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마태복음 5:21-48의 대조적 교훈들에 나타난 예수와 율법
양용의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1. 서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성경을 자신들의 삶의 규범으로 삼는다. 그런데 분량 상 성경 전체의 4분의 3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구약은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그 이해된 의미를 자신들의 삶에 적용하기가 매우 어렵다. 특히 구약 중에서도 그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모세오경(곧, 토라=율법)은 규정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데, 그 규정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는 더욱 어려운 문제로 드러난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의 어려움을 적절히 인식하지 못하며, 그 결과 구약의 율법 규정들을 크게 고민하지 않고 일관된 기준도 없이 상황에 따라 임의로 적용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리하여 어떤 규정들은 문자 그대로 지키려 하는가 하면, 어떤 규정들은 자신들의 삶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듯이 아예 무시해 버리는 식의 무원칙한 적용의 오류들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범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이 문제의 어려움을 깊이 인식하는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이들은 이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구약 율법을 읽을 때마다 적용상의 어려움과 씨름하다가 지극히 막연한 적용에 도달하곤 한다.
과연 그렇다면 구약 율법은 그리스도인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과연 그리스도인은 구약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만일 지켜야 한다면 전체 다 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일부만 지키고 일부는 무시해도 되는가? 율법을 지키되 문자적으로 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의 큰 원리만을 찾아서 적용하면 되는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질문들이 적절히 해결되지 않는 한 구약은, 특히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민거리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본 소고에서는 이처럼 중대한 문제에 대한 유용한 지침을 찾기 위하여, 이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대개 그 핵심적 위치를 차지해 왔던 한 단락, 곧 그리스도인이 율법 규정들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에 대한 일련의 구체적 예들을 규격화된 형태로 제공해 주는 마태복음 5:21-48의 대조적 교훈들을, 그 인접 단락으로서 예수와 율법 그리고 그리스도인과 율법의 관계에 대한 핵심 원리를 제시해 주는 5:17-20에 비추어 살펴보려 한다. 그리고 그 탐구 결과에 기초하여 구약 율법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미 있는 원리를 제시해 보려 한다.
그런데 본 소고에서 다루게 될 마태복음 5:21-48의 소위 “여섯 대조적 교훈들”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학자들의 다양하고 상세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으며, 그 결과 석의적인 기초 작업은 충분히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 소고에서는 본 단락에 대한 학자들의 세세한 석의적 논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며, 단지 우리의 논점 전개에 꼭 필요한 문제들에 논의를 집중할 것이다. 특히 해당 본문에 대한 자료, 기원, 편집 등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은 본 소고에서 대부분 생략할 것이며, 해당 본문 이해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마태 공동체의 역사적 상황에 대해서도 지극히 제한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또한 본 소고에서는 마태의 저자로서의 관심과 역사적 예수의 관심을 정밀하게 구분하려 하지 않으며, 논의의 초점을 마태가 제시하는 예수의 가르침에 맞추려 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마태 자신의 독특한 관심이 드러날 수 있는데, 이는 마태 공동체의 상황에 대한 제한된 논의와 함께 오늘날 상황에 예수의 가르침을 적용하는 데 어느 정도 시사점을 제공해 줄 것이다.
여섯 대조적 교훈들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늘 대두되는 문제는 예수의 대조적 교훈이 대조의 대상으로 삼는 바가 무엇인가이다. 이는 여섯 대조적 교훈들에서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반복해서 나타나는 도입구에 대한 해석, 그리고 각 대조적 교훈에서 예수께서 인용하시는 율법 관련 내용들에 대한 성격 규명에 따라 견해가 달라지는데, 전통적으로 그 대상으로 율법 그 자체와 랍비들의 해석적 전통 두 가지가 제안되어 왔다.
대조의 대상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예수의 대조적 교훈 자체의 성격인데, 이에 대해서는 상당히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어 왔다. 예수와 율법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입장에 따라 일련의 스팩트럼을 형성하는 이 견해들을 둘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경향에서 불연속성(또는 초월성)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순서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율법의 확증(F. Vouga); 2) 새로운 할라카(R. Hummel); 3) 율법에 대한 새로운(또는 올바른, 권위 있는) 해석(또는 이해)(R. Mohrlang, J.A. Overman, H.D. Betz, W.R. G. Loader, A.J. Saldarini 외); 4) 율법을 초월하여 그 목표(또는 의도) 성취(R. Banks, J.P. Meier, R.A. Guelich, R.T. France, W.D. Davies and D.C. Allison, 외); 5) 새로운(또는 메시아적) 율법(B.W. Bacon); 6) 율법으로부터의 단절(Marcion).
여섯 대조적 교훈들의 의미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위의 다양한 제안들이 이처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예수와 율법 사이의 관계는 5:17에서 좀더 명시적으로 기술되고 있다. 따라서 대조적 교훈들의 의미 규명은 자연히 5:17에 대한 이해와 긴밀하게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대조적 교훈들은 제자들(u`mi/n, “휘민”)에게 주어진 것인데, 이는 5:20에서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더 나은 의”와 연관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섯 대조적 교훈들의 의미 규명에 5:20에 대한 이해도 밀접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여섯 대조적 교훈들을 살펴보기에 앞서 5:17-20을 먼저 살펴보고, 그곳에 나타난 예수와 율법의 관계 및 그리스도인과 율법의 관계에 대해 먼저 정리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위에서 간략히 정리해 본 것처럼, 여섯 대조적 교훈들의 해석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 본문 자체에 대한 석의적 문제들 뿐 아니라 그 인접 문맥인 5:17-20에 대한 석의적 문제들까지 상호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래에서는 먼저 두 본문들을 각각 석의적으로 살펴보고, 그 석의적 결과들을 종합하여 여섯 대조적 교훈들에 나타난 예수와 율법의 관계, 그리고 그리스도인과 율법의 관계를 정리하려 한다.
2. 인접 단락(마 5:17-20)에 제시된 예수와 율법
앞에서 언급했듯이, 여섯 대조적 교훈들(마 5:21-48)에 나타난 예수와 율법의 관계 그리고 그리스도인과 율법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 인접 단락인 마태복음 5:17-20에 나타난 동일 주제들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 보는 것은 필수적이다. 본 단원에서는 각 절들에 대한 간략한 석의적 고찰을 통해 그 주제들을 정리해 보려 한다.
가. 마태복음 5:17-예수, 구약의 성취
본 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plhrw/sai(“플레로사이”)라는 단어 해석이다. 본 문맥에서 이 단어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상당히 다양한 의견들이 제안되어 왔다. 다음은 그 중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이다. 1) 율법의 영속적인 유효성을 “세우거나, 확증하다.” 2) 율법의 요구들을 예수 자신의 인격과 사역 가운데서 “완전히 실행하거나, 순종하다.” 3) 율법의 원래 의도, 진정한 의미와 정신, 또는 근본 원리를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설명하거나, 명백히 하다.” 4) 옛 율법을 초월하는 새로운 메시아적 율법을 제공함으로써 율법을 “완성하다.” 5) 율법이 내다보았던 궁극적 목표를 “가득 채우거나, 달성하거나, 성취하다.”
