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의 다양성에 근거한 그리스도 탄생의 의미
김경진
(백석대학교)
1. 들어가면서
사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록한 복음서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다. 아쉽게도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과 최후의 복음서인 요한복음에는 탄생 이야기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마가복음 이후 복음서를 저술할 때 저자 마태와 누가는 전기적 요소를 강화하면서 메시야 예수님을 보다 자세하게 소개하고자 탄생 이야기를 수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태와 누가복음에 수록된 두 개의 탄생이야기는 매우 대조적이어서 두 복음서의 독특한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탄생 이야기를 다룸에 있어서, 한 번 진지하게 고려해 보아야 사실은 “왜 두 복음서에 각기 다른 이야기가 기록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다른 사건들이 그러하듯이 같은 사건을 다르게 해석하여 쓴 것이 아니라 어찌하여 전혀 다른 이야기를 기록하였는가? 물론 같은 사건을 다르게 해석하여 씀으로 해서 저자의 의도를 드러낼 수도 있었겠지만, 운신(運身)의 폭이 좁다면 아예 다른 이야기를 씀으로써 저자의 의도를 확실하게 표현하고자 하였을 가능성을 우리는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마태와 누가가 상대방의 전승(傳乘)을 전혀 몰랐기에 자신들만의 전승을 기록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또 하나의 가능성으로써 상대방의 전승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만의 전승을 사용하였을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왜 마태는 목자 이야기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동방박사 이야기를 사용하였고, 반대로 누가는 목자 전승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동방박사 전승을 사용하였는가를 아는 것은 각 복음서의 독특성을 간파할 수 있는 유용한 단서(端緖)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늘 우리 논의의 유익한 화두(話頭)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2. 마태복음의 동방박사 이야기
우선 마태복음의 경우 아기 예수 탄생 이야기 이후 동방박사의 방문이야기가 등장한다(마 2:1-12).
이 이야기에서 발견되는 강조점은 헤롯을 비롯하여 동포 유대인들이 아기 예수를 잡아 죽이려 시도한 반면, 오히려 이방인인 동방의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왔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동방박사의 방문은 마태복음의 족보에 수록되어 있는 이방 여인들(다말, 룻, 라합, 우리아의 아내)과 함께 마태복음의 보편주의적 성격을 제시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일반적으로 마태복음을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서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마태복음 전편에 도도히 흐르는 보편주의적 특징을 간과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에 담겨진 이방 보편주의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마태는 반(反) 유대인 정서를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마태복음 23장에서는 일곱 가지의 재앙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쏟아지고 있다. 또한 5-7장에서는 그들이 위선자의 대명사로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 수난기사 가운데 나오는 유대 지도자들에 대한 비난을 더할 수 있겠는데, 특히 마태복음 23:31-35에서 그들은 살인자로 표현되고 있으며, 이는 마태복음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것이다. 이러한 반 유대인 정서에서 마태복음이 또한 친(親) 이방적 시각에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둘째, 예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배척을 여과 없이 폭로하고 있다(마 8:12; 21:43). 이것은 마태 당시 그리스도인들과 회당(유대교)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써 복음의 보편적 성격을 드러내 보여준다. 물론 이 구절들이 이스라엘의 과거에 대한 심판적 성격을 띠고 있음이 사실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에 있어 유대인들의 자리를 제거해 버리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참고, 마 23:39).
셋째, 사복음서 중 오직 마태복음만 성(聖) 가족이 이방 나라인 애굽으로 피신한 이야기를 다룬다(마 2:13-15). 이는 이방 민족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넷째, 유대인을 주 대상으로 하고 있는 마태복음에서 정작 주님의 칭찬을 받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모두 이방인들이다(마 8:5-13, 로마 백부장; 마 15:21-28, 가나안 여인; 마 27:54, 로마 백부장).
다섯째, 복음서 전편에 흐르는 선교적 모티프를 지적할 수 있겠다. 이는 동방박사의 방문에서부터 시작되어, 복음 전파 대상의 범위가 차차 넓어지면서 그리스도의 빛이 이방인들에게 비춰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마 4:15; 12:18-21; 13:38; 21:43). 이런 맥락에서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마지막으로 유언처럼 남기신 명령이 “모든 족속”(직역하면, ‘모든 이방인들,’ pa,nta ta. e;qnh)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구절은 매우 의미 있는 것이다(마 28:18-20).
끝으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매우 유대적인 성격이 강한 족보에 이방여인들이 등장한다는 것 역시 마태복음의 보편주의적 성격에 대한 유력한 증거인 것이다.이처럼 다양한 이방에 대한 긍정적 묘사 가운데, 마태복음 서두에 위치한 탄생 사화(史話)에서 이방인인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찾아온 것은 그리스도 복음의 보편주의적 성격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것이다.
