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헤드린에서 진행된 예수의 재판(막 14:61하, 62하)
-청자 존대법 번역 문제
조지윤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대한성서공회)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예수께 하는 대제사장의 두 번째 심문”(14:61하)과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위원들에게 하시는 예수의 말씀”(14:62하)의 청자 존대법 번역 문제를 다룬다. 우리말에는 2인칭 대명사와 동사 종결접미사에 나타나는 청자 존대법이 있으나 성서 원어인 히브리어와 아람어, 그리스어에는 그러한 문법 형태가 없다. 우리말 뿐 아니라 아시아 지역의 대부분의 언어에도 존대법이 있어서 이 지역의 번역자들은 성경을 번역할 때마다 이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청자 존대법은 말하는 이와 듣는 이와의 관계, 대화 상황과 당시의 문화적 기대를 반영하기 때문에, 만약 번역자가 자의적으로 존대어를 선택하거나, 소위 직역(literal trans- lation)을 한다고 하면서 획일적인 등급(level)의 존대어를 선택한다면, 원문이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를 왜곡시키게 된다. 또 적절한 존대법으로 번역되지 않으면, 원천 본문(source text)의 함축적 의미를 잘못 이해하게 될 뿐 아니라 번역문의 문체를 파괴시키거나 문장을 비문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므로 많은 성경 번역자들이 존대법 번역과 관련된 문제들에 관심을 가져왔다. 특히 아시아 지역의 번역자들은 1960년대 이후 이 문제에 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져왔다. 이러한 언어들 중에서 우리말은 가장 복잡한 존대법 구조를 가지고 있다.
특히 청자 존대법은 1887년 최초의 우리말 신약전서인 로스의 ?예수셩교젼셔?부터 2001년에 발간된 ?성경전서새번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번역되어 왔다. 우리말 존대법을 번역할 때마다 가장 문제가 되는 “산헤드린에서 진행된 예수의 재판”(막 14:58-65) 담화를 살펴보면, ?예수셩교젼셔?부터 ?셩경젼셔?(소위 구역, 1911년), ?개역한글판?(1961년), ?개역개정판?(1998년)은 “너”와 “~느니라” 체를 유지해왔으나, 현대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신약전서새번역?(1967년)부터 ?공동번역(개정판)?(1977년/1999년), ?표준새번역?(1993년), ?새번역?(2001년)은 다양한 존대어로 번역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 새로이 개정되거나 번역되는 우리말 역본들의 적절한 청자 존대법 번역을 위한 기준들(criteria)이나 이론적 틀(theoretical framework)을 세우고자 한 시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 글은 성서 번역에 대한 사회언어학(sociolinguistics), 문화인류학적 언어학(anthropological linguistics)과 화용론적 언어학(prag- matic linguistics)을 통하여 존대법이 없는 언어에서 존대법 번역을 위한 기준들과 이론적 틀을 제시하고, 구체적으로 “예수께 하는 대제사장의 두 번째 심문”(14:61하),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위원들에게 하시는 예수의 말씀”(14:62하)을 분석한 후 각 역본의 청자 존대법에 관하여 평가하면서 예배용 성경의 적절한 청자 존대법 번역을 제안한다.
2. 청자 존대법으로 번역하기 위한 기준들과 틀
존대법 현상은 문법적 영역에 속하지만 그 사용은 담화 안에서 화용론적으로 관습화된다. 따라서 존대법 번역
을 위해 공손 이론들로부터 끌어온 화용론적 통합 기준들은 원천 본문을 분석하는 데 유용하다. 1970년대 초부터 연구되어온 공손 이론을 화자의 청자 존대법 평가를 위한 통합적 틀로 활용할 수 있는데, 그 기준들은, (1) 대화자간의 사회적 관계-나이, 사회적 지위, 성별, 친숙도, (2) 대화 상황, (3) 사회적 활동에 대한 문화적 기대, (4) 대화자 간의 사회적 심리적 변수에 대한 번역자의 가정, 즉 힘, 계급, 거리와 화자의 의도로 나뉜다. 이러한 틀을 기초로 하여 성서의 청자 존대법 번역을 위한 틀로 확장시키면, (1) 독자, (2) 위원회, (3) 번역자, (4) 원천 본문, (5) 대상 본문으로 구성된다. 기존의 번역 이론들이 그 이론적 시작점을 원천어로 보는 반면에, 청자 존대법 번역의 시작점은 원천어가 아니라 대상어이다.