이 제안들 중 어느 한 가지 제안이 plhrw/sai의 의미를 완전히 드러낼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하지만 plhrw/sai의 목적어로 “율법”뿐 아니라 “선지자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처음 네 가지 제안들의 난점으로 지적된다. 게다가 여섯 대조적 교훈들은 처음 두 가지 제안의 타당성을 더욱 의심스럽게 만든다. 아래에서 살펴볼 것이지만, 여섯 대조적 교훈들은 율법의 확증이나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예증해 주는 것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다섯째 제안은 선지자들에도 적절히 어울린다. 뿐만 아니라 칠십인역에서 plhrw/sai는 시종일관 alm (“말레”, “가득 채우다”, “목표를 달성하다”)를 번역하는 데 사용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 역시 다섯째 제안을 지지해 준다. 이처럼 위의 제안들 중 다섯째 제안이 가장 적절하다는 점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다섯째 제안은 셋째와 넷째 제안을 부분적으로 수용한다. 율법의 궁극적 목표 달성은 실제로 율법의 원래 의도와 진정한 정신 그리고 근본 원리를 총체적으로 드러내 보여 주는 결과를 가져오며, 이러한 총체적 결과는 새로운 메시아적 율법으로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율법 성취는 이처럼 율법이 궁극적으로 내다보았던 목표를 달성하여 그 의도와 정신과 원리를 총체적으로 성취하는 것인데, 그 총체적 성취는 구약 율법을 초월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참조. 마 5:32, 34, 39). 그런데 예수의 율법 성취가 이처럼 율법 자체를 초월하게 되는 결과는 어떤 이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러” (katalu/sai, “카탈뤼사이”) 오셨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예수는 그러한 생각을 일축하신다. 예수의 율법 성취가 율법을 초월하는 측면을 갖기는 하지만, 그것은 폐하는 것과는 철저하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폐하는 것은 율법의 의도와 정신과 원리를 무시하는 것이고, 따라서 율법의 목표를 철폐하고 말살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성취는 그와 정반대이다. 율법의 성취는 율법의 의도와 정신과 원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형태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고, 따라서 율법의 궁극적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다. 물론 때때로 율법의 “성취”와 “폐함” 공히 문자적 규정을 무효화한다는 유사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 궁극적 목표는 이처럼 정반대인 것이다. 마태는 예수의 이러한 구분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예수의 율법 성취는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 우선적으로 예수께서 율법 자체가 내다보았던 궁극적 목표를 이루셨다는 점에 있어서 구약 율법과의 연속성의 요소를 포함한다. 하지만 예수께서 자신의 성취를 통해 율법 자체를 초월하며 그 결과 문자적 규정들을 무효화하기까지 하신다는 점에 있어서 불연속성(또는 초월성)의 요소를 포함하는 것이다. 여섯 대조적 교훈들은 이러한 두 가지 특징을 잘 예시해 줄 것이다.
나. 마태복음 5:18-예수의 성취에 따른 율법의 유효성의 한계
본 절은 논의의 초점을 17절의 “율법이나 선지자”에서 “율법”으로 좁히고 있다. 여기서 “율법”(tou/ no,mou, “투 노무”)의 지시 대상이 모세 율법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예수는 율법의 “한 점 한 획”(ivw/ta e]n h' mi,a kerai,a)도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율법의 손상될 수 없는 전체적 유효성을 강력하게 확증하신다. 하지만 이 확증은 중앙 주절을 앞뒤로 감싸고 있는 두 e[wj(“헤오스”, “…까지”) 종속절들을 통해 그 유효성의 한계를 수반하고 있다.
첫 번째 종속절인 “하늘과 땅이 없어질 때까지”(e[wj a'n pare,lqh| o` ouvrano.j kai. h` gh/)는 “결코”라는 의미의 수사학적 표현일 수도 있고, 또는 특정 시한을 지칭할 수도 있는데, 필자의 판단에는 전자의 용법이 더 타당해 보인다.
두 번째 종속절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에서 “모든 것” (pa,nta, “판타”)은 아마도 율법(또는 구약 전체)에서 실현되어야 할 것으로 예언된 메시아적 사건들로서(참조. 마 11:13), 메시아이신 예수의 전 생애, 곧 예수의 인격과 사역 전체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전체 구조에 비추어 볼 때, 마태는 예수의 시대를 그분의 탄생부터(1장) 재림까지(28:20) 연장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럴 경우 본 종속절에서 “모든 것”의 지시 대상은 단지 예수의 지상 사역 기간뿐 아니라 그분의 재림에까지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종속절의 시한(時限)에는 예수의 지상 생애를 통해 성취된 “이미”의 측면(참조. 5:17; 11:12-13)과 더불어, 그분의 재림 때에 완결될 “아직”의 측면(참조. 5:19-20; 7:21; 24:36- 25:46)도 포함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마태에게 있어서 율법은 구원사의 한정된 기간동안 그 유효성을 갖는데, 그 기간의 끝은 이미 예수의 지상 사역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아직 예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최종적 완결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예수의 성취 결과 생겨나게 된 율법의 연속성과 불연속성(또는 초월성) 사이의 긴장을 어느 정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다. 마태복음 5:19-제자에게 있어서 “이 계명들”의 유효성과 중요성
본 절은 18절과 접속사 ou=n(“운”, “그러므로”, “그렇다면”)에 의해 연결되고 있는데, 이는 본 절이 18절의 사상에 논리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동사 lu,ein(“뤼에인”)은 17절의 동족어 동사 katalu,ein (“카타뤼에인”, “폐하다”)에 비추어 볼 때 계명을 “불순종하다”라는 의미보다는 계명을 “제쳐두다”라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본 절 해석의 열쇠인 “이 계명들”(tw/n evntolw/n tou,twn, “톤 엔톨론 투톤”)은 18절의 “율법”(no,moj, “노모스”)을 지칭하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이 계명들”의 성격은 좀더 정확하게 규정되는 것이 필요하다. 필자의 18절 해석에 따르면, 구원사의 시간 선상에서 19절의 “계명들”의 지시 대상은 메시아적 성취 이후 시기에 속하는데 반해, 17, 18절의 “율법”의 지시 대상은 메시아적 성취 이전 시기에 속한다. 여기서 17, 18절의 no,moj(“율법”)가 19절에서는 evntolai, (“계명들”)로 바뀐 어휘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마태는 그러한 지시 대상의 변화를 시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어휘를 바꾸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19절의 “이 계명들”은 성취되기 이전의 “옛 율법”을 지칭한다기보다는 “성취된 율법”을 지칭한다. 이 “성취된 율법”은 “옛 율법”이 내다보았던 “새 율법”이고, 예수의 종말론적 지상 사역에 의해 이미 성취된, 그리고 그분의 재림에 의해 완성될 때까지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지켜질 것이 아직 기대되는 “메시아적 율법”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성취의 영향력 하에 살아가는 제자들이 율법의 규정들 중 “가장 작은 것 하나”까지도 예수의 지상 사역에 의해 성취된 의미로(참조. 5:21-48; 7:12) 그분의 재림을 내다보며(참조. 7:21-27; 19:17; 28:20) 신실하게 지키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따라서 마태는 두 쌍의 귀결절들(“그들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큰 자라 불릴 것이다.”)에서 메시아적 율법인 “이 계명들” 전체에 대한 그들의 태도 및 순종이 완성된 하늘 나라에서 제자들의 궁극적 지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선언한다.
이처럼 본 절은 예수에 의해 성취된 율법(곧, “이 계명들”) 전체의 지속적인 유효성을 잘 보여 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본 절은 예수의 율법 성취(17절)에 대한 율법경시론적 해석을 경계하도록 해 준다. 마태가 율법 문제를 다루는 가운데 이러한 경고적 진술을 포함시킨 것은 아마도 마태 공동체 내의 율법경시론적 경향을 염두에 둔 것이었던 것 같다.
라. 마태복음 5:20-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더 나은 의”
본 절에서 예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앞으로 완성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제시하신다. 마태복음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유대교 적대자들을 대표하는 인물들로서, 그들의 종교는 율법주의와 외식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들은 예수께 대한 공격을 주도하며, 그 결과 예수의 날카로운 질책을 받는 자들이다. 이제 마태는 그의 관심을 공동체 내부의 율법경시론적 경향으로부터(19절), 외부의 유대교 율법주의적 대적들에게로 돌리고 있는 것 같다.
