 구원의 길로 인도하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불의한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함으로써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소망하도록 한다. 그것이 성도들에게 주어진 가장 소중한 유익이다.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바는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해석할 만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참된 성도들은 성령의 도움심에 따라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애써야 한다. 교회는 성경전체적인 성경 배경 가운데 기록된 본문들을 볼 수 있는 ‘tota scriptura'를 항상 강조해야 한다.
5. 새로운 교회시대의 도래
(1) 보편교회의 시작과 초대교회 시대
사도교회 시대와 보편교회 시대의 차이에 대해 분명한 이해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다양한 형태의 계시가 부분적으로 주어지던 시대가 종료되고, ‘오직성경’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시대 교회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지상의 교회는 끊임없이 변천하는 세상 가운데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흩어진 교회들은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으되 다양한 반응을 해야만 한다. 이는 마치 심한 파도로 인해 흔들리는 배 위해 서 있을 때 적절하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과 같다.
예루살렘 성전파괴와 더불어 사도교회 시대가 폐막하자 새로운 보편교회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신약 성경은 사도교회의 특성 가운데서 보편교회에 주어진 교훈들을 많이 담고 있다. 그러므로 지상의 교회는 메시아 사역의 바탕 위에 강림하신 오순절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록된 그 말씀을 통해 온전히 세워져 가야 한다.
사도교회 시대가 막을 내리고 초대교회 시대가 시작되는 전환기 때는 특별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시대의 초기의 성도들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민감해야하던 때였다. 새로운 교회시대의 열림과 보편교회적 직분의 정착은 하나님의 경륜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었다.
(2) 세속화된 중세교회 시대
우리는 초대교회와 중세교회를 시대적으로 구분한다. 물론 그것은 사도교회와 보편교회를 구분하는 것과 같은 구속사적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초대와 중세교회 시대를 구분한다.
콘스탄틴 황제는 AD 313SUS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했다. 이는 기독교인들에게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그 이전에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는 것이 불법이었다. 로마 제국에 속한 모든 백성들은 로마 황제를 절대적인 존재로 인정해야 했다. 그것을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박해가 따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초대교회의 시기에도 로마 제국의 최고 통치자에 따라 박해의 정도에는 차이가 났지만 전반적으로 고통스런 시기였다. 하여튼 큰스탄틴 황제에 의해 그런 박해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기독교인들이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허락된 종교의 자유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그것을 말미암은 외견상의 긍정적인 변화는 기독교인들의 박해가 막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그것으로 인해 교회가 급속히 세속화되어 부패해 가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진정으로 복음을 아는 성도들을 제외하고는 교회 부근에 얼쩡거리는 자들이 없었다. 하나님의 복음을 자신의 생명보다 귀중하게 여기는 자들이 아니면 교회에 나올 수 없었다. 물론 교회를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교회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가 세상에 개방되고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지 않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을 때 교회를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더구나 로마의 황제가 기독교인이 된 형편에 권력 지향적인 인물들은 기독교를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다.
이에 대해서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유형적인 이익을 얻는 것은 아닐지라도 교회를 통해 정신적인 위안을 삼고자 하는 자들이 늘어갔다. 그들은 천상의 진리가 아니라 교회를 이용한 지상의 종교적 삶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그렇게 되자 거룩한 예배 공동체 교회가 종교적인 사교장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며 원하는 정보를 얻으며 종교 생활을 누리기를 좋아했다.
