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역사적 예수를 만나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성경 : 막 15 : 39
지은이:משׁה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하나님의 계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습니다. 일반계시는 직접적인 말씀의 전달과 같은 것이 아니라 자연현상이나 양심과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상 같은 것을 일반계시라 합니다. 특별계시는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영원한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져오고 있는데, 그래서 하나님은 계시가 인간의 모든 세대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영원한 말씀이 되어야 하기에 잘못 없이 기록으로 작성하고 섭리적인 보호로 성경을 허락하셨습니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써졌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감동으로 되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감동이란 말은, ‘저자들이 오류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도록 한 성령의 사역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영감에 대한 세가기 이론이 있습니다.
a. 기계적 영감설 : 이 말은 쉽게 말해 성경 저자들이 하나님이 불러 주시는 대로 기록하였다는 말입니다. 아주 초보적인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로버트가 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아니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기계적 영감설은 바르지 못한 이론입니다.
b. 역동(직관)적 영감설 : 18, 19세기 학자들이 많이 주장한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기계적 영감설에 반대하여 생겨난 이론인데, 성경 저작에 있어 저자의 일반 영감을 주장하고,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가 있었다는 관념을 부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일반계시의 선까지 끌어 내려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리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유익한 책이 만들어 버렸습니다.
c. 유기적 영감설 : 복음주의 안에서 용납하는 영감설로 하나님께서 저자를 기계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내적 존재 법칙과 잘 조화시켜 기록하게 하셨다는 이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자들의 성품과 기질, 은사와 재능 그리고 교육과 교양, 용어, 언어, 문체 등으로 이 모든 것을 그대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조명하시고 격려하셔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이론입니다.
TEXT와 Context
그렇기에 우리는 영원한 본문(TEXT)인 성경을 이해하려면, 즉 성경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려면 성경을 배경(Context)속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 문맥, 시대적 상황과 배경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숲을 보고 나무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을 내 주관적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예를 한 가지만 든다면, 한국교회가 너무도 좋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보통 문맥과 상황을 살피지 않으면 예수님만 믿으면 모든 일들이 잘 풀리고 승리하는 연출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13절을 이해하려면 11절 12절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즉, 사도바울은 부함에도 가난에도 배고픔에도 자신을 상황속에 맞추는 훈련이 되어 있어 어떤 상황속에서도 하나님 때문에 승리할 수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숲에서 나무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사회과학적인 측면에서 이해하지 못하면, 누가복음에 삭개오에 대한 해석이 이렇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삭개오가 뽕나무 위에 올라간 것은 키가 작아서다.’ 삭개오는 키가 작아서 올라간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공동체(Society)는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한 개인이 공동체에 속하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한 가족이란 개념도 여기에 속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가족이라 해서 꼭 혈통으로 이루어진 가족을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그 시대 가족은 ‘같은 생각과 같은 사상을 공유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가족이었습니다. 아무리 내 혈통이라도 공동체에 균형을 깨뜨리면 버려지게 되고, 반대로 혈통이 아니어도 생각이 같다면 양자로 입양하는데, 혈통 자녀와 편견이 없습니다. 이런 사회 울타리를 생각해서 삭개오는 그 사회에서 버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권력과 부를 가졌더라도 그 공동체에 속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 삭개오를 만난 예수의 행위는 놀라운 것이었고, 혁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0:25절 이하에 나오는 선한사마리아인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한 제사장, 레위인은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이방인이었고 돼지 취급을 받았던 사마리아인은 그를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고, 주인에게 돈을 주며 돌보아 달라고 부탁까지 합니다. 그때 예수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10:36). 예수는 누가 진정한 이웃(Society)인지 묻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역사적 예수를 만나려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질문부터 던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예수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
세계적인 잡지 Life지는 지난 1994년 12월호에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Jesus, Who was He?)”라는 제목으로 특집기사가 실렸습니다. 1994년을 결산하는 12월호에 표지 인물을 예수로 선정하고 예수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최근의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였는데, 예수의 모습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대다수의 크리스천들은 예수 그리그도를,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임을 주장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소크라테스처럼 이슬람교의 마호메트처럼 삶의 길을 예언한 선지자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 대다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합니다.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천국을 전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은 믿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부활과 메시아이심은 믿지 않습니다. 그저 공자와 부처와 같다고 평가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기 위하여, 학자들은 복음서에 담긴 예수의 말씀들이나 사역들의 진정성을 평가하는 판단 기준들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판단 기준들은 역사적 예수 연구의 규칙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학자들은 이것을 “진정성 판단 기준”(the criteria for authenticity)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규칙들은 역사적 예수 연구를 할 때 필연적으로 않을 수밖에 없는 자연법칙은 아닙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논리 규칙도 아닙니다.