본 절의 핵심 구절인 “너희 의”(u`mw/n h` dikaiosu,nh, “휘몬 헤 디카이오쉰네”)의 해석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중요한 질문은, 제자들의 의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 사이의 비교가 질적인 것(곧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구원론적 관계의 문제)인가 아니면 양적인 것(곧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규범적 행동의 문제)인가이다. 5:21-48의 대조적 교훈들에 비추어 볼 때, 제자들의 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양적인 향상을 필요로 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구약성경에서 “의”(dikaiosu,nh)와 연관된 세 단어 qdc(“체덱”), hqdc(“츠다카”), qydc(“차디크”)의 용법이 인간의 행동과 관련된 양적 의미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관련된 질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고, 신약성경 및 고대 헬라문학에서 dikaiosu,nh의 용법도 양적 의미뿐 아니라 질적 의미도 수반한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제자들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와 질적인 차이도 갖는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사실 제자들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그 질적 차이에서 발견된다.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더 나은 의”는 “하나님의 통치에 기초한”, 그리고 “그것에 의해 가능케 된” 행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통치적 관계는 율법과 선지자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 메시아 예수를 통해 가능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의 의는 하나님 나라의 의라고 특징지어질 수 있다. 하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였으며, 따라서 그들의 의는 이러한 근본적인 관계를 결여한 율법주의적인 자기(自己) 의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그 결과 그들의 의는 메시아께서 도래케 하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였고, 따라서 제자들의 의가 그들의 의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기대되는 “더 나은 의”는 이처럼 하나님 나라에 그 시발점을 두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그 목표점으로 삼는다. 또한 제자들의 “더 나은 의”는 하나님 나라의 결과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 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의는 구약 율법 규정들이나, 더 나아가서 예수에 의해 제시된 윤리적 교훈들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지켜 행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여기서 요구되는 “더 나은 의”는 윤리적 규범들에 대한 문자적 준수 이상의 것으로서, 하나님의 통치에 기초한 의이며, 그 통치의 결과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행하는 행동을 수반하는 의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대하시는 더 나은 의는 하나님 나라의 의라는 점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적 자기 의보다 질적으로 더 우월하고, 하나님의 통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행동, 곧 완전을 이룬다는 점에서(참조. 5:48)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결의론적인 의보다 양적으로 더 우월하다.
마태는 5:17-20에서 아마도 율법경시론(19절)과 율법주의(20절)라는 이중적인 위험에 직면한 그의 공동체에게 예수의 구약 율법 성취 사실(17절)과 그 의의(意義, 18절) 그리고 그 성취에 따른 제자의 마땅한 반응(19, 20절)을 집약적으로 설명해 준 것 같다. 좋은 제자는 19절과 20절의 상호 보완적인 경고들에 대해 공히 충분한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율법주의 뿐 아니라 율법경시론에 대해서도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좋은 제자는 구약성경 전체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17, 18절) 메시아 예수를 통해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지만(20절), 메시아로 오신 예수에 의해 성취된 하나님의 통치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행동도 결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19절).
3. 도입 형식구에 시사된 예수와 율법의 관계
마태복음 5:21-48의 여섯 대조적 교훈들과 그 직전 단락인 마태복음 5:17-20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부인할 수 없다. 마태가 여섯 대조적 교훈들을 5:17-20에 바로 뒤에 위치시킨 것은 아마도 앞 단락에서 제시된 예수와 율법 사이의 관계(17, 18절) 및 제자들과 율법 사이의 관계(19, 20절)에 대한 원리들이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예들을 제공해 주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5:17- 20에 대한 논의의 결론들의 타당성은 이 대조적 교훈들에 적용됨으로써 확증되어야 할 것이다.
여섯 대조적 교훈들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가장 먼저 대면하게 되는 과제는 여섯 대조적 교훈들 모두에서 그 형태는 약간씩 다르나 계속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는(21-22, 27-28, 31-32, 33-34, 38-39, 43-44절) 도입 형식구를 해석하는 것이다. 이 형식구의 완전한 형태는 첫째와 넷째 대조적 교훈들에서 발견된다: VHkou,sate o[ti evrre,qh toi/j avrcai,oij\…evgw. de. le,gw u`mi/n(“옛 사람들에게 말하여진 것을 너희가 들었다…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21-22, 33-34절). 이 형식구는 각각 윤리적 규범들을 이끄는 두 개의 도입구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째 도입구는 두 동사를 중심으로 두 부분(VHkou,sate+o[ti evrre,qh toi/j avrcai,oij, “너희가 들었다.” “옛 사람들에게 말하여진 것”)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첫째와 넷째 대조적 교훈에서는 완전한 형태(VHkou,sate o[ti evrre,qh toi/j avrcai,oij, “옛 사람에게 말하여진 것을 너희가 들었다.”)로, 둘째, 다섯째, 여섯째 대조적 교훈에서는 중간 형태(VHkou,sate o[ti evrre,qh, “말하여진 것을 너희가 들었다.”)로, 셋째 대조적 교훈에서는 약식 형태(VErre,qh, “말하여졌다.”)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둘째 도입구(evgw. de. le,gw u`mi/n,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는 여섯 대조적 교훈들 모두에서 동일하게 반복된다.
가. 첫째 도입구(마 5:21, 27, 31, 33, 38, 43)
첫째 도입구의 전반부인 “너희가 들었다.”(hvkou,sate, “에쿠사테”)는 셋째 대조적 교훈(31-32절)을 제외한 다섯 대조적 교훈들을 맨 앞에서 이끌고 있다. 이 표현은 다음 몇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1) 랍비들의 용법에 의거한 이해로서, “너희가 전통으로 받아들였다”(m.Sanh. 11.2; m.Eduyoth 5.7). 2) 역시 랍비들의 용법에 의거한 이해로서, “너희가 @문자적으로 잘못# 이해하였다”(Mekh. on Exod. 19:20). 3) 1세기 당시 유대인들의 통상적 경험을 염두에 둔 이해로서, “너희가 @회당에서 구약성경을 읽는 것을# 들었다”(요 12:34; 참조. 롬 2:13). 이 견해들 중 어느 것이 타당한지는 본 도입구에 의해 소개되는 여섯 논제들의 성격에 의해 판명되어야 하는데, 다음 단원에서의 논의가 보여 주겠지만, 본 도입구에 의해 소개되는 내용들이 율법에 관한 전승이나 그릇된 이해가 아니라 구약 율법 자체라는 사실은 처음 두 이해보다 세 번째 이해의 타당성을 지지해 주게 될 것이다. 다만 회당에서 구약성경이 보통 해석과 더불어 읽혀졌으리라는 가능성을 인정한다면(참조. 탈굼), “너희가 들은”(hvkou,sate) 내용에는 구약 율법에 더하여 해석적 요소가 부수적으로 포함될 수도 있을 것이다(참조. 5:43).
하지만 첫째 도입구의 실제적인 비중은 두 번째 동사 evrre,qh(“에레떼”, “그것이 말하여졌다”)에 주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 동사가 여섯 대조적 교훈들 모두에서 반복되고 있을 뿐 아니라, 둘째 도입구의 동사 le,gw(“내가 말한다”)의 대칭을 이루는 동사가 hvkou,sate (“너희가 들었다”)라기 보다는 evrre,qh(“말하여졌다”)라는 점은 이러한 가능성을 지지해 준다. evrre,qh는 랍비 문학에서 구약성경 구절들을 인용할 때 가장 자주 사용되는 rman(“네에마르”, “그것이 말하여졌다”)의 용법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evrre,qh는 신적 수동형으로서 하나님을 주어로 갖는 것이 거의 분명하다. 그렇다면 “말하여진 것”의 지시 대상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구약 율법 자체일 것이다. 아래에서 살펴볼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과 예수의 말씀이 대응을 이룬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이는 예수 자신의 권위와 상관된 것으로서, 이것이 갖는 의의에 대해서는 둘째 도입구와 관련하여 좀더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evrre,qh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비추어 볼 때, “옛 사람들에게”(toi/j avrcai,oij, “토이스 아르카이오이스”)는 우선적으로 시내 산 세대를 지칭하며 부차적으로 그 이후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첫째 도입구의 “옛 사람들에게 말하여진 것”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던 율법을 지칭한다.
이제 첫째 도입구는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의역될 수 있다: “너희는 하나님께서 시내 산 세대에게 말씀하였던 바를 (회당에서 서기관들의 해석과 더불어) 들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첫째 도입구(특히, hvkou,sate)는 구약 율법이 회당에서 낭독될 때 첨가되곤 하였던 전통적 해석과 부차적으로나마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참조. 5:43절). 하지만 첫째 도입구의 주된 초점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말씀, 곧 구약 율법 그 자체에 맞추어져 있다. 이는 17-20절 전체에서의 주된 논점이 구약 율법 자체의 성취자로서의 예수라는 점과도 잘 들어맞는다.