그렇게 되어 점차적으로는 전 로마 제국이 마치 기독교 신앙을 가지는 것처럼 변해갔다. 특히 로마의 권력자들 사이에 그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특히 로마의 권력자들 사이에 그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래서 급기야는 로마 제국이 소위 기독교 국가로 태어나게 된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로마 제국을 기독교 국로 선포했다. 기독교가 공인을 받은 지 불과 80년이 지나지 않은 AD 392년의 일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AD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에는 로마 제국에서 예수를 믿는 것은 범법 행위였다. 그러던 것이 AD 392년 이후에는 그와는 정반대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도리어 범법 행위가 되었다. 그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동일한 세속 국가에서 불과 80년 전에는 예수를 믿으면 감옥에 잡아 가두고 또 80년 후에는 예수를 믿지 않으면 감옥에 가두는 기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상황이 그렇게 되므로 말미암아 기독교에는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교회와 기독교 지도자들은 갑자기 상당한 힘을 가진 기득권자가 되었다. 그들은 교회 내부뿐 아니라 국가의 세속적인 분야에서도 점차 힘을 가지게 되었다. 국가는 교회를 위한 많은 재정을 부담하게 되고 정치인들은 교회를 국가정치를 위한 도구로 삼게 되었다.
기독교 국가인 로마 제국에서는 복음에 아무런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진정한 신앙이 없는 자들도 억지 세례를 받아 교회에 이름을 등록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범법자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결국 교회는 참된 신앙인들이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성도들의 무리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공권력에 의해 제도화된 종교 조식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 결과 교회는 급속히 세속화되어 기독교화 된 불신자들의 종교적 충성심이 교회를 이끌어가게 되었다. 정교일치를 추구하던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은 서로간 야합과 견제를 되풀이 했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은 교회를 세속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장소로 전화시켜 나갔다. 그들은 기독교를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잡다한 것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 들여왔다. 소위 기독교 미술과 기독교 음악이 그런 것들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그런 것들을 예배 가운데 도입함으로써 하나님을 경배하는 시간에 자신들의 종교 생활을 즐겼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종교인들은 마치 문화 생활을 즐기듯이 교회를 종교적 오락장소로 만들어 갔던 것이다. 그것을 위해 아름다운 건축물을 지었으며 교회 내부를 화려한 물건들로 장식했다. 그들은 점차 그런 것들을 소위 성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저들이 듣기에 아름다운 음악을 필요로 했고 그것을 위해 값비싼 악기들을 제작했다. 음악가들은 자기의 재능을 통해 멋진 음악을 작곡하여 예배 시간에 사용하는 음악으로 탈바꿈시켰다. 다수의 무지한 교인들은 그것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편이라고 믿었다.
그런 일은 배도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통해 종교적 자부심을 가지고 스스로 위안을 받기도했다. 더구나 그런 일을 하는 데드는 모든 경비는 국가가 부담하게 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중세교회는 껍데기만 남은 형식적 종교 단체로 전락했다.
결국 그런 종교적 분위기는 신에 대한 회의와 함께 문예부흥이라는 이름의 르네사스 운동을 몰고왔다. 물론 그 운동은 이슬람의 발흥과 연관이 있으며 십자군 운동의 실패와 직접 연관된다. 그 과정에서 형식적인 기독교인들은 종교적인 인간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두뇌와 손끝을 통한 작품을 통해 신앙의 틀을 세웠다. 화가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얼굴을 상상한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신앙의 표현이라 생각하는 자들이 많이 생겨났으며 음악가들 가운데는 기독교 음악을 통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아졌다. 르네상스 시대에 도입된 그런 사고들은 교회를 더욱 급속히 타락하게 만들었다.
교회가 세속화되면 불신자들조차 교회 안에서 즐길 만한 요소들이 많이 생겨났다. 교회 가운데 불신자들이 들어오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얻을 만한 즐거움이나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것은 교인들이 활발하게 종교 생활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게 된다. 그것은 유형적인 것이 될 수도 있으며 무형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교회를 통해 좋은 사람들은 사귈 수 있고 자기의 사업이나 일상적인 생활에 유익이 있을 것이라 판단하는 것은 유형적이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 정신적인 안정이나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무형적이다. 또한 교회에 다니면 신실한 도덕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나아가 예수를 믿으면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라 판단하여 교회에 나오는 것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결국은 자기의 종교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교회에 출석하는 것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모이게 되면 교회를 자기에게 유익하고 의미 있는 영역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 결과 종교개혁 이전의 중세교회 시대에는 소위 기독교 예술이 발달하고 교회 음악이 발달했다. 그들이 교회를 통해 윤리적인 인간을 양산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도 그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천국을 담보로 하여 교인들을 기만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이 소위 종교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배경 때문이었다.