청자 존대법 번역은 존대어를 사용하고 이해하는 독자들의 언어 능력과 요구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러한 독자들에 관한 정보를 번역자는 번역 위원회와 나누고 가장 적절한 번역 원칙을 결정한다. 이와 함께 번역자는 화용론적 틀을 활용하여 성서 인물들의 대인관계와, 대화 상황의 공식성 여부, 성서 문화에 대하여 분석해야 한다. 따라서 청자 존대법 번역을 위해서는 원천 본문의 언어 형식이나, 대상 본문과의 의미론적 혹은 기능적 상응보다는 언어의 사회언어학적이고 화용론적 사용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성서 번역에 있어서 청자 존대는 공동체를 위하여 ‘성경’을 정의하고 그 공동체의 구체적 영성에서 나타나는 신학적이고 해석학적인 요소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면 이러한 기준들과 틀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산헤드린에서 진행된 예수의 재판에서 대제사장과 예수의 청자 존대법 번역 문제를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3. 마가는 산헤드린에서 진행된 예수의 재판을 공식적 상황으로 그리고 있는가?
산헤드린에서 진행된 예수의 재판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시간과 공간의 문제와 함께 논란이 되어왔다. 학자들 간에는, 예수를 대제사장의 집으로 밤늦은 시간에 데려온 것은, 그 심리가 비공식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미쉬나 산헤드린 11.20에 따르면, 성전 내에 있는 법정의 자리는 “석조로 된 방”이라고 하며, 산헤드린은 대제사장의 집을 포함하여 성전 바깥 어느 곳에서도 사법권을 수행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미쉬나 산헤드린 4.1 또한 절기 전날이나 절기에는 범죄자 심문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유월절 밤 산헤드린의 유죄 선고는 금지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불을 쬐더라”(막 14:54)라는 마가의 안뜰에 대한 표현은, 예수의 심문이 늦은 밤에 열렸다는 것을 암시한다.
마가는 최고위급 인사들이 밤에 모인 것은 그만큼 그들이 예수를 경계를 하며 그 처리를 긴급하게 느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것은 마가복음 14:1-2에서 예수께서 유월절에 성전에 나타나시는 것을 막고자 했다는 보도와 연결된다. 오히려 산헤드린은 예수 사건을 토라를 크게 위협하는 긴급한 것으로 처리를 한 것으로 그려진다. 이런 점에서 미쉬나 사법 규정은 예수를 밤에 긴급하게 심문하는 변칙과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온 공회”(o[lon to. sune,drion)라는 표현은 마가가 공식적으로 산헤드린 공회가 모인 것으로서 심문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온”(o[lon)은 마가복음의 다른 본문에서 가끔 나오는 확대된 표현이다(참조 막 1:5). 미쉬나 산헤드린 1.6에 따르면, 공회는 전체 71명으로 구성되었고 회원 중 23명만 참석하여도 정족수가 되었다. 마가의 “온 공회”는 적어도 23명의 산헤드린 위원들이 예수의 심문을 위하여 모였다는 것을 가리킨다. 마가는 심문 상황을 공적이면서도 사무적인 회의로 그리고 있으며,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4. 대제사장의 두 번째 심문: 청자 존대법 번역(14:61하)
마가복음 14:61 pa,lin o` avrciereu.j evphrw,ta auvto.n kai. le,gei auvtw/|( Su. ei= o` Cristo.j o` ui`o.j tou/ euvloghtou/È
마가복음 14:61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개역개정판)
가. 청자 존대법 번역을 위한 기준으로 분석하기
(1) 대제사장과 예수의 사회적 관계
예수의 화자인 대제사장은 유대 제사장직 중 최고직에 있었으며, 유대인들의 최고 회의의 대표로서 활동하였다. 그러한 그가 지금 고발자로 예수 앞에 서있다. 한편 예수는 대제사장에 의해(막 14:60-61) 결국 빌라도에게 끌려가(막 15:2-3) 난동 교사죄 선고를 받아 사형에 이르게 될 피고로 서 있다. 증인들은 서로 맞지 않는 증언을 하여 예수의 무죄를 드러내고(막 14:58), 어떤 법적인 고소에도 예수께서 반응하시지 않자(참조 막 14:61상), 대제사장이 직접 예수 스스로에게 죄를 씌우는 진술을 하도록 덫을 놓고 있다.
증인들의 고발에 이어(막 14:58), 대제사장이 심문을 시작하였다.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14:60하). “거짓 증언자” 같이 대제사장은 의회의 중앙에 서서 예수께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예수의 반응을 끌어내는 것에 실패하고 다시 심문의 방향을 바꾼다.