이와 아울러 마태복음의 동방박사 이야기가 전달하는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그들이 부요한 자들(plou,sioi)이었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그들이 아기 예수께 바치기 위해 가져온 황금, 유향, 몰약에 근거하여 그들의 부유함을 말하곤 하지만, 사실 그만큼 중요한 또다른 사실 하나는 그들이 고대 세계에 장기간에 걸쳐 여행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행이란 경제적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는 어려운 일임을 참작할 때 아마도 페르시아 출신이었을 동방 박사들이 고대 세계에 몇 달에 걸쳐 여행하였다는 것은 곧 그들의 경제적 여유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마태복음이 상대적으로 부유한 이들을 염두에 두었다는 여러 정황들이 발견된다.
우선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의 서두에 등장하는 지복(至福) 설교에서 마태는 “심령이”(tw//| pneu,mati)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음을 선언하지만(마 5:3), 누가복음의 평지설교에서는 그냥 가난한 자라고만 묘사되어 있다(눅 6:20). 또한 마태복음은 “의에”(th.n dikaiosu,nhn)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복이 있다고 선포하지만(마 5:6), 누가복음은 그냥 ‘주린 자’라고만 기록되어 있다(눅 6:21). 다시 말하면, 마태복음에서 가난과 배고픔 앞에 ‘심령’(pneu,ma)과 ‘의’(dikaiosunh,)가 추가됨으로 인하여, 그것은 더 이상 문자적이고 실제적인 가난이나 배고픔을 의미하지 않게 된 것이며, 이로써 부유한 이들 또한 복의 대상에 포함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외에도 마태만 신약에 등장하는 화폐 단위 중 가장 큰 단위인 달란트를 사용한다든지, 마태가 금과 은을 모두 28번 사용하는데 비해 마가는 한 번, 누가는 네 번 사용한다든지, 사도들을 파송하는 설교에서 마가는 돈의 단위로 동전(막 6:8; calko,j)을, 누가는 은전(눅 9:3, avrgu,rion)을 사용하는 반해, 마태는 금전(마 10:9, crusi,on), 은전 및 동전을 다함께 사용한 것 역시 마태가 가난한 이들보다 부유한 이들을 대상으로 그 복음서를 기록하였음을 시사한다고 하겠다.
그밖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부자’라고 묘사한다든지(마 27:57), 자신의 전 재산을 드린 과부와 대조적인 부자들을 상대적으로 비판하는 기사를 생략하였다든지(막 12:41-44), 감추어진 보물과 값진 진주의 비유(마 13:44-46) 등은 마태복음이 비교적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을 배려하여 기록된 복음서임을 가리키는 증거들로 제시될 수 있겠다.
결과적으로 주님은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가까이 하며 그들을 도왔지만, 결코 가난한 이들만의 구주가 아니라는 사실이 마태복음을 통하여 잘 드러나고 있다. 주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메시야이심으로 가난한 자들과 유대인들만을 선호하시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방인과 부자들의 주님도 되신다는, 그리하여 모든 이의 보편적 구주가 되신다는 진리가 마태를 통하여 전달되는 하나님의 메시지인 것이다.
3. 누가복음의 목자 이야기
누가복음에 기록된 탄생 사화는 부유한 동방박사들 대신에 가난하고 천한 목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눅 2:1-20). 일반적으로 우리는 시편 23편을 떠올리며 목자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인 개념을 갖고 있는데, 예수님 당대의 이스라엘에서 목자의 위치는 전혀 그와는 상반된 것이었다. 요아힘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의 저서『예수시대의 예루살렘』에 따르면, 주님 당대의 목자들은 “대부분 파렴치하고 도벽이 심했으며, 그들의 가축을 남의 땅으로 몰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그 가축에서 나온 소산을 착복하기도 했던 까닭에 ‘도둑질과 같은 직업’, 즉 사람을 부정직하게 만드는 직업이라서 자기 아들들에게 가르치지 않으려고 하였던 직업”으로 분류되었다. 이러한 나쁜 평판에 비례하여 그들은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소외된 삶을 살았다. 이처럼 사회의 밑바닥 계층에 속했던 이 가난하고 천박한 목자들에게 우주의 왕이신 구주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이 제일 처음 전달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져올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기왕의 인간 세상의 질서와는 전혀 다를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가 그동안 견지해온 가치관과 질서를 철저하게 뒤바꿔 놓을 것인데, 이런 진리를 우리는 흔히 ‘운명의 역전’(reversal of fortune)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물론 누가복음의 목자들은 유대인들이지만, 이방인들을 주 대상으로 하고 있는 누가복음에서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누가복음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사회 복음적 성격이다. 이에 대한 몇 가지 증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주님의 취임설교가 마가와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 회개를 강조하는 데 반해(막 1:15; 마 4: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누가복음에서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the Gospel for the Poor)으로 제시되고 있다(눅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가난한 자들의 목록을 다섯 번 언급하고 있는데, 그 때마다 가난한 자들은 실제적으로 억눌리고 고통 받으며 신체적으로 불우한 사람들과 함께 등장한다.