나. 둘째 도입구(마 5:22, 28, 32, 34, 39, 44)
둘째 도입구(evgw. de. le,gw u`mi/n, “그러나 나는 너희들에게 말한다.”)는 여섯 대조적 교훈들에서 동일하게 반복해서 나타난다(마 5:22, 28, 32, 34, 39, 44). 이 도입구의 표현 자체는 랍비 문학에서 그 평행구들이 발견된다. 랍비들은 rmwa ynaw(“바아니 오메르”, “그러나 나는 말한다)라는 도입구와 더불어 자신들의 율법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다른 랍비들의 해석을 반박하였다(예. Sipre Num. 11.21-22 par. 95; Sipre Deut. 6:4-5 par. 312). 하지만 이 경우 반박의 대상이 되는 다른 랍비들의 해석은 일정한 도입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게다가 그 어떤 랍비도 자신의 가르침을 구약 율법 자체와 대조적으로 비교하지 않는다. 그들은 구약 율법의 권위 아래서 단지 다른 랍비들의 해석과 대조되는 자신의 해석을 제시하기 위해 이 도입구를 사용할 뿐이다. 이에 반해 예수는 이 도입구를 통해 다른 랍비들처럼 율법에 대한 다른 해석들과 대조되는 자신의 해석을 제시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자신의 교훈을 구약 율법 자체와 대조적인 모습으로 제시하신다. 이렇게 볼 때, 현 문맥에서 사용된 둘째 도입구(evgw. de. le,gw)는 그 형식면에서는 랍비적 전례를 찾아볼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내용면에서는 그 어떤 유대교 문학에서도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지극히 독특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교훈이 율법 자체와 대조를 이룬다는 사실은 예수의 특별한 권위를 전제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예수의 권위는 이전의 어떤 랍비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권위로서, 율법을 뛰어넘는 권위이거나 최소한 율법과 동등한 권위이다. 예수의 이러한 권위는 둘째 도입구의 evgw,(“에고”, “나는”) 사용에서도 인상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인칭대명사 evgw,는 강조적 위치인 도입구의 맨 앞에(evgw. de. le,gw u`mi/n) 여섯 번 모두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다. 사실 이 유사 어구(곧,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에서 evgw,가 사용된 경우는 복음서들 중 마태복음에서밖에 발견되지 않으며, 마태복음 내에서도 여섯 대조적 교훈들을 제외하고는 16:18에서 베드로에게 결정적인 선언을 하실 때 유일하게 한 번 더 발견될 뿐이다. 그렇다면 evgw,가 도입구 맨 앞에서 이처럼 특이하게 계속 반복해서 사용된 것은 아마도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 자신의 중요성, 특히 율법과 대조되는 교훈을 발하시는 예수 자신의 권위를 지극히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둘째 도입구의 “너희에게”(u`mi/n, “휘민”)는 제자들을 지칭한다(참조. 5:1). 이 여격 대명사는 첫째 도입구의 “옛 사람들에게”(toi/j avrcai,oij)와 구조적으로 대칭을 이룬다. 그렇다면 예수의 제자들은 시내 산 세대 이래 이스라엘 백성과 대칭을 이룬다. 이러한 대칭 구조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과 예수의 교훈의 대칭 구조와 더불어 상당히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예수의 교훈이 구약 율법을 성취한 새 율법이듯이, 예수의 제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성취인 새 이스라엘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기초하여 두 도입구의 대칭적 관계를 다음 도표를 통해 정리해 보도록 하자.
@하나님께서# |
그러나 @궁극적으로#
(성취) |
나는 (=예수) |
옛 사람들에게 (=시내 산 세대; 이스라엘) |
너희에게 (=제자들; 새 이스라엘) | |
말씀하신 것을 (=율법) |
말한다. (=새 율법) | |
너희가 @회당에서# 들었다 |
@그러니 너희가 들어라# |
이 도표를 통해 우리는 화자로서 예수의 실제 대칭 대상이 어떤 이들이 제안하는 것처럼 모세가 아니라 암시적으로나마 하나님 자신임을 주목하게 된다. 물론 마태는 화자로서 예수의 대칭 대상을 하나님으로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지만, 첫째 도입구에서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화자이시라면, 둘째 도입구에서 화자이신 예수는 하나님 자신과 대칭을 이루기 때문이다. 마태의 이러한 대칭 구조는 예수의 신적 권위를 암시적이지만 매우 인상적으로 시사해 준다. 만일 화자로서의 예수의 역할이 단지 모세와의 연관성 속에서 규정된다면, 이는 그분의 이러한 신적 권위와 역할을 심각하게 제한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명확히 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예수의 교훈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 둘은 상반되거나 충돌하는 부조화의 관계로 연결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예수께서 하나님과 상반된 주장을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관계가 단순한 일치나 병렬 또는 첨가를 보여 주는 순접의 관계도 아니다. 실제로 예수의 대조적 교훈들의 내용은 구약 율법과 상당히 구별되고 그것을 능가하는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는 이러한 연결성과 초월성을 함께 아우르는 관계를 예수께서 율법에 내재된 하나님 자신의 목적을 이루신다는 성취적 관계로 제시하고 있다. 다음 단원에서 살펴볼 것이지만, 그 둘 사이의 성취적 관계는 내면화, 확장, 철저화와 더불어 무효화의 의미까지를 담는 진전과 초월을 통한 목표 달성의 관계로 제시된다. 마태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과 예수의 교훈을 연결해 주는 대조적인 대칭 구조를 통해 그 둘 사이에 긴밀하게 연결되면서도 뚜렷이 구별되고 진전되는 성취적 관계를 효과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위의 논의에 비추어 볼 때, 구약 율법과 예수의 교훈을 이어주는 접속사 de,(“데”)는 부조화를 전제하는 역접의 의미나 단순한 일치를 보여 주는 순접의 의미가 아니라, 진전과 목표 달성의 성취적 의미를 담아내야 한다. 그렇다면 de,의 의미는 “그러나 궁극적으로” 정도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본 단원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두 도입구들은 바로 앞 단락(5:17-20)의 중심 주제인 예수의 율법 성취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몇 가지 지침들을 제공해 준다. 이제 다음 단원에서는 여섯 대조적 교훈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그러한 지침들의 구체적인 내용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4. 여섯 대조적 교훈들(5:21-48)에 나타난 예수와 율법
여섯 대조적 교훈들은 그 내용에 따라 첫째, 둘째, 여섯째 교훈들과 셋째, 넷째, 다섯째 교훈들로 나누어질 수 있다. 아래 논의에서 살펴보겠지만, 전자의 세 교훈들에서는 구약 율법 자체를 무효화하는 요소가 발견되지 않는데 반해, 후자의 세 교훈들에서는 구약 율법의 규정들을 무효화하는 요소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아래 논의에서는 여섯 대조적 교훈들을 이러한 구분에 따라 두 부류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가. 첫째, 둘째, 여섯째 대조적 교훈
(1) 첫째 대조적 교훈: 살인(5:21-26)
21절의 논제는 두 개의 진술들을 포함한다. 그 첫째 진술(21b절-ouv foneu,seij, “우 포뉴세이스”, “살인하지 마라”)은 십계명 중 제6계명의 인용으로서(출 20:13; 신 5:18), 구약 율법 자체로부터 온 것이다. 둘째 진술(21c-d절-o]j dV a'n foneu,sh| e;nocoj e;stai th|/ kri,sei,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을 것이다”)은 구약 율법으로부터 직접 온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둘째 진술이 당대 랍비들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이 진술의 내용은 출애굽기 21:12, 레위기 24:17, 민수기 35:16-31, 신명기 17:8-13 등에 나타나는 살인에 대한 형벌 규정들의 내용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그 실제적 의미에서 거의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 둘째 진술은 그 자체가 구약 율법으로부터 직접 온 것은 아니지만, 살인에 대한 율법의 여러 형벌 규정들의 요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럴 경우 예수의 대조적 교훈의 대조 대상은 율법에 대한 당대 랍비들의 해석이나 전통이 아니라 구약 율법 자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2절의 예수의 대조적 교훈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기 형제에게 화내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게 되고, 자기 형제에게 라카라고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공회에 잡혀가게 되며, 바보라고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불타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상당수의 학자들은 이 대조적 교훈의 요구들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고 제안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구약성경(예. 잠 19:19)과 유대교 문학(예. 에녹2서 44:2-3; 1QS 6.25-27; m.Abot 3.11; b.Qidd. 28a)으로부터 예수의 요구들의 평행구들을 제시한다. 하지만 아무런 제한 규정도 없는 그분의 절대적 요구들은 제안된 구약성경과 유대교 문학 평행구들의 요구들을 훨씬 더 능가하며 “따라서 진정한 평행구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더욱이 살인에 관한 계명을 분 냄과 모욕적인 말에 연결시킨 점은 예수의 요구들을 더욱 두드러지게 해 준다. 그런데 예수의 이러한 절대적 요구들은 일반 사람들은 물론이고 구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곧, “옛 사람들”)이 지킬 수 있는 수준을 뛰어 넘는 것들로서,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 요구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통해서만 지킬 수 있는 것들이며, 따라서 메시아 예수와의 회복된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제자들(곧, “너희”)에게만 주어진 것들이다.