“다시”(pa,lin)는 예수의 행위에 대한 질문(14:60하)에서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으로 전환시키는 그의 완고한 질문 형태를 보여준다. 대제사장은 예수의 자기 고백을 이끌기 위하여 예수를 더욱 압박한다. 질문,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61절, 개역개정)는 예수께 “예”와 “아니오”라는 답변을 유도해낸다. 예수께서 긍정의 답변을 하신다면, 이것은 죽음을 의미하지만 예수께서 부정적으로 대답하신다면 대제사장은 새로운 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다.
(2) 대제사장의 두 번째 심문에 대한 문화적 기대
예수께서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 주장했었는지에 대한 심리는 증인들의 증언들, 즉 예수께서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막 14:58)고 하셨다는 증언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올 때 성전의 영광이 재건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므로 증인들의 증언들에 기대어 있는 대제사장의 두 번째 질문은 공식적 심리의 법적 과정을 무효화하는 것이었다.
대제사장은 예수께 유죄를 입증하도록 증거를 교묘하게 조작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대신에 완곡어법인 “찬송 받을 이” (o` euvloghto,j)를 사용할 만큼 신중하다. “찬송 받을 이”는 62절의 “권능자”처럼 “하나님”(qeo,j)이라는 단어를 부르는 것을 피하는 유대인의 경건한 완곡어법이다. 이러한 완곡어법은 마가복음의 전형적인 스타일은 아니다. 마가가 마가복음에서 “하나님”이라는 용어 사용을 피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가는 “하나님의 나라”(예, 막 1:15; 4:11, 26, 30; 9:1, 47 등)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예, 3:11; 15:39; 참조 1:1), “하나님의 거룩한 자”(예 1:24)로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심문 과정에서, 마가는 대제사장이 “찬송 받을 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스스로 경건하다는 쇼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몇 가지 개념들을 결합한 희망이 있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 왕, 다윗 왕권, 하나님의 아들로서 왕”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기원전 팔레스타인 유대교에서 나타난 메시아적 기대를 반영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메시아적인 의미로 이해되었으며, 심문 과정에서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아들”에 해당하는 칭호를 “그리스도”와 동일한 것으로서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인정하시는 것은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죽을 죄이다. 하나님 홀로 메시아를 알리시고 왕좌에 앉히시는 권리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어떤 이가 메시아적 존엄성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위엄을 침해하는 것이 된다. 또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그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것을 기대했기 때문에, 종교적 권력자들이 예수를 거짓 메시아로 간주하는 것은 당연하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수처럼 감옥에 갇히고, 버림받고, 원수들의 손에 넘겨지는 메시아는 이해되지도 받아들여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3) 예수에 대한 대제사장의 사회적 심리 변수들과 의도
대제사장은 예수의 진정한 정체성을 알지 못하면서, 예수께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인지를 묻는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Su. ei= o` Cristo.j o` ui`o.j tou/ euvloghtou/È)에서 2인칭 대명사 “너”(su,)는 강조일 뿐 아니라 경멸과 조소를 담고 있다. “물어 이르되”(evperwta,w)는 마가복음에서 스물세 번 나오고 있으나 이 본문에서 가장 치명적이다. 다른 본문의 질문자들과는 달리, 대제사장은 시시한 적수나 신경질 내는 서기관이나 분개하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최고위직 종교 권력자이다.
대제사장의 의도는 분명하다. 예수께서 긍정하신다면, 대제사장은 예수를 “위험한 거짓 메시아 선동자”로 빌라도에게 끌고 갈 충분한 증거를 가지게 될 것이다. 로마인들은,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 “그리스도”(o` Cristo,j), 즉 “메시아”(x;yvim,;), 왕이라는 정치적인 의미에만 관심을 가졌다. 카이사르의 영토에서 왕은 오로지 한 사람 밖에 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선동적이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왕”으로 판결 받은 것은 종교 권력자들이 예수께서 메시아인 척했다는 것을 로마인들에게 설득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제사장은 예수에 대하여 분명하게 악의를 드러내고 있으며, 자신이 예수보다 사회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여기며 심리적 거리를 두고 있다.
나. 대제사장의 두 번째 심문의 청자 존대법 번역
su.와 ei=는 여덟 가지 우리말 청자 존대법으로 번역될 가능성이 있다. (1) “당신”, “그대” + “~합니다” 체, (2) “당신”, “그대” + “~하오” 체, (3) “너” + “~하다” 체, (4) “당신”, “그대” + “~해요” 체, (5) “그대”, “자네” + “~하게” 체, (6) “너” + 반말 체, (7) 2인칭 대명사 생략, (8) 2인칭 대명사 대신에 명사를 사용하는 것이다.