4:18,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
6:20-22,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핍박당하는 자
7:22, 소경, 앉은뱅이, 문둥이, 귀머거리, 죽은 자, 가난한 자
14:13, 가난한 자, 병신, 저는 자, 소경
14:21, 가난한 자, 병신, 소경, 저는 자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불우하고 어려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됨이 옳을 것이다. 아울러 이들 목록에서 가난한 자는 한 번만 제외하고는 항상 목록의 처음에 소개되고 있고, 예외인 그 한 번의 경우에서도 마지막에 결론적으로 소개되고 있음을 놓고 볼 때, 누가복음에서 가난한 자는 사실상 기타 다른 불우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한 모든 사람들을 포괄적으로 포용하는 대표적 존재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하면, 소경, 앉은뱅이, 귀머거리, 문둥이, 병신, 저는 자 등은 자기 힘으로 일하여 생활할 수 없는 자들로서 사실상 거지요, 구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자들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가난한 자는 불우한 자들의 특징을 대표하는 포괄적 용어로 사용되고 있고, 그밖에 다른 용어들은 가난한 자의 구체적 실례로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위에서 잠시 살펴본 바와 같이, 마태복음의 가난의 의미는 “심령이” 가난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축복하는 지복 설교에서 보듯이 영적이고 윤리적인 의미를 띠고 있는 데 반해, 누가복음에서는 그러한 용어들이 생략됨으로 인하여 문자적이고 실제적인 의미의 가난을 말함으로써 그 사회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셋째,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서보다 부자들에 대한 비판이 노골적으로 부각되고 있다(눅 6:24-26). 이러한 특징은 마태복음의 지복설교가 여덟 개의 복을 소개하는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네 개의 복(福)과 네 개의 화(禍)가 나란히 병행하여 기술됨으로써, 특히 부유한 자들을 비판적으로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될 수 있겠다. 사실 마태복음에서는 누가복음에 기록된 부자들에 대한 비판이 생략되고 오히려 구약에 근거한 또 다른 네 개의 복(마 5:5=온유한 자[겸손한 자들, 시 37:11], 마 5:7=긍휼히 여기는 자[미 6:8], 마 5:8=마음이 청결한 자[진실한 자, 비위선적인 자들, 시 24:3-4], 마 5:9=화평하게 하는 자[시 34:14])이 추가됨으로 인해 다분히 부자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고 보인다.
이 주제는 흔히 부자들의 재물의 축적, 낭비, 집착이라는 범주로 묶어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재물 축적으로는 어리석은 부자 비유(눅 12:13- 21), 재물 낭비에 대하여는 탕자의 비유(눅 15:11-32),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13), 부자와 나사로 비유(눅 16:19-31), 재물 집착에 대하여는 부자 관원 이야기(눅 18:18-30), 만찬의 비유(눅 14:15-24) 등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부자들에 대한 비판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부자들만을 위한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넷째, 구제에 대한 강조가 매우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마태복음과의 대조를 통해 밝혀지고 있는데, 대표적인 구절은 다음 두 구절이다: 누가복음 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비교, 마 6:19-20); 누가복음 11: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비교, 마 23:26).
이처럼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와 부자들에 대한 비판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사회 복음적 성격이 유난히 강조되는 누가복음에서 탄생 이야기에 부유한 동방 박사들이 아니라 가난한 목자들이 등장하는 것은 매우 적절한 연출이다. 우주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이 제사장이나 서기관 등과 같은 당대 사회의 권세 있고 부유한 자들이 아니라 사회의 밑바닥 계층에 속했던 가난하고 비천한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전달되었다는 것은 누가복음의 사회 복음적 성격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면 누가가 특별히 이처럼 가난한 자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고대사회에서 앞서 언급된 불우한 자들은 그 신체적 결함 및 비천한 신분으로 인하여 당대의 가정과 사회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사회·종교·경제·문화적으로 소외되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누가는 교회가 이렇게 가정과 사회로부터 추방당한 이들을 배척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포용하고 권면한다. 이런 맥락에서 누가는 시종일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견지하며, 바로 그것을 예수님의 사역의 중요한 특징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예수님 탄생 시 방문했던 인물들, 즉 동방박사와 목자들을 중심으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비교를 통하여 우리는 마태복음이 여유 있고 넉넉한 분위기인 반면, 누가복음은 가난하고 조금은 부족한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요컨대 누가복음 초두(初頭)에 기록된 목자의 등장은 구주 예수님의 지상사역의 성격과 장차 누가복음의 전개 방향에 대한 일종의 암시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누가복음에서 가난(ptwco,j)이 영적인 의미가 아니라 문자적이고 실제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가 된다.