첫째 대조적 교훈에 나타난 예수의 성취적 특징은 어렵지 않게 정리될 수 있다. 우선적으로 예수는 살인 금지 규정(21절)을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으며 제자들에 대한 그 규정의 유효성을 그대로 인정하신다. 하지만 예수는 살인 금지에서 훨씬 더 나아가서 살인을 일으키는 마음의 분노와 그로 말미암은 모욕적인 말까지도 금지함으로써, 구약 율법의 요구를 마음의 근원적인 문제로까지 내면화하고 그 적용 범위를 감정과 말의 문제로까지 확대하신다(22절).
(2) 둘째 대조적 교훈: 간음(마 5:27-30)
27절의 논제(ouv moiceu,seij, “우 모이큐세이스”, “간음하지 마라.”)는 명백히 십계명 중 제7계명의 인용으로서(출 20:14; 신 5:18), 구약 율법 자체로부터 온 것이다. 그리고 첫째 대조적 교훈과 달리 더 이상의 첨언도 없다. 따라서 예수의 대조적 교훈의 대조 대상이 율법에 대한 당대 랍비들의 해석이나 전통이 아니라 구약 율법 자체인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학자들은 28절의 대조적 교훈(“정욕을 품고 여인을 바라보는 자는 누구든지 그 마음속에서 이미 그녀와 간음하였다.”)에 대한 풍부한 평행구들을 구약성경(예. 출 20:17; 신 5:21; 잠 6:25; 욥 31:9-12)과 유대교 문학(예. 집회서 9:5, 8; 23:4-6; 26:9-11; T.Ben. 8.2; T.Iss. 4.53; 7.2; 1QS 1.6; CD 2.16; 희년서 20:4; m.Niddah 2.1; Mek. Simeon on Exod. 10:14; Lev.Rab. 23; Sifre Num. 15.37-41 par. 115; b.Niddah 13b; b.Hal. 1) 그리고 헬라 문학으로부터 제시해 왔다. 이러한 평행구들이 인상적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28절의 예수의 대조적 교훈은 29-30절의 엄중한 부가적 교훈들과 직접 연결됨으로써, 그 엄중성과 철저성에 있어서 거의 절대적이다. 그런데 구약성경과 예수 당대 이전 유대교 문학과 헬라 문학의 평행구들에서는 이러한 엄중성과 철저성을 찾아보기 힘들며, 따라서 예수의 대조적 교훈과 진정한 평행을 이루지 못한다. 그런데 예수의 이러한 엄중하고 철저한 절대적인 요구들은 일반 사람들은 물론이고 구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곧, “옛 사람들”)이 윤리적 노력만을 통해 지키는 것이 불가능한 것들로서,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 요구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통해서만 지킬 수 있는 것들이며, 따라서 메시아 예수와의 회복된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제자들(곧, “너희”)에게만 주어진 것들이다.
둘째 대조적 교훈에 나타난 예수의 성취적 특징 역시 어렵지 않게 정리될 수 있다. 우선적으로 예수는 간음 금지 규정(27절)을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으며 제자들에 대한 그 규정의 유효성을 그대로 인정하신다. 하지만 예수는 간음 금지에서 훨씬 더 나아가서 간음을 일으키는 마음의 음욕과 그 음욕의 마음으로 다른 남자의 아내를 보는 것까지도 금지하심으로써, 다시 한번 구약 율법의 요구를 내면화하고 그 적용의 범위를 확대하실 뿐 아니라 철저화하신다(28절). 특히 예수는 자신의 교훈에 엄중한 경고들(29-30절)을 첨언하심으로써 금지를 거의 절대화하신다.
(3) 여섯째 대조적 교훈: 이웃 사랑(마 5:43-48)
43절의 논제는 두 개의 진술들을 포함한다. 그 첫째 진술(43b절-avgaph,seij to.n plhsi,on sou, “네 이웃을 사랑하고”)은 레위기 19:18의 인용으로서, 구약 율법 자체로부터 온 것이다. 하지만 첫째 진술에 부가적으로 이어지는 둘째 진술(43c절-kai. mish,seij to.n evcqro,n sou,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은 구약성경으로부터의 인용구가 아닐뿐더러 구약성경의 가르침의 요약으로 간주되기도 어렵다. 이 부가적인 진술은 아마도 신명기 7:2, 5; 23:3-6; 25:19; 30:7(참조. 삿 5:31; 왕하 2:23-24; 시 35:4-8; 137:8-9; 139:21-22)과 같은 구절들로부터 추론된, 당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전통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경향은 쿰란 공동체 규칙에서 잘 입증되고 있다(1QS 1.3-4, 9-11; 9.21-22). 그럴 경우 예수의 대조적 교훈의 대조 대상은 우선적으로 구약 율법 자체이지만(43b절) 부차적으로는 여섯 논제들 중 아마도 유일하게 당대 유대인들의 추론적 이해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43c절). 그렇다면 예수의 여섯째 대조적 교훈은 우선적으로 율법 자체의 성취적 의미를 드러내 보여 주지만, 부차적으로는 당대의 그릇된 율법 이해에 대한 교정적 기능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학자들은 44절의 대조적 교훈(“너희 원수들을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에 대한 평행구들을 구약성경(예. 출 23:4; 레 19:34; 잠 24:17; 25:21)과 유대교 문학(예. 에녹2서 50:4; t.BabaMesia 2.26-27; Gen.Rab. 38.3; Lev.Rab. 19.17) 그리고 헬라 문학으로부터 이끌어 낸다. 하지만 상당수의 학자들은 예수의 요구들이 두드러지게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이며 명령적이라는 성격에 주목함으로써 그것들은 유대교 문학과 헬라 문학에서 아무런 진정한 평행구도 갖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과연 사람이 어떻게 원수까지도 이처럼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가? 이러한 사랑은 일반 사람들은 물론이고 구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곧, “옛 사람들”)이 윤리적 노력만을 통해 행할 수 있는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사랑의 명령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 명령은 하나님의 통치를 통해서만 지킬 수 있는 것들이며, 따라서 메시아 예수와의 회복된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제자들(곧, “너희”)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여섯째 대조적 교훈에 나타난 예수의 성취적 특징은 약간 복합적이다. 우선적으로 예수는 이웃 사랑 규정(43b절)을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으며 제자들에 대한 그 규정의 유효성을 그대로 인정하신다. 하지만 예수는 이웃 사랑에서 훨씬 더 나아가서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것까지 요구하심으로써, 구약 율법의 사랑 요구의 범위를 확대하시고 철저화하신다.
한편 예수는 유대인들의 그릇된 이해인 원수를 미워하라는 전통(43c절)은 전면 부정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구약 율법 자체와 그와 연관된 전통 사이를 구분하심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는 구약 율법 자체의 권위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지만, 전통에는 얽매이지 않으신다. 특히 예수는 전통이 율법 자체를 위협하는 상황에서는 전통을 매우 강력하게 비판하신다는 사실(마 15:3-9)은 예수께서 구약 율법과 전통을 얼마나 확고하게 구분하셨는지, 그리고 전통에 대해 얼마나 자유로운 입장을 취하셨는지를 잘 보여 준다.