(3)종교개혁시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의 로마 교회를 타락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그 타락이란 단순히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과 교인들의 비윤리적인 행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멸시하고 세속적인 것들을 무분별하게 교회 안으로 끌어들인 죄악을 말한다.
어쩌면 우리 가운데는 그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당시 일반적으로 드러나는 종교적 비윤리성을 중점적으로 보려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교권주의적 행태, 성적인 문란행위, 재정적인 부정 등은 문제의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매우 심각한 문제이긴 하지만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들이 가졌던 가장 심각한 본질적인 문제는 교회와 하나님의 말씀을 격리시켰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인양 교인들에게 가르쳤다.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을 진리인 양 포장해서 교인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저들은 종교적으로 창출해닌 거짓을 말하면서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양 선포했다. 그것을 통해 자기들의 종교적 목적을 달성했으며 기득권을 지켜나갔다.
종교개혁의 중심적 위치에 섰던 믿음의 선배들은 그에 대한 악한 죄를 지적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결코 당시 기독교 내부의 비윤리성을 단순히 교정하고자 노력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창살 없는 종교적 밀실에 가두어 둔 채 교인들을 기민하고 거짓으로 가르치던 자들을 진리의 이름으로 준엄하게 책망했다.
종교개혁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었다. 그들의 관심은 말씀 회복을 통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각성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을 항상 가장 중심에 두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지 않는 하나님은 진정한 하나님이 아님을 알았다. 또한 성경의 교훈을 따르지 않는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니라는 사시를 알고 있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황을 중심으로 한 교권주의자들을 불신자로 간주했다. 당시 지도자들은 모든 종교적인 노력은 사탄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천명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린 채 교회와 성도들을 기만하고 있는 종교지도자들과 거짓을 낱낱이 폭로하기로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믿음, 성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했다. 이로부터 벗어난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 아닐뿐더러 사탄을 즐겁게 해주는 종교적 행위로 간주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주님의 참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고자 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자세를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의 슬로건은 교회사 가운데 일시적으로 있었던 구호가 아니었다. 이는 초대교회 이래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우리는 믿음의 선배들이 진리를 회복하고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숭고한 신앙 정신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선배들은 그것을 지켜나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렸다. 그들은 많은 고백문서들과 교육문서들을 교회 앞에 내어놓으며 주님의 교회가 이 땅에 올바르게 세워지기를 원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벨직 신앙고백서, 도르트 신경,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 문답 등 많은 문서들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그 문서들이 그것을 작성하던 당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이 땅에 상속되어 이어져 오는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신실한 신앙의 선배들의 고백이 담겨있는 문서들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도 그 문서들을 참된 교회를 세워 나가는 소중한 지침서로 사용하고 있다.
(4)근대교회 시대
종교개혁 시대 이후의 교회는 로마 카톨릭교회와 대립되는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굳이 좋지 않은 일만이 아니었다. 잘못된 신앙의 행태를 가까이 보면서 자신을 더욱 민감하게 돌아볼 수 있다면 괜찮은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좋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 교인들은 그들의 잘못된 신앙을 자기 취향에 따라 모방하려는 경향성을 가진다. 그로 인해 기록된 성경을 통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면 그것을 무미건조한 신앙인 것으로 폄하하는 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들은 세속화된 잘못된 신앙인들을 보면서 그쪽을 부러워하게 되었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예술화된 종교나 이념화된 종교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들은 입으로는 성경을 말하면서도 인간의 종교적 취향이나 이성과 감성을 더욱 중시했다. 그러자 경직된 교리를 멀리하고 성경으로부터 곧바로 교훈을 받자는 움직임마저 일어났다. 역사적 경건주의자들에게는 대개 그런 경향성이 두드러졌다. 그들의 말은 그럴듯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매우 위험한 생각이 될 수 있다.