(1)“당신이/그대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입니까?”
실제 법정 상황에서, 재판관이나 검사는 피고인에게조차 격식체 높임말인 “~합니다” 체를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 화자가 이 문체를 사용함으로써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를 분명하고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법정에 대한 존중을 보여준다. 그러나 예수를 심문하는 대제사장의 문체를 “~합니다” 체로 옮기는 우리말 번역본을 찾기 어려운 것을 보면, 우리말 번역자들이 실제 법정 상황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대제사장이 예수를 거짓 메시아로 경멸하고 조소하는 원천 본문의 의미를 반영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실한 독자들은 이미 예수께서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예수께 “~합니다” 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가 굴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다고 대제사장의 심문 체를 “~합니다” 체로 번역하는 것은 오히려 심문의 긴장을 감소시키고 그리스도께서 수난 당하시는 비극을 순화시킨다.
(2)“당신이/그대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요?”
이 등급의 존대어는 대제사장의 권위적인 분위기와 예수를 향한 냉소와 모욕을 잘 표현한다. “~하오” 체는 종종 상하 격차가 크지 않은 손윗사람, 상위자가 엇비슷한 하위자에게, 또 고령자가 모르는 젊은이에게 쓰이며, 종종 관료적이고 권위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현대 우리말 역본들 중에서 ?신약전서새번역?(1967년)은 대제사장의 심문의 문체로 일관되게 “당신”과 “~하오” 체를 사용한다. 한편, ?성경전서표준새번역?(1993년)과 ?성경전서새번역?(2001년)은 “그대”와 “~하오” 체로 번역하고 있다. “그대”는 화자의 점잖은 매너를 보여주기 위한 세련된 비 존대형으로 자주 사용된다. 심문 과정에서 대제사장은 예수를 피고로 모욕하고,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피하는 것 대신에 유대교의 경건한 완곡어법을 사용함으로써 거만과 자기 의를 드러낸다. 이처럼 청자를 향해 경멸과 멸시를 표현하는 “당신”과 “~하오”체와 화자의 점잖은 체하는 매너를 보여주는 “그대”와 “~하오” 체가 적절한 문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대제사장의 악의와 심문 과정의 긴장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대제사장이 예수를 심문하는 문체는 “당신”과 “~하오” 체가 더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3)“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현대 한국 사회의 실제 심문 과정에서, 법정의 모든 참석자들은 피고인들에게 “너” + “~하다” 체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이 문체는 사적인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낮춤말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최초의 우리말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셔?(1887년)나, ?구역?(1911년)부터 이어져온 ?개역한글판?(1961년), ?개역개정판?(1998년)의 “너”와 “~느니라” 체는 현대인들에게 너무 지나친 낮춤말로 받아들여진다. ?개역개정판?을 포함하여 소위 성서체라고 하는 “~느니라” 체를 사용하는 번역본들에서 특히 “너”와 “~냐”라는 동사 종결 접미사는 청자를 모욕하거나 대화자 간의 심각한 긴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문체는 근대화 이전에 주인이 노예에게 말할 때 자주 사용되었기 때문에 현대 독자들에게 어색한 고어체로 받아들여지며, 또 심각한 법정모독죄로 간주될 수 있다. 따라서 전통에 기인한 고어체를 떠나서 “너”와 “~냐” 체는 “당신”이나 “그대”와 “~하오” 체로 개정되어야 할 것이다.
(4)“당신이/그대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예요?”,“그대/자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인가?”,“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니?”
법정에서 증인들이나 피고들이 무심코 “~해요” 체를 사용하는 경우가 가끔 있기는 하지만 판사나 검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문체는 아니다. 이 문체는 예수를 향한 대제사장의 악의와 상황의 긴장을 전달하지 못한다. “그대”, “자네” + “~하게” 체는 일반적으로 친밀한 성인 대화자 간에 사용되는 문체로 ?공동번역?(1977/1999)을 제외하고는 한글 성경 중에서 이 문체로 번역하는 한글 성경이 없다. “그대”와 “~하게” 체는 ?새번역?(2001년)의 “그대”와 “~하오” 체보다는 대화자 간의 친밀감을 좀 더 깊게 나타내는 것 같다. 반면에, “너”와 반말은 일반적으로 어린 아이를 지칭하거나 언급할 때 혹은 가족이나 친밀한 친구에게 사용된다. 대제사장과 예수는 “너”와 반말을 쓸 정도로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으며, 더욱이 마가는 심문 상황을 공적인 것으로 그리고자 하였다. 따라서 “당신”, “그대” + “~해요” 체, “그대”, “자네” + “~하게” 체와 “너” + 반말체는 대제사장의 심문 문체로 적합하지 않다.