19세기만 해도 그리스도의 생애나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책을 쓰는 것은 신약 학자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자서전적인 인상과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역사적 예수를 재현하려던 노력이 힘을 잃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역사적 연구를 통하여 실제 예수를 발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심각한 회의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윌리엄 브레데(william wrede), 역사가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 양식 비평가 같은 사람들이 예수의 실제 생애를 기록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복음서들이 객관적이고 냉정한 글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의 관점에서 기록되었음을 입증했습니다. 그래서 실제 예수에게 도달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마틴 켈러(Martin Kaher),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zer),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은 그런 ‘역사적’ 탐구의 결과가 신앙의 자산이 될 수 있는지? 역사적 예수 연구의 성격상 예수는 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예수의 인성은 중요하며 성경도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와 동시에 성경은 예수가 우리와 다른 죄가 없으시며, 성부에게서 왔으며, ‘독생자’이기에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세기의 신약 연구를 지배했던 경향은 약화되어 있을 때, 불트만의 제자가 그의 스승과 반대되는 의견으로 역사적 예수 연구에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1953년 10월 에른스트 케제만(Ernst Kaseman)이 한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논문에서 그는 역사적 예수와 신앙 예수를 완전히 불리시키는 것은 결국 가현론의 한 형태라고 지적하였습니다. 나아가서 케제만은 순전히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역사가가 나사렛 예수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에 ‘역사적 예수 연구’에 새로운 탐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역사적 예수는 존재하는가?
그러면 먼저 우리는 질문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는 진정 존재하였는가?’ 아니면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만든 허상인가?’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2000년전 유대 베들레헴에 나셨습니다(미5:2, 마2:6).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성경이 아닌 성경밖에 증거들을 찾아야 합니다.
A. 타키투스, 「연대기」(Annals) 타키투스는 로마의 역사가로서 주후 14-68년 사이의 로마 제국의 역사를 기록했고, 현재 「연대기」를 구성한 책들 중 몇 권이 남아 있는 않는데, 불행하게도 주후 29-32년의 역사가 빠져 있습니다. 예수의 생애와 관련하여 중요한 몇 해의 기록이 유실 된 것입니다. 하지만 타키투스는 주후64년 네로 치하의 로마 화제 사건과 관련하여 네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책임을 전가 시키고 박해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 중 예수에 대한 짤막한 글이 남아있었습니다.
그것은 창시적인 크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의 재위 기간에 폰티우스 필라투스 총독의 판결에 의해 사형당했다. 그 유해한 미신은 한동안 잠잠하다가 다시 살아났다. 그것도 그 악덕의 본산지인 유대에서뿐 아니라 이 세상의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것들이 모두 모여들고 유행하는 수도에서도 그러했다.