성경에서 직접적인 교훈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많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광범하고 다양한 교훈들을 자신의 목적과 취향에 따라 본문의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적용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성경을 개인의 입장에 따라 주관적으로 해석하도록 한다. 주관적이란 말은 객관성이 배제된 상대적이라는 말과 유사하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의미를 전체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고 부분적인 내용을 임의로 끌어와 자기와 연관시키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성경의 교훈을 읽는 주체가 되는 개인이나 집단은 성경을 자기의 종교적 목적에 맞추게 된다. 그런 상황을 직면하게 된 청교도들을 비롯한 많은 무리들은 진리와 신앙을 철저히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므로 ‘오직성경’(sola scriptura)을 고백할 때 항상 ‘전체성경’(tota scriptura)을 동시에 배경으로 해야 함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종교개혁 시대 이후 중세 유럽에서 인권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친 교회는 더욱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하나님을 위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으로 전환되는 사상적 탈바꿈이 시도되었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서 인간의 삶에 유익이 되지 않는 신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오만한 사고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 결과 기독교와 교회의 존재 의미는 인간의 윤리에 기여할 때만 발생하게 된다는 논리가 팽배해지게 되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임마누엘 칸트 사람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런 자들은 기독교를 절대 진리가 아닌 윤리적 종교로 만들어갔다. 그러한 사고는 당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던 전 유럽세계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며 지금도 그런 악한 사상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한편 산업혁명을 거치고 과학주의가 성행하게 되는 동안 서구의 기독교 세계는 극단적 이성주의에 빠져들게 된다. 찰스 다윈같은자는 진화론을 발표하면서 하나님과 인간을 동시에 거부하게 되었다. 그후에 인간들은 소위 ‘원시 시대’를 창안해 내게 되었으며 있지도 않은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그런 거짓 주장들이 지금까지 온 세계를 휩쓸고 있다.
불신자이면서 교회 내부로 들어와 이성주의적 신학자가 된 사람들은 성경의 진리를 인간의 척박한 이성의 칼로 분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성이라는 날카로운 칼을 잡고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분석하며 해체해 나갔던 것이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이적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천명했다. 즉 그것은 종교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몇몇 사람들이 꾸며 낸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거부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며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팔레스틴의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신약 성경의 복음서에 기록된 그런 유형의 이적을 베풀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푼 일이 없으며 죽은 사람을 살린 적도 없다. 나아가 그가 죽었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여 승천했다는 말은 그의 제자들이 꾸며낸 허황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들은 소위 ‘역사적 예수’(Historiacl Jesus)연구에 몰두했다. 온갖 이적들을 베푼 자로 묘사되는 그런 내용들을 전부 건어내면 순수한 인간 예수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라 일컫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라는 사실이다. 그들이야말로 성경에 기록된 진정한 ‘역사적 예수’를 거부하고 자기들의 논리에 맞는 허구적인 예수를 재구성하려는 안타까운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중엽 이후 활발하게 일어난 그런 사탄적인 악한 생각은 지금까지 교회를 위협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는 여전히 신학자의 탈을 쓴 불신자들이 많이 들어와 있다. 심히 안타까운 사실은 그들이 이단 중에 이단임에도 불고하고 다수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을 훌륭한 신학자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그들의 잘못된 신학 사상과 주장들을 공부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은 물론 그들을 철저하게 배격해야만 한다.
(5) 현대교회 시대
현대교회는 한마디로 신학적 혼동의 시대를 겪고 있다. 1960년대 이후 급속히 퍼저나간 포스트모던 사상은 진리를 극단적으로 상대화하기에 이르렀다. 현대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절대 진리가 아니라 세속적 관용주의를 덕목으로 삼고 있다.
그런 사상은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악한 사고이다. 교회는 결코 윤리적인 관용을 기본적인 덕목으로 삼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께서 진리와 비진리를 구분하기 위해 당시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유대인들에게 어떤 자세를 취했던가 하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은 그 악한 자들을 행해 독설을 뿜어내셨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이 가졌던 자세였다.