(5) 2인칭 대명사 생략과 2인칭 대명사 대신에 명사 사용
실제 대화를 하거나 법정 상황에서 2인칭 대명사가 생략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강조와 경멸, 조소를 담고 있는 su,, “너”를 고려한다면 2인칭 청자 존대어를 생략하기보다는 적절한 존대어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한편, 실제 일상 대화에서 뿐 아니라 한글 성경 역본들에서도 종종 2인칭 대명사를 명사로 번역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심문 과정에서 예수를 가리키는 대명사를 “피고”라고 번역하면 원천 본문에 없는 예수의 정체성을 피고로 고정시키게 되기 때문에 su,를 “피고”로 번역하는 데는 위험이 따른다.
이처럼 su.와 ei=는, 대제사장의 적의와 심문 상황의 긴장을 가장 잘 드러내는 “당신이 ~이오?”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5. 대제사장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과 산헤드린을 향한 선포: 청자 존대법 번역(막 14:62하)
막 14:62 o` de. VIhsou/j ei=pen( VEgw, eivmi( kai. o;yesqe to.n ui`o.n tou/ avnqrw,pou evk dexiw/n k\aqh,menon th/j duna,mewj kai. evrco,menon meta. tw/n nefelw/n tou/ ouvranou/Å
막 14: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가. 청자 존대법 번역을 위한 기준으로 분석하기
(1) 예수와 대제사장, 그리고 모든 산헤드린 위원들 간의 사회적 관계
예수의 말씀은 “내가 그니라”(VEgw, eivmi)라는 답변과 “인자가 … 너희가 보리라”(o;yesqe to.n ui`o.n tou/ avnqrw,pou …)라는 선포로 나뉜다. o;yesqe(오프세스세, “너희가 보리라”)의 2인칭 복수형은 예수께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전체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유대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최고위직 인물인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에게 답변하신다. 산헤드린 의원들에 대해서는 이 심문 담화 시작 부분(막 14:53)에서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에 나와 있다. 유대교 지도자들인 산헤드린 위원들은 정부에서 뚜렷한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대제사장들은 로마 권력 하에서 세속적 통치자들에 의해 교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다른 이들의 눈에 위신 있고 권위 있는 것으로 보였으며, 유대 정치에 있어서 실제적 세력을 구성하고 있었다. 사두개인은 성전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께서 성전을 파괴할 것이라고 위협했다고 믿는다면(참조 막 14:58), 이 그룹은 예수를 제거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장로들”은 대부분 영향력 있는 일반인을 대표하였으며, 부유한 토지 소유자들이었고 걸출한 유대 가문들의 일원들이었으며, “서기관들”은 바리새인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렇게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같은 법정에 앉아 있다.
(2) 예수의 말씀에 대한 문화적 기대
예수는 메시아라는 그의 진정한 정체성을 VEgw, eivmi라고 긍정함으로서 분명하게 나타내신다. 이것이 유대인 청자들에게는 뻔뻔스러운 것으로 들렸을 것이다. 심문 전에, 마가복음의 예수는 그 자신이 메시아라고 불리는 것을 계속적으로 피하셨다. 소위 “메시아적 비밀”은 지금 유대인 최고 종교 지도자 앞에서 밝혀진다.
많은 이들이 예수를 메시아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유대 기독교인들은 예수 자신이 그의 정체성을 그처럼 직접적인 방법으로 선언하는 것에 대해 불편해 했던 것 같다. 다른 복음서들과 마가복음의 긴 이문은 간접적인 대답으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마태의 “네가 말하였느니라”(su. ei=paj, 마 26:64)와 누가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u`mei/j le,gete o[ti evgw, eivmi, 눅 22:70)는 예수의 대담한 진술인 “내가 그니라”(VEgw, eivmi)를 완화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마가복음 14:62의 이문 중에서 긴 독법 “네가 내가 그라고 말하였다”(su. ei=paj oti, evgw, eivmi)도 그 같은 것을 시도한다. 이렇게 대담한 예수의 답변을 “네가 내가 그라고 말하였다”라고 완화시킨 원인은 청자 존대법을 선택할 때도 영향을 준다.