B. 수에토니우스, 「클라우디우스의 생애」주후 120년경에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줄리어스 시저로부터 시작해서 처음 12황제의 전기를 작성했는데, 그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대해서 논한 “열두 황제의 생애”(Living of the Twelve Caesars)라는 부분에서,
“유대인들이 크레스투스(Chrestus)의 선동을 받아 계속 문제를 일으키므로 황제가 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고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역사가는 수에토니우스가 ‘크레스투스’라고 쓴 실수였으며, 그 사건을 오해하고 있었다고 믿는다. 거기에 연루된 인물은 ‘크레스투스’가 아니라 ‘크리스투스’였고 그 소요는 ‘크리스투스’가 직접 주동한 것이 아니라, ‘제수스 크리스투스’ 때문에 야기된 것이었다.
C. 줄리우스 아프리카누스, 「연대기」3세기 초에 쓰인 이 글에서 저자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때를 이야기 한다.
막15: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마27: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눅23:44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여”
“탈루스(Thallus)는 그의 「역사」제3권에서 이 어두움을 일식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그것이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은 음력14일에 유월절을 지키며, 우리 구주의 수난은 유월절 전날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식은 달이 태양을 가릴 때만 일어난다”
D.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에는 예수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언급이 나옵니다. 이것은 ‘플라비우스의 증언’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 예수라는 현인이 살았는데, 만약 그가 사람이라면 현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놀라운 일들을 행했고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그를 추종하였다. 그는 메사아였다. 우리 중 가장 지체가 높은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였고, 이를 듣고 빌라도가 그에게 십자가형을 언도했지만, 그를 사랑한 사람들은 그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셋째 날에 그는 다시 살아나서 그들 앞에 나타났다. 이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그에 대하여 부활과 다른 많은 놀라운 일을 예언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을 계승해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종족들이 오늘날까지 존재하고 있다〔18.3.3(18.63-64)〕.
예수는 실제 실존한 메시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샌더스(E.P Sanders)는 고대 문헌들을 대할 때, 때때로 발생하는 근본주의의 위험성을 지적했습니다. 학자들은 요세푸스의 글이 정확한 사실 전체를 담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습게도 샌더스 자신이 이러한 실수를 범하고 맙니다. 샌더스는 마태복음 2:16에 기록된 헤롯이 베들레헴과 그 근처 남자 아이들을 죽이는 이야기의 역사적 진정성을 부정하게 됩니다. 샌더스는 그 근거로 요세푸스가 잔인한 헤롯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서술하면서도 이것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저자는 헤롯이 베들레헴과 그 인근의 아이들을 죽인 전통이 예수를 새 모세로 묘사하고자 하는 그의 신학적 강조점에 일치하였기 때문에 보존하였음을 생각지 못하였던 것입니다.그래서 우리는 1차 자료인 성경을 중심으로 예수를 찾아야 하고 만나야 합니다.
복음서와 예수 전승
역사적 예수에 대한 자료들은 극히 한정되어 있고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입니다. 이것을 ‘역사적 예수 1차 자료’라 부릅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를 위하여 우선 예수에 관한 자료들의 역사적 진정성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그리고 네 편의 복음서는 믿을만한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브루스 메쯔거 박사를 만나 답을 들어보겠습니다.
메쯔거는 프린스턴 신학 대학원의 교수였는데, 은퇴한 뒤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널리 알려진 사본학 교과서로 사용되는 The Text of New Testament 는 그의 수많은 저작들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는 세계성서공회연합회의 헬라어 신약 성서 편집 위원이었는데, 그와 함께 편집 위원회를 구성한 학자들은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오래 된 대학인 세인트 앤드류스의 매튜 블랙(M. Black), 독일 신약 성서 사본학 연구의 중심지인 뮌스터 대학의 알란트(K. Aland), 그리고 마르티니(C. M. Martini), 윅그렌(A. Wikgren)과 신약성서 원문을 복원하는 작업을 함께한 사람들 중 한명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사본입니다. 신약 성서 원본이 남아 있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가 가진 사본이 처음 기록 된 내용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메쯔거는 “그러나 고대의 다른 기록과 비교해 볼 때 신약 성경의 장점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사본이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서로 일치하는 사본들이 많을수록 그리고 특히 그것들이 다른 지리학적 장소에서 발견된 것이라면 사본들끼리 더 많이 교차 검토함으로써 원래의 문서가 어떤 내용을 갖추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당히 많은 사본들이 신뢰를 받는 이유와 고대의 다른 유명한 작품들과 어떻게 비교해 볼 수 있을까요?