예수님 이후의 모든 교회에서도 그 점은 동일했다. 나중 종교개혁 시대의 신앙의 선배들도 마찬가지다.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에 대해 그와 동일한 대응 자세를 가져야만 한다. 진리는 절대적이며 배타적이다. 기록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구원에 다다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기독교는 공허한 상태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를 좋아한다. 그 단어만 되풀이하여 입에 올리면 그것이 마치 신앙인 양 오해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다. 신앙이 어리거나 교회 안의 불신자들은 그 단어만 자주 많이 사용하면 그것이 훌륭한 신앙인의 징표가 되는 듯이 생각하고 있다.
현대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개념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선교’사상이다. 그 단어만 본다면 매우 좋은 의미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지는 사상은 결코 올바르지 않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상상하고 있다. 그들의 하나님은 역사의 현장에서 항상 관여하며 일하는 존재로 설정되어 있다. 불공평하게 소외받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일하도록 행동적으로 배려하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소위 ‘하나님의 선교’인 것이다.
그들은 결국 위험한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할 수밖에 없다. 종교다원주의란 예수님만을 유일한 그리스도라고 하는 편협한 기독교적 주장을 포기하자는 말이다. 그들이 가장 많이 떠올리는 말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전능성이다. 즉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을 베풀 수 없다는 것이다. 여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일면 그럴듯 한 말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에는 나름대로 메시아 개념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독교의 예수가 아닌 메시아를 통해 구원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기독교 지도자들 가운데는 세상을 향한 타협주의를 기본적인 덕목으로 삼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다.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의 교만한 독선을 버리자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 과거의 참된 교회 지도자들이 자기만 옳다고 했던가!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기가 옳다고 주장했던 것이 아니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말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 말씀이 가르치고 있는 바를 교회 가운데 드러냄으로써 세상에 심판을 선포했다.
현대신학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기록된 성경의 절대성을 포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성경을 소위 고등비평하면서 성경의 기록 가운데 오류를 찾아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들은 그것이 마치 신학의 목적인 양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두렵고 오만한 행동인가 하는 것을 불신자들인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성경 말씀을 역사적 산물로 간주 한다. 구약 성경을 유대 민족이 가졌던 종교적 문서로 이해하며, 신약 성경을 당시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던 몇몇 예수의 제자들이 종교적 목적으로 기록한 책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에는 인간들에게 일반적인 지식과 지혜를 제공할 만한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즉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절대적 진리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6. 교회와 신학
(1)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 24)
여기에서 말하는 ‘신령과 진정으로’라는 말은 ‘성령과 진리로’라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과 진리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경배하게 됨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직접 연관될 수밖에 없다.
죄악에 빠진 인간들이 가장 오해하는 것들 중 하나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좋아하실 것이라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자기 취향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한다. 자기 판단에 즐거우면 하나님도 즐거워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인 인간이 좋아하는 것과 거룩한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도리어 더러운 인간들이 즐겨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실 것이란 점을 미리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켤코 세상으로부터 도입한 것으로써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할 수 없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그리스도께 온전히 속해 예배드리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는 것이다.
(2) 교회를 세우기 위한 신학
세상의 가치가 기준 없이 제멋대로 변천한다 할지라도 교회의 본질은 결코 변하지 말아야 한다. 참된 신학이 올바르게 확립됨으로써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공동체로 보존되기 위해서는 건전한 신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3) 교회의 표지와 직분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어야 한다. 목사는 그러한 일에 온 힘을 다해야 한다. 교회장로의 임무중 하나는 선포된 말씀을 통해 성도들이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성도들을 심방하는 것이 그 사역을 감당하는 소중한 방편이다. 또한 교회에서는 성례가 올바르게 시행되어야 한다. 성례에는 세례와 성찬이 있다. 세례는 성경을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고백하는 자들이 교회의 여러 증인들 앞에서 받게 되는 공적이며 단회적인 의례이다. 또한 성찬은 성도들이 자신의 생명이 세상의 양식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와 살에 달려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또한 교회에는 거룩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거룩성을 유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교회에는 권징 사역이 있다. 권징사역이 존재하는 이유는 잘못된 사람을 벌주기 위해서라기보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더럽혀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벨직 신앙고백서에는 올바른 말씀 선포, 올바른 성례의 이행, 올바른 권징 사역이 없는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니라 거짓교회라 단정짓고 있다. 거짓교회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 수 없으며 하나님을 경배할 수도 없다. 이 땅에 남아 있는 참된 성도들은 거짓 교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견제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것이 진정으로 교회를 위한 유일한 길임을 깨달아야 한다.