또 예수께서는 산헤드린 위원들에게 자기 자신을 “인자”라고 직접적으로 선포하신다. “인자”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인자 같은 이”와 연관성이 있다(단 7:13). 다니엘 7:13은 하늘로 올라가심보다 그리스도의 통치 시대와 파루시아를 언급한다.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은 아마도 “인자”에 대한 언급이 인간에게 천상의 권위에 적용시키는 것으로서 다니엘 7:13의 인유(引喩)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두 분사 kaqh,menon(카테메논, ‘앉은 것’)과 evrco,menon(에르코메논, ‘오는 것’)은 o;yesqe(오프세스세, ‘너희가 볼 것이다’)라는 같은 동사가 지배한다. o;yesqe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친구들이나 호의를 베푸는 이들이나 혹은 제자들에게 사용되기보다는 격한 적개심에 사로잡혀 있는 적들에게 사용된다. “오는 것 전에 앉는 것”은 예수의 승천과 그 후의 파루시아의 견지에서 해석되어 왔다. 어떤 이가 “오른쪽에 앉는 것”은 영광의 자리를 점한다는 관용어이며, “권능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대한 언급을 피하기 위한 완곡어법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라는 시편 110:1로부터 끌어와서 대담하게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신다. 예수께서는 그의 원수들, 즉 지금 그를 재판하는 자리에 앉아있는 최고 종교 권력자들의 재판관으로 오실 것이다. 반면에,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은 또한 “구름을 타고 지상으로 오시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구름은 인자가 타실 마차를 나타낸다.
(3)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을 향한 예수의 사회적 심리 변수들과 의도
예수께서는 최고 종교 권력자들인 그의 청자들을 향한 적의를 숨기지 않으신다. 대담하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대하여 묻는 대제사장보다 더 높은 직위에 있음을 주장하신다. 유대 최고 법정에서 그 자신을 심판자로 선포하시면서 토라와 그 지도력을 위협하신다. 또 스스로를 “인자”라고 칭하면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의 미래 심판자로서 신적 역할을 행하실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주장은 개인적으로 자기 자신을 초인간적 수준으로 높일 뿐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의 지도력에 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가장 직접적이고 분명하고 명백하고 간결한 방식으로 주장하신다. 그들의 사회적 관계는 현재 심문 상황에 속하지만, 예수의 말씀은 미래의 파루시아를 투영하고 있으며, 미래를 향한 심리 변수를 담고 있다. 이러한 메시아직에 대한 긍정과 그를 재판하기 위해 앉아 있는 최고 종교 권력자들을 심판하기 위해 오실 것이라는 선포는, 그의 청자들의 분노를 자아냈을 것이다.
나. 예수의 답변과 선포의 청자 존대법 번역
(1)“그렇습니다.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여러분이 보게 될 것입니다.”
1971년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협력으로 완성된 ?공동번역신약전서?에서는 예수의 말씀을 처음으로 “~합니다” 체로 번역하였다. 예수께서 대중을 대상으로 하거나 나이가 많은 이에게 말씀하실 때에는 존대어로 번역하는 시도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인간에게 존대말을 쓰실 필요가 없다는 반발이 일어나서, 1977년 ?공동번역?에서는 “~하다” 체로 개정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사회적 경향은 과거의 계층적 사회 구조에서 평등주의로 변화하였다. 따라서 대화자 간의 계급적 관계 보다는 대화 상황이 공적이냐 사적이냐에 따라 결정되는 언어 구조로 전환되었다. 또 최근에는 법정 윤리의 원칙에 따라 우리나라 법관들은 피고를 포함하여 법정에 참석한 모든 이들을 향하여 존대말을 사용함으로써 그들 자신들의 명예와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 판사들이 피고나 법정의 참석자들에게 비 존대어를 사용하는 것은 고압적인 태도로 간주되고 오히려 그 자신의 체면과 명예를 떨어뜨리는 것이 된다. 따라서 새로운 우리말 번역본에서는 “~합니다” 체가 오히려 미래의 종말론적 심판자로의 예수의 품위를 잘 표현한다. 존대말은 화자의 권위와 명예를 높이는 기능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체는 원천 본문의 강력한 선포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2)“그렇소.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당신들/그대들이 보게 될 것이오.”