(4) 결론
본 소단원의 논의에 따르면, 이들 세 대조적 교훈들은 구약 율법을 단순히 확증하지도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 교훈들은 오히려 율법의 문자적 의미는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그 율법 규정들을 내면화하고(1, 2), 강화하고(1, 2, 6), 철저화하고(1, 2, 6), 확장함으로써(6, 그리고 아마도 1, 2) 그 율법 규정들을 초월하고 있다. 이처럼 이 대조적 교훈들은 예수의 율법 성취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잘 예시해 준다(참조. 5:17). 이 교훈들은 율법의 이면에 깔려 있던 원래 의도를 이끌어 냄으로써, 율법이 내다보았던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성취한다.
그런데 율법의 궁극적 목표를 성취한 이 극단적인 요구들은 구약 시대 사람들(“옛 사람들”)이 지킬 수 있는 수준을 뛰어 넘는 것들로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 요구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통해서만 지킬 수 있는 것들로서, 메시아 예수와의 회복된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제자들(곧, “너희”)에게만 주어진 것들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전제하는 이 극단적인 요구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완전함으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해져라”(5:48). 이제 제자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메시아와의 회복된 관계 하에서 하나님의 통치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하나님의 완전함 그 자체이다. 따라서 제자들에게는 그 어떤 깨어진 관계도 하나님 앞에서 과실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나. 셋째, 넷째, 다섯째 대조적 교훈
(1) 셋째 대조적 교훈: 이혼(마 5:31-32)
31절의 논제는 구약 율법으로부터 직접 온 것은 아니지만, 신명기 24:1에 대한 요약적 의역(意譯)인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예수의 교훈의 대조 대상은 구약 율법 자체인 것으로 보인다. 아래에서 살펴볼 것이지만, 우리의 이러한 결론의 타당성은 마태복음 19:7-8에서 아주 분명하게 입증된다.
신명기 24:1에서는 남편이 그의 아내에게서 rbd twr[(“에르바트 다바르”, “부정한 것”)를 발견할 경우 이혼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예수 당시 이혼 허용 조건인 “부정한 것”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샴마이 학파는 “부정한 것”을 성적 죄에 한정시켰는데 반해, 힐렐 학파는 남편의 어떤 불평의 원인이든지 “부정한 것”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두 견해 중 후자가 널리 받아들여졌다는 점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다. 한편 신명기 24:1-4의 초점은 이혼이 아니라, 여인의 재혼이 파기된 이후에 이혼했던 당사자들이 재결합하는 문제에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이혼한 여인의 재혼 역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32절의 대조적 교훈은 두 개의 진술들로 구성되어 있다: “음행(pornei,a, “포르네이아”)의 경우를 제외하고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든지 그녀를 간음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누구든지 간음하는 것이다.” 첫째 진술의 pornei,a라는 단어는 “근친상간” 보다는 “간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느 경우를 택하든지 간에, 예수의 대조적 교훈의 예외 규정(“음행의 경우를 제외하고”)은 힐렐 학파의 이해는 물론이고 신명기 24:1의 규정보다 훨씬 더 엄격하다. 둘째 진술 역시 구약의 이혼 규정보다 더 엄격하다. 예수의 교훈은 신명기 24:1-2에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이혼한 아내의 재혼을 간음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마태복음 19:4-9은 논제와 대조적 교훈 사이의 관계에 좀더 많은 빛을 던져 준다. 마태복음 19:8(“모세가 너희 완악한 마음 때문에 너희 아내를 버리는 것을 너희에게 허용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에 따르면 예수는 사실상 그분의 제자들과 관련하여 구약 율법의 이혼 규정을 무효화시키신다. 그 대신 예수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창세기 2:24에 계시된 결혼의 첫 번째 원리로 돌아갈 것을 교훈하신다(마 19:4-6). 하지만 첫 번째 원리로 돌아가라고 하는 예수의 교훈이 반드시 신명기 24:1의 이혼 규정을 반박하는 것은 아니다. 신명기 24:1도 첫 번째 원리와 마찬가지로 이혼을 권장하기보다는 억제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각 원리/규정에는 각각의 적절한 기능이 주어져 있다. 창세기 2:24의 첫 번째 원리는 하나님의 이상적인 뜻을 진술하는 기능이고, 신명기 24:1-4의 규정은 마음을 강퍅하게 함으로써 그 이상을 유지하는데 실패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로서의 기능이다. 그런데 예수의 구약 성취는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상적인 뜻에 도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따라서 예수는 그들에게 첫 번째 원리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신다. 왜냐하면 옛 시대를 위한 조치는 그들에게 더는 필요 없기 때문이다.
끝으로, 예수의 대조적 교훈에 나타난 예외 규정은 실질적인 예외 규정이 아니다. 왜냐하면 간음이란 그 본성상 결혼 관계를 이미 깨뜨린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 “이혼”이란 이미 깨어진 결혼 관계를 인정하는 절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섯 대조적 교훈에서 유일하게 나타나는 이 예외 규정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결혼이 제자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배우자와의 관계 문제이기 때문이다. 제자 자신에게 문제가 없을지라도 배우자에게 문제가 있을 경우 결혼 관계의 일체성은 유지될 수 없으며, 그럴 경우 이혼이 필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배우자는 “제자”일 수 없을 것이다. 제자에게는 마음으로 범하는 간음도 있어서는 안 되는데(참조. 27-30절) 육체적 간음이란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셋째 대조적 교훈에 나타난 예수의 성취적 특징은 앞 소단원에서 살펴본 세 대조적 교훈에 나타난 그것과 상당히 구별된다. 예수의 대조적 교훈은 논제에서 요약적으로 언급된 신명기 24:1-4의 이혼 관련 규정을 무효화시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교훈이 신명기 24:1-4을 폐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수의 교훈은 논제에 요약된 신명기 24:1-4 이면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원래 뜻과 목표가 창세기 2:24에 나타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 줌으로써 제자들이 그 원래 뜻에 따라 그 율법 규정의 궁극적 목표를 이루라는 것이지, 신명기 24:1-4의 의도와 목표를 무시하거나 철폐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셋째 대조적 교훈은 구약 율법의 이혼 관련 규정의 문자적 기준을 뛰어넘어 그 궁극적 의미와 목표인 결혼의 철저하고 영속적인 일체성을 새로운 목표로 제시함으로써 신명기 24:1-4를 성취한다. 셋째 대조적 교훈의 경우 예수의 성취는 율법의 문자적 규정을 무효화하지만 그 규정이 내다보았던 궁극적 의도와 목표를 새로운 기준으로 제시해 준다.
(2) 넷째 대조적 교훈: 맹세(마 5:33-37)
33절의 논제는 두 개의 진술들을 포함한다. 이 진술들은 구약성경으로부터의 정확한 인용은 아니다. 하지만 첫째 진술(33b절-“거짓 맹세를 하지 말고”)은 레위기 19:12를, 둘째 진술(33c절-“주님께 한 너의 맹세들을 지켜라.”)은 민수기 30:2; 신명기 23:21-23을 요약적으로 의역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예수의 교훈의 대조 대상은 역시 구약 율법 자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맹세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들은 유대교 문학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맹세를 전적으로(o[lwj, “홀로스”, “전혀”) 거부하는 예수의 대조적 교훈(34-37절)의 절대성은 구약성경뿐 아니라 당대 유대교 문학에서도 그 진정한 평행구를 찾아보기 어렵다. 사실 구약성경에서는 맹세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질 뿐 아니라 때로는 명령되기까지 한다(예. 출 22:7-10; 민 5:19-22; 참조. 신 6:13). 이렇게 볼 때 예수의 선언은 구약 율법 자체를 초월한다. 하지만 이러한 초월이 율법의 맹세 관련 규정들을 반박하거나 폐하는 것은 아니다. 율법의 맹세 관련 규정들도 예수의 선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진실성을 확보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말에 대한 불신을 전제하는 맹세 관련 규정들은 옛 시대 사람들에게만 필요하다. 깨어진 관계 속에 살아가던 옛 시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비진실성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시아의 통치로 말미암아 회복된 관계 속에 살아가는 제자들에게는 그러한 규정들이 더는 필요하지 않으며, 그 결과 그 규정들은 그들에게 무효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자들을 향한 요구는 더 나은 의인 절대적 진실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본 대조법의 진정한 문제는 맹세 그 자체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진실한 맹세에 관한 구약성경 규정들의 궁극적 목적(곧, 무조건적 진실)을 성취하신 예수께서 기대하시는 그분의 제자들의 절대적 진실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37절; 참조. 약 5:12).