“A.D 116년경 「로마 제국의 역사」를 쓴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가 쓴 첫 여섯권의 책은 오늘날 사본이 하나밖에 없는데, 그 사본은 A.D850년경에 복사되었습니다. 그러나 7권부터 10권까지는 분실 되었습니다. 그래서 타키투스가 정보를 수집해서 기록한 시기와 지금 현존하는 사본 사이에는 현격한 시기상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1세기 역사가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사」(The Jewish War)는 헬라어 사본이 아홉 개 있는데, 10, 11, 12세기에 쓰여졌습니다. 4세기 라틴어로 번역도니 기록물도 있고 11세기 12세기경으로 보이는 중세 러시아 사본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 성경 사본은 얼마나 될까요? 5000개 이상의 목록이 있습니다. 신약 성경은 산더미 같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본을 연구하면서 오래된 독법을 찾아 원본을 복원하는 신학이 사본학입니다. 많은 사본이 원문을 가능하도록 도와줍니다. 노먼 가이슬러나 윌리엄 닉스 같은 학자들은 “신약 성경은 고대의 어떤 책보다도 더 많은 사본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책보다도 더 순수한 형태로 99.5 퍼센트의 순수성을 가지고 보존 되었다.”
네 편의 복음서
그렇다면 우리는 한권의 복음서가 아니라 네 권의 복음서를 가지고 있는가? 한권으로 족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서로 같으면서도 다른 부분은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외경에 나타난 복음서들은 왜 정경에서 제외 되었는가?
a. 네 권의 복음서 존재하는 신학적 이유는 수신자들 때문입니다. 처음 예수님의 제자들과 증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구전으로 전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암기하는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구전으로 전해지던 복음이 변질되고 왜곡하는 것을 사도들과 증인들은 허락하지 않았고 역사적 예수를 담기 위해 복음서를 기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눅 1:2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서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예수의 증인들은 넘쳐나는 글들을 보며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확한 예수를 전하기 위해 붓을 들었고, 각 복음서는 각 공동체를 생각하며 기록되며 편집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어느 공동체 제자들이 편집하였는데,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마가는 베드로의 설교를 중심으로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을,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전기를 ‘데오빌로’에게 써서 보편적으로 올려놓았습니다. 요한복음은 선재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우주적이고 수직적인 차원에서 만물위에 존재하여 계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가 한권이 아닌 네 권이 있는 것은 축복이며, 네 권을 통하여 예수님의 다른 초상화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b. 왜 고대의 다른 복음서들은 성경에 들어오지 못했을까요? 초대교회는 어떤 책이 권위가 있고 어떤 책은 버릴 것인가에 대해 어떻게 결정했을까요? 거기에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원척이 있었습니다.
1. 그 책들은 사도적 권위가 있어야 했습니다. 기록 내용을 목격한 사도들이 직접 썼거나 아니면 사도들의 제자들이 썼습니다. 그래서 마가와 누가는 열두 제자가 아니었지만 초기 전승에 의하면 마가는 베드로의 협력자였고, 누가복음 저자는 어느 사도의 협력자나 증인이었을 것입니다.
2. 소위 신앙의 규범이라고 부르는 내용에 어느 정도 일치 하는가, 다시 말해서, 그 문서가 교회가 규범적이라고 간주하는 기본적인 기독교 전통과 일치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3. 어떤 문서가 당시 교회에 의해 일반적으로 계속 받아들여져 있었는가와 관련된 기준이었습니다.