?표준새번역?(1993년)과 ?새번역?(2001년)에서는 “당신들”과 “~하오” 체를 사용하면서, 로스의 ?예수셩교젼셔?(1887년), ?구역?(1911년)부터 사용되어 ?개역한글판?(1961년)과 ?개역개정판?(1998년)에서도 유지되고 있는 “너”와 “~느니라”체, 즉 가장 낮춤말을 피한다. 예수의 말씀에서 “당신들”과 “~하오” 체는 대제사장의 심문 체(참조, 막 14:60하, 61하)와 조화를 이룬다. 현재의 재판장으로서의 대제사장과 미래의 심판자로서의 예수의 문체에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현대어 우리말 역본들이 대제사장의 질문으로 “당신들”과 “~하오” 체를 사용하지만 예수의 말씀으로는 “너”와 “~하다” 체를 사용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특히 이 문체는 공적인 법정 상황을 강조하는 동시에 미래의 심판자로서의 예수께서 그 자신이 메시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단호하게 선포하시는 것을 드러낸다.
(3)“그렇다.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게 될 것이다/이니라.”
이것은 일반적으로 우리말 번역본들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문체이다. 이러한 선택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으나 또한 문제점도 있다. 우리말 성경이 번역된 이후 이 문체는 단순히 글말 문체로 받아들여져 왔다. 예수께서 그의 청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심판자로서 단순히 미래의 판정을 읽으시는 것이라면, “너희”와 “~하다” 체는 중립적인 문체로 적절할 것이다. 이러한 문체는 “필자와 독자 간에 공간과 시간적 거리”를 최소화하는 저작물, 신문, 잡지, 교과서와 학문적 책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직역 번역본들은 존대법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는 그리스어의 명시적 전달에 집중한다. 그러나 화용론에 대한 고려 없이 존대법 번역을 하는 것은 원천 본문에서 부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밋밋한 번역이 되게 한다. 또 예수께서 인간 청자에게 존대어를 쓰실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 번역의 원칙을 직역으로 삼고 있지 않고 다양한 존대어로 번역하고 있는 ?신약전서새번역?(1967년)과 ?공동번역?(1977년)와 ?공동번역개정판?(1999년)조차도 예수의 말씀은 모두 일관되게 “너”와 “~하다” 체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체는 평등주의에 영향을 받고 있는 현대 독자들에게 어색하게 받아들여질 뿐 아니라 미래의 종말론적 심판자로서의 예수의 체면을 깎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4)“그래요.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여러분이 보게 될 것이에요.”“그렇다네.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그대들/자네들이 보게 될 것이네.”“그래.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게 돼.”
대부분의 우리말 번역본에서는 예수의 말씀을 비격식체로 번역하지 않는다. “그대들” 혹은 “자네들”과 “~하게” 체는 친밀한 대화자들 간에 점잖은 태도와 친숙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너희”와 “~해” 체는 일반적으로 어린 아이나 친밀한 친구나 친지에게 사용되는 문체이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다.
(5) 2인칭 대명사 생략과 2인칭 대명사 대신에 명사 사용
일반적으로 번역문에서 2인칭 대명사가 생략되는 경우가 종종 있으나, 본문의 경우에는 예수께서 대제사장에게 하는 답변과 산헤드린 의원 모두를 가리켜서 하는 선포,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o;yesqe의 2인칭 복수 대명사를 정확하게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한편, 우리말 대명사는 자주 명사로 대치되지만, o;yesqe에 해당하는 적절하게 대치할 명사를 찾기 어렵다. 특히, 번역자가 “~합니다” 체를 선택한다면, “여러분”과 함께 사용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여러분”은 “많은 사람들”이라는 복합어에서 온 높임 표현의 관용적인 문형으로, 어떤 명사보다도 “~합니다” 체와 호응이 맞다.
이처럼, VEgw, eivmi와 o;yesqe을 청자 존대법으로 옮기는 데는 여덟 가지 가능성이 있으나, “당신”과 “~하오” 체가 종말론적 심판자로서 예수의 선포를 위하여 가장 적절한 문체인 것으로 보인다.
6. 나가는 말
“예수께 하는 대제사장의 두 번째 심문”(14:61하)과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위원들에게 하시는 예수의 말씀”(14:62하)을 적절한 청자 존대법으로 옮기기 위하여, 화용론적 분석 기준들과 틀로 본문을 분석하였다. 먼저는 전체 담화의 사회적 상황을 살펴보았고, 대화자 간의 사회적 관계, 문화적 기대, 화자가 가정하고 있는 청자와의 관계에서 있어서의 사회적 심리 변수와 화자의 의도를 짚어보았다. 본문을 분석하면서, 재판이 벌어졌을 때의 역사적, 사회적, 종교적, 문화적 상황, 예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인자”라고 하신 것에 대한 해석, 본문비평적 이문의 발생, 구약 성서의 인용 등 주석적인 부분도 청자 존대법 번역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었다.