넷째 대조적 교훈에 나타난 예수의 성취적 특징은 셋째 대조적 교훈의 경우와 유사하다. 예수의 대조적 교훈은 논제에서 요약적으로 언급된 구약 율법의 맹세 관련 규정들을 무효화하고 초월한다. 하지만 이러한 무효화와 초월이 그 율법 규정들을 폐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의 교훈은 논제에서 요약된 맹세 관련 규정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던 목표인 절대적 진실성을 이루라는 것이지, 그 규정들의 의도와 목표를 무시하거나 철폐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넷째 대조적 교훈은 구약 율법의 맹세 관련 규정의 문자적 기준을 초월하여 그 궁극적 목표인 절대적 진실성의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율법의 맹세 관련 규정들을 성취한다. 이처럼 셋째 경우와 마찬가지로 넷째 대조적 교훈의 경우에도 예수의 성취는 율법의 문자적 규정을 무효화하고 초월하지만 그 규정이 내다보던 궁극적 목표를 새로운 기준으로 제시해 준다.
(3) 다섯째 대조적 교훈: 보복(마 5:38-42)
38절의 논제(ovfqalmo.n avnti. ovfqalmou/ kai. ovdo,nta avnti. ovdo,ntoj, “눈에는 눈으로, 그리고 이에는 이로”)는 출애굽기 21:24; 레위기 24:20; 신명기 19:21로부터의 인용이다. 따라서 예수의 대조적 교훈의 대조 대상이 율법에 대한 당대 랍비들의 해석이나 전통이 아니라 구약 율법 자체인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무저항과 권리 포기의 원리를 제시하는 예수의 대조적 교훈(39-42절)은 구약 율법의 보복 원칙과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면 그러한 차이의 성격은 무엇이며, 예수의 대조적 교훈은 어떤 의미에서 율법을 성취한 것인가? 우선적으로 예수의 교훈은 보복의 정도에 대한 구약 율법의 제한들을 강화시키고 극단화시킨다. 사실 위에서 예시된 보복 관련 율법 규정들에서 동일보복 원리는 복수를 재가해 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복수에 엄격한 제한을 두기 위해서 의도되었다. 하지만 예수의 명령은 그러한 복수 제한의 원리를 뛰어넘어, 보복 권리를 포기할 것을 요구할 뿐 아니라 사실상 무저항 그 자체를 요구한다. 그와 같은 요구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다시 한번 그분의 요구가 상이한 대상에게 주어졌다는 데서 발견된다. 그분의 무저항 명령은 지금 메시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자들, 곧 하나님의 뜻에만 복종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뜻이란 동일복수 원리만으로는 도달하기 힘든 것으로서, 한없는 용서(39b-42절)의 원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의 무저항 교훈이 구약 율법의 보복 관련 규정들을 반대하거나 폐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율법 이면에 깔려 있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그것을 초월하고 심지어는 무효화함으로써 그것을 성취한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다섯째 대조적 교훈에 나타난 예수의 성취의 특징 역시 위의 두 교훈들의 경우와 유사하다. 예수의 대조적 교훈은 논제에서 제시된 구약 율법의 문자적 규정을 무효화하고 초월한다. 하지만 이러한 무효화와 초월은 그 율법 규정들을 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교훈은 율법의 동일보복 원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던 목표인 한없는 용서의 원리, 더 나아가서는 무저항의 원리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지, 율법의 동일보복 원리의 보복 억제 정신을 무시하거나 철폐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다섯째 대조적 교훈은 구약 율법의 보복 관련 규정들의 문자적 한계를 초월하여 그 궁극적 목표인 한없는 용서와 무저항의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율법의 보복 관련 규정들을 성취한다. 위의 두 경우들과 마찬가지로 다섯째 대조적 교훈의 경우에도 예수의 성취는 율법의 문자적 규정을 무효화하고 초월하지만, 그 규정이 내다보던 궁극적 목표를 새로운 원리로 제시해 준다.
(4) 결론
본 소단원에 따르면, 이들 세 대조적 교훈들 모두는, 자주 제안되어 왔던 것과는 달리, 구약 율법과 상충되거나 그것을 폐하는 요소를 포함하지 않는다. 그 대조적 교훈들은 오히려 세 논제들에 언급된 율법 규정들 이면에 숨겨져 있거나 그 규정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던 하나님의 원래 뜻과 의도와 목표를 드러내 보여 준다. 하지만 그 필연적인 결과로서 율법의 특정한 문자적 규정들을 초월하거나 무효화하는 현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율법 규정들은 깨어진 관계 하에서 굳은 마음을 소유함으로써 하나님의 이상을 유지하는데 실패한 옛 시대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의 구약 율법 성취는 그분의 제자들(곧, “너희”)로 하여금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이상적인 뜻에 도달할 수 있게 해 주었고, 그 결과 옛 시대를 위해 주어졌던 규정들은 더 이상 그들에게 적절하지도, 의미 있지도, 그리고 필요하지도 않게 되었다. 이제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결혼 관계에 있어서의 영속적인 일체성과, 절대적인 진실성, 그리고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무저항과 한없는 용서의 태도일 뿐 그보다 못한 그 어떤 것도 아니다. 곧, 완전하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완전함 그 자체인 것이다(참조. 48절). 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모든 제자들에게 각각 요구되는 바로 그 “더 나은 의”이다(참조. 20절).
5. 여섯 대조적 교훈에 나타난 예수와 율법: 그 의미와 적용
여섯 대조적 교훈들에 대한 지금까지 논의로부터 우리는 다음 몇 가지 결론들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첫째, 첫 번째 도입구의 핵심 동사 evrre,qh(“에레떼”, “그것이 말하여졌다”)와 여섯 논제들에서 인용된 내용들이 보여 주듯이, 예수의 대조적 교훈들의 대조 대상은 분명 구약 율법 자체이다. 이러한 결론은 본 여섯 대조적 교훈들과 긴밀하게 연관된 마태복음 5:17에서 예수의 성취 대상이 율법 자체라는 사실과도 잘 연결된다. 다만 첫 번째 도입구의 부차적 동사 hvkou,sate(“에쿠사테”, “너희가 들었다.”)가 시사해 주고 여섯째 논제의 부가적 규정(“네 원수를 미워하여라.”)이 보여 주듯이, 예수의 교훈의 대조 대상에 당대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가 지극히 부차적으로 포함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섯째 논제의 경우에도 그 주된 대조의 대상이 율법 자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둘째, 예수의 여섯 대조적 교훈들은 마태복음 5:17의 예수의 구약 성취의 구체적 성격을 실제 예들을 통해 잘 규명해 준다. 첫 번째 부류인 첫째, 둘째, 여섯째 대조적 교훈들은 구약 율법을 단순히 확증하지도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 교훈들은 구약 율법의 문자적 의미는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그 율법 규정들을 내면화하고, 강화하고, 철저화하고, 확장함으로써 그 율법 규정들을 초월하고 있다. 이 교훈들은 율법의 이면에 깔려 있던 원래 의도를 이끌어 냄으로써, 율법이 내다보았던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성취한다. 두 번째 부류인 셋째, 넷째, 다섯째 대조적 교훈들은 구약 율법과 상충되거나 그것을 폐하는 요소를 포함하지 않는다. 그 교훈들은 오히려 세 논제들에 언급된 율법 규정들 이면에 숨겨져 있거나 그 규정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던 하나님의 원래 뜻과 의도와 목표를 드러내 보여 준다. 하지만 그 결과로서 율법의 특정한 문자적 규정들을 초월하거나 무효화하는 현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율법 규정들은 깨어진 관계 하에서 굳은 마음을 소유함으로써 하나님의 이상을 유지하는 데 실패한 옛 시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의의 기준들로 주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의 구약 율법 성취는 그분의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이상적인 뜻에 도달할 수 있게 해 주었고, 그 결과 옛 시대를 위해 주어졌던 규정들은 더 이상 그들에게 적절하지도, 의미 있지도, 그리고 필요하지도 않게 되었다. 이제 제자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완전함 그 자체인 것이다(5:48).