4. 나가면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각기 기록된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두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각 복음서 기자를 통하여 어떤 교훈 및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였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마태복음을 통해서는 이방인들이었던 동방의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옴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온 인류의 구주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아울러 그들이 고대 세계에서 오랜 기간 동안의 여행이 가능할 정도로 부유하였다는 사실은 마태복음의 넉넉하고 풍요로운 정서와 맞물려 부자들의 구주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한편, 누가복음에서 가난하고 비천한 목자들에게 우주의 왕의 탄생소식이 제일 먼저 전달된 것은 주님이 어느 특정한 사람들을 위한 구주가 아니라, 신분과 성별 그리고 가난과 부(富)를 떠나서 온 인류의 메시야라는 명백한 증거이다. 특별히 천사들이 가난하고 비천한 목자들을 친히 찾아가 첫 번째 성탄절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가난하고 헐벗고 소외되어 우리의 따뜻한 사랑을 필요로 하는 불우한 이웃을 찾아가도록 인도하는 모범이 된다고 하겠다.
결론적으로 모두(冒頭)에서 제기한 화두에 대한 하나의 잠재적 답으로써, 마태와 누가는 상대방의 전승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복음서의 전체적 분위기에 적합한, 달리 말하면 저자의 해석적 의도에 적합한 자료를 선별하여 기술함으로써, 자신들만의 독특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였다고 표현할 수 있다. 풀어 말하면,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을 포용하기 위한 복음을 제시하기 위하여, 또한 부유한 자들을 배려하기 위한 목회적 의도를 표현하기 위하여, 마태는 가난한 유대인이었던 목자 전승 대신에 부유한 이방인이었던 동방박사 전승을 채택하였을 것이고, 반면 부유하고 권세 있는 이들만의 복음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포용하기 위한 복음을 제시하기 위하여(눅 4:18), 누가는 동방 박사 전승 대신에 목자 전승을 채택하였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이러한 주장을 감안할 때, 오늘날 그리스도의 탄생을 설교할 때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영감을 통해 각 복음서 기자들로 하여금 기록하게 한 두 복음서의 독특한 특징을 분명하게 파악하여, 이를 십분 살려 설교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두 복음서의 내용 및 강조점을 섞어서 설교하는 종합 혹은 통합적 시도이다. 복음서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기독교 초기에(주후 172년 경) 네 권의 복음서를 분해하여 주제별로 통합시킨, 시리아 그리스도인이었던 타티안(Tatian)이 만들어 낸 <디아테사론 diatessa,rwn>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물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사복음서에 산재해 있기에 복음서의 통일성이라는 시각에서 함께 고려하는 것은 마땅한 일일 수 있으나, 조화와 통합만을 강조한 나머지 각 복음서의 독특성(distinctive- ness)이 배제된다면 이 또한 옳지 않은 일이라 여겨진다. 그러므로 오늘날 설교자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탄생 이야기를 설교할 때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애초에 마태 혹은 누가를 통하여 전달하고자 한 교훈 및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Abstract
The Significance of Christ's Birth based on the Diversity of the Gospels
Kim, Kyoung-Jin
(BaekSeok University)
When we intend to grasp the significance of Christ's Birth recorded in Matthew and Luke, we come to be puzzled because two birth narratives such as the wise men narrative of Matthew and the shepherd narrative of Luke are quite different. We may ask why they made use of the different narratives unlike the other narratives in which they often interpreted the same incidents in different ways according to their particular theological intentions.
In this context, we may say simply that Matthew made use of the wise men narrative because he did not know the shepherd narrative in Luke's Gospel, but on the other hand we may also claim that Matthew used it on purpose even though he already knew the shepherd narrative, and vice versa. For obtaining our goal, we have reviewed the wise men narrative in terms of Matthew's unique features such as universalism and favouritism of the rich, and in turn the shepherd narrative in light of Luke's distinctive trait such as favouritism of the poor.
Out of our careful consideration of the two narratives mentioned above, we come to conclude that even though Matthew knew the shepherd narrative in Luke's Gospel he made use of the wise men narrative because he wished to present his gospel in favour of the rich christians in his community and the Gentile christians as well. on the other hand, although Luke already knew the wise men narrative in Matthew's gospel, he made use of the shepherd narrative because he desired to introduce his gospel in favour of the poor christians in his community.
Thus the birth narratives in Matthew and Luke is a typical case which shows us how to understand the diversity of the synoptic gospels in a proper way.
주제어:
마태복음, 누가복음, 그리스도의 탄생, 이방인, 유대인, 산상설교, 평지설교
The Gospel of Matthew, The Gospel of Luke, Christ's birth, gentiles, Jews, sermon on the mountain, sermon on the pl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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