프린스턴 신학교에 메쯔거 이전에 있었던 뛰어난 신학자 벤자민 워필드는 네 개의 박사학위를 가지고 1921년 죽을 때까지 조직 신학을 가르쳤는데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재 보존되어 있는 신약 성경의 본문과 고대의 다른 기록을 비교해 본다면, 신약 성경이 믿기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고 선포해야만 한다. 신약 성경은 굉장히 신중하게 기록 되었는데 그런 신중함은 의심할 여지없이 성경의 거룩한 말씀에 대한 진실된 경외감 때문에 생겨났다.....실제로 전해 내려와서 사용되고 있는 고대의 기록물 가운데서 본문의 순수성을 따져 본다면 신약 성경에 견줄 만한 것은 없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뛰어난 자료입니다. 가장 믿을 수 있고 완전하고 그리고 예수에 관한 신뢰할 만한 자료입니다. 이제 구약성경에 예언 된 몇 가지 예언들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비교하고 살펴보겠습니다.
예언과 성취
a. 동정녀 탄생
예언 : 사 7: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성취 : 마1:20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이사야와 예수 그리스도는 700년 사이를 두고 있습니다.
b. 유월절
1월 14일 날 양을 잡았다.
출 12:6 “이 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출애굽 연도를 계산할 때, 왕상6:1 솔로몬이 왕이 된지 4년을 기준으로 480년 전에 출애굽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때가 B.C 966년이기에 출애굽 연도가 B.C 1446년 전의 예언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하여 정확히 성취 된 것입니다. 신약 학자들이 말하기를 예수님은 크게 10번 정도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때가 아니었기에 주님은 죽으시지 않으셨는데, 왜냐하면 그 분은 구약에 예언대로 유월절인 1월 14일 날 죽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요18.39-40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저희가 또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더라”
유월절이면, 출애굽 해방을 기념하여 죄인을 풀어주는 특별 사면이 있다. 이 말씀은 유월절인 1월 14일에 놓아주던지 사형을 시키던지 할 것임을 말합니다.
불법재판
사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1월 14일이 명절인 유월절이기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는데,
막14.1-2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그러나 하나님은 그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 날짜를 어기시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십니다. 그 분께서 1446년 전에 예언을 성취 시키셨듯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도 그 분에 열심히 성취 시키실 것입니다. 또한 그분은 승천하시며 약속하셨습니다. 그날과 그 시는 알 수 없으나 다시 오시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잠자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신학자 ‘카알’
1. 재판은 기소, 심의, 재판, 선고 등 최소한 3일 이상의 기간이 소요됨 그러나 예수님의 재판에는 이를 무시함.
2. 재판은 낮에 해야하는데 예수님은 밤중에 진행하였다.(요18.28)
3. 안나스가 증인도 세우지 아니했다.
4. 안식일에 시체가 있으면 안되지만, 그들은 율법을 어기고 사형선고를 내렸다.
5. 거짓 증인을 내세웠고 죄를 찾지도 못했다.
6. 재판권이 없는 대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의 심문으로 기소된 예수님께 내린 사형 선고는 어처구니없는 불법 재판이다.
해의 시작
12:2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달을 기준으로 하는 달력이 있었는데, 이제는 유월절을 기준으로 해로 시작하는 월력을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어떤 예언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며 서력기원이 탄생하게 됩니다. 우리는 역사를 표시할 때, B.C 또는 A.D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새로운 서력기원이 나올 것을 성경은 예언한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즉흥적으로 어느 날 갑자기 나타 나신분이 아니십니다. 창세전부터 예정하시며 구약의 약속대로 신실하시게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가 처음 읽었던 마가복음 15:39절에서 예수와 아무 상관없는 이방인인 백부장도 그분에 십자가를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바라기는 여러분들도 살아계시며 이제 곧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기를 바랍니다.
참고문헌
올리버 버스웰 “조직신학 1.2” 웨스트민스터
루이스 뻘콥 “기독교 교리사” 성광문화사
루이스 뻘콥 “기독교 신학개론” 성광문화사
리 스트로벨 “예수는 역사다” 두란노
톰 라이트 “예수”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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