이렇게 볼 때, 서론에서 예수의 대조적 교훈들과 구약 율법 사이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제안들 중, 율법의 확증으로 보는 첫째 제안(F. Vouga)과 율법으로부터의 단절이라고 보는 여섯째 제안(Marcion)은 적절치 않은 것이 분명하다. 또한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할라카라고 보는 둘째 제안(R. Hummel) 역시 랍비들의 해석적 전통 뿐 아니라 율법 자체를 뛰어넘는 예수의 성취적 성격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것으로 드러난다. 또한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보는 셋째 제안 역시 율법 자체에 대한 예수의 초월적 권위를 적절히 드러내 보이지 못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논의에 비추어 볼 때 둘 사이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견해는 율법을 초월하여 그 목표(또는 의도)를 성취한 것으로 보는 넷째 제안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성취적 관점을 인정할 경우, 예수의 대조적 교훈들을 새로운 메시아적 율법으로 보는 다섯째 제안(B.W. Bacon) 역시 제한적으로 수용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며, 셋째 제안도 율법 자체에 대한 예수의 초월적 권위가 적절히 인정되기만 한다면 부분적으로 수용이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 마태복음 5:19의 “이 계명들”은 예수에 의해 성취된 메시아적 율법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메시아적 율법은 율법의 원래 의도와 궁극적 목표를 이룬 것이라는 점에서 구약 율법과 연속적인 관계를 갖지만, 그 율법의 한계를 뛰어넘어 확장하고, 내면화하고, 심지어 무효화하기까지 한다는 점에 있어서 구약 율법과 불연속적(또는 초월적) 관계를 갖는다.
넷째, 구약 율법은 그 어떤 부분도(곧, 십계명이나 소위 “도덕법”까지도) 예수의 성취와 무관하게 이해되거나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마 5:17-18). 또한 예수의 성취에 비추어 볼 때, 구약 율법은 어떤 사소한 부분도(곧, 소위 “제사법”이나 “사회법”까지도) 제자들과 무관한 부분이 있을 수 없다(마 5:19). 마태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율법경시론적 경향에 알게 모르게 물들어 있는 오늘날 교회 상황에서 율법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 대해서까지 관심을 갖고 해석하여 적용하는 작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작업이 단순하거나 쉽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본 여섯 대조적 교훈들은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예수의 성취에 비추어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예들을 제공해 준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예들에서 언급되지 않은 수많은 다른 율법 규정들도 이 예들을 통해 어느 정도 드러난 성취의 원리에 비추어 그 작업을 끈기 있게 수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다섯째, 여섯 대조적 교훈들은 마태복음 5:20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제시된 “더 나은 의”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예시해 준다. 그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적 의와는 완연히 구분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얼마나 그리고 어디까지를 따지는 결의론적 특성을 갖는데 반해(참조. 마 23:16-22), 제자들의 더 나은 의는 정도의 한계를 뛰어넘는 철저함만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것은 또한 외면적 결과만이 아니라 내면적 의도까지도 결정적인 판단의 기준으로 여긴다. 더 나아가서 때로는 율법의 요구 자체를 무효화할 정도로 그 기준들을 절대화한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대되는 더 나은 의가 “완전함” 그 자체임을 선언하신다(5:48). 그런데 이처럼 철저하고 절대적인 기준들, 그리고 완전함은 제자 스스로가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제자 스스로 이루어야 한다면 아무도 그것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제시하신 더 나은 의는 하나님의 선물일 수밖에 없다. 사실 이 더 나은 의는 예수께서 구약 율법을 성취하신 결과로 주어지게 된 것으로서(참조. 5:17), 메시아 예수와의 회복된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제자들에게만 선물로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참조. 마 5:3, 10). 다시 말해서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의 결과로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의인 것이다(참조. 마 6:33). 이처럼 더 나은 의가 하나님 나라의 의라면,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더 나은 의가 완전하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완전함 그 자체이어야 함은 오히려 당연하다. 이렇게 볼 때, “더 나은 의”는 제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지만 그에 앞서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또한 “더 나은 의”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현재적 결과이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미래적 조건이다. 마태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율법주의 경향에 익숙한 오늘날 교회 상황에서, 제자에게 요구되는 더 나은 의에 대한 이러한 하나님 나라 중심적 이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를 위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끊임없이 구해나감으로써(6:33) 율법주의적 자기 의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서 제자들에게 기대되는 하나님의 통치 결과인 더 나은 의를 이루어나가야 할 것이다.
끝으로, 지금까지 살펴본 여섯 대조적 교훈들의 성격은 율법 자체에 대한 메시아 예수의 놀라운 권위를 예시해 주는데, 이러한 권위는 둘째 도입구의 인칭대명사 evgw,(“에고”, “나는”)가 여섯 대조적 교훈들에서 사용되는 용법에서도 잘 드러난다. 예수의 이러한 권위는 그 어떤 다른 서기관들이나 랍비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권위로서 율법 자체와 대조를 이룰 뿐 아니라, 율법 자체를 뛰어넘는 권위이다. 이 예수는 구원사(救援史)의 정점에서 구약성경이 전체적으로 목표하였던 하나님 나라, 곧 종말을 도래케 하신 메시아이시다(참조. 4:17; 5:3, 10; 12:28). 따라서 예수의 여섯 대조적 교훈들은, 바로 앞 단락(5:17-20)의 경우에도 그러하듯이, 철저하게 기독론과 종말론적 관점에 입각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 교훈들은 또 다른 형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의 기준을 제시해 주는 윤리 교과서로 전락할 수 있다. 예수의 성취는 시대의 전환을 가져왔는데, 곧 예언의 시대에서 성취의 시대로의 전환이다(마 9:17; 11:13-14). 만일 그리스도인이 그 성취적 의미를 무시한 채 구약 율법을 이해하고 지키려 한다면, 그는 시대의 전환 자체를 무시하는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하듯이(마 9:17), 메시아의 시대에는 새로운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인들이 메시아께서 성취하신 율법(곧, 메시아적 율법)을 하나님의 통치를 통해 마음으로부터 순종함으로써 메시아 시대의 특징인 더 나은 의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 Abstract
“But I say to you”
-Jesus and the Law in the Six Antitheses (Mt. 5:21-48).
Yong-Eui Yang
(Ezra Bible Institute for Graduate Studies)
For the Christians the Old Testament law is not easy to apply to their life as well as to understand. The six antitheses (Mt. 5:21-48) along with the programmatic pericope (Mt. 5:17-20) are undoubtedly of crucial importance for the understanding and application of the Old Testament law. After briefly investigating Mt. 5:17-20, this article focuses on Mt. 5:21-48. The investigation draws the following conclusions.
First, all the provisions of the theses being in contrast with the antitheses are from the Old Testament law itself.
Second, Jesus' teaching in the first group of antitheses (i.e., 1st, 2nd, and 6th) neither merely affirm the Old Testament law nor abrogate it but rather transcend them by internalizing, radicalizing or extending them without weakening their literal force. These are some illustrations of Jesus' fulfillment of the law, that is, fulfilling the ultimate will of God, to which the law pointed forward.
Third, the second group of antitheses (i.e., 3rd, 4th, and 5th) do not involve contradiction to or abrogation of the Old Testament law. They rather reveal the original will of God behind the law. This, however, results in setting aside certain literal provisions of the law, because they were for the people of the old age. Jesus' fulfillment of the law, however, has enabled the disciples to attain the ideal will of God, and consequently those provisions for the old age are no longer suitable or necessary for them.
주제어 :
예수, 구약 율법, 성취, 마태복음, 하나님 나라
Jesus, Old Testament Law, Fulfillment, Matthew's Gospel, Kingdom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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