(4) 인본주의적 신학의 등장
인본주의적 신학의 특징은 단적으로 말하면 인간들이 주체가 되는 신학이다. 그것은 이성주의, 경험주의, 신비주의, 은사주의 등의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은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성경을 통한 확인은 불가능하다.
7. 종말에 대한 관심과 교훈
사도시대와 초대교회 시대에 살았던 신앙의 선배들은 항상 주님의 재림이 눈앞에 임박한 것으로 믿으며 살아갔다. 언에 그 일일 일어나게 될지 모르지만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항상 그런 신앙정신으로 살아간다면 이 세상에 미련을 둘 만한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 함께 버려질 쓰레기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세대의 재림 신앙은 관념화된 경향이 짙다. 관념적인 재림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믿지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의 날을 학수고대하는 것이 성도의 올바른 자세이다.
8. 천년 왕국설
사도요한은 천년 왕국에 대하여 구체적인 기록을 하고 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이 본문에 나타나는 천년이란 말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년이란 개념은 일종의 완전수의 개념을 지니고 있다. 이는 엄청나게 오랜기간 동안이라는 말과 바로 통한다.
요한은 계시록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성도들은 부활하여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기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의 자리에 서있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지상에서 고난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었다.
근대 이후에 들어서면서 소위 천년왕국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천년 동안 실제적으로 왕 노릇을 하게 될것이라는 생각이다. 그것은 특색 중 하나는 통치와 더불어 복지사회와 연관 된다는 점이다. 산업화와 의술의 발달,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간들은 낙관적인 세계를 꿈꾸기에 충분했다. 그로 인해 기독교인들을 위한 천년왕국이 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후천년설이다. 이는 천년 동안 기독교인들이 이방인들 위에 왕처럼 군림한 끝에 예수님의 재림하게 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산업화와 과학화에 따른 인간의 문명이 세계대전이란 이름으로 서구사회를 강태했을 때 그들은 강한 회의에 빠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과학문명이 발달해 기독교인들이 왕 노릇하며 살 수 있는 복지 왕국의 시대가 올 것이라 기대했던 것이 도리어 파괴의 주범이 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회의적인 생각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완전히 정리되었다. 인간의 과학문명이 결코 인간들에게 유익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그 와중에 대두된 생각이 소위 전천년 왕국설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 천년 왕국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과학 문명이 인간들을 파멸로 이끌어 갈것이며 그 끝에 예수님이 재림하여 천년동안 기독교인들이 이방인들 위에 군림하면서 왕 노릇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천년왕국에 대한 의미와는 다르다.
우리는 흔히 무천년주의라는 말을 종종 사용한다. 그 용어를 사용하는 자들은 제각가 입장이 다르다. 필자는 천년 왕국의 의미를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뒤이어진 보편교회 시대 전체로 이해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있는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이 세상에 심판을 선언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9. 새 하늘과 새 땅: 예수님의 재림과 창조의 완성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늘과 처음 땅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예비하시는 왕국은 타락한 기존의 피조물들과 연관성이 없는 영역이다. 이 지구상에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면 영원히 멸망당할 자들이 가야할 지옥의 영역은 어디인가 하는 점도 감안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시는 궁극적인 나라를 잘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성도들에게 허락될 새 하늘과 새 땅은 죄악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로서는 도전히 상상할 수 없는 초월적인 나라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감으로써 이 세상에 아무런 미련을 두지 않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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