만약 번역 목적이 대상 본문의 자연스러움을 극단적으로 지향하는 것이라면 이 본문 담화 전체의 문체는 실제 법정 상황에서 사용되고 있는 “당신이/그대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입니까? 그렇습니다.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여러분이 보게 될 것입니다”(막 14:61하, 62하) 혹은 2인칭 대명사를 생략하거나 명사로 대치하는 “~합니다” 체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번역은 원천 본문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예수에 대한 대제사장의 적의와 예수의 힘 있는 선포, 심문 과정의 긴장, 비극적 상황을 잘 전달하지 못할 것이다. 번역자는 공적인 법정 상황을 강조하는 동시에 예수께서 그 자신과 그의 청자들 간의 미래 관계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권위를 유지시키도록 해야 한다. 번역자와 독자 모두는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실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인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를 메시아로 이해하고 인식했어야 하는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위원들은 실패했고 그를 거부했다.
반면에 번역 목적이 원천 본문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것이거나 직역을 따르는 것이라면, 하나의 등급으로 된 청자 존대법, 즉 “너”와 “~하다” 체로 번역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하나의 등급으로만 된 청자 존대법으로 번역되면 등장인물 간의 첨예한 대립, 긴장 관계, 생동감이 퇴색되고 단조롭게 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비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번역자는 대상 본문을 지향하는 번역과 원천 본문을 지향하는 번역의 중간점을 찾아야 하며 성경 본문의 심문 상황과 실제 법정 상황을 모두 고려하여 적절한 문체를 선택해야 한다. 또 극단적인 선택을 피하고 가능한한 정확하게 원천 본문의 메시지를 독자 공동체에 소개해야 한다. 이를 통하여 번역자는 적절한 청자 존대법으로 번역하여 대화자들 간의 힘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역동적이고 흥미진진하고 실제적인 번역문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을 가장 적절하게 옮기는 청자 존대법은 “당신이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요? 그렇소.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당신들이 보게 될 것이오”였다. “당신”과 “~하오” 체는 법정에서 자주 쓰이는 말은 아니지만, 심문 과정의 긴장을 잘 전달하면서 대제사장이 예수를 모욕하고, 예수께서 산헤드린 앞에서 권위 있고 힘 있는 선포를 하시는 데 적절하다. 또 대제사장의 첫 번째 심문과 호응을 이루며 현재 재판장으로의 대제사장과, 미래의 심판자로서의 예수의 문체에 균형을 이룰 수 있다. 물론, 번역자가 한 문체를 선택함으로써, 존대법이 없는 원천 본문과 존대법이 있는 대상 본문의 언어학적 차이 때문에 항상 잃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본문의 대화문을 가장 적절한 청자 존대법으로 옮겨야 하는 번역자들을 위해서는 이 글에서 제안한 화용론적 기준들과 틀이 유용할 것으로 보인다.
◇ Abstract
Jesus' Trial before the Sanhedrin
-Problems of Translation into Addressee Honorifics (Mk 14:61b, 62b)
Ji-Youn Cho
(Westminster Graduate School of Theology)
This study deals with the difficulties faced when translating the high priest’s second query to Jesus (Mk 14:61b) and his subsequent response and declaration before the Sanhedrin (v. 62b) into an honorific language. Translating Biblical Greek into honorific languages is especially complex for Asian Bible translators. In particular, Korean addressee honorifics, viz. the honorific second person pronouns and the honorific verb ending forms, are the most complex systems among the honorific languages. The difficulty lies in the fact that the translator's selection of the addressee honorifics is indeterminable in the grammar and syntactic structure of the source text, which does not include the grammatical morpheme.
In order to translate into the proper addressee honorifics, this study first analyzes the biblical text with an established criteria and a theoretical framework for translating into addressee honorifics. Second, the paper also discusses the possible selections of addressee honorifics for a new Korean church translation. After dealing with the formality of the situation, the dialogues (Mk 14:61b, 62b) are analyzed according to the following criteria: (1) social relationship of interlocutors, (2) cultural expectation in social settings, and (3) social variables of a speaker's assumption and intention toward the addressee(s).
After examining the source text, the formal limited non-deferential tangsin and hao forms are suggested as the most appropriate forms for the high priest's second query to Jesus (Mk 14:61b) and his response and declaration before Sanhedrin (v. 62b). Although it is possible that modern readers may regard these forms as too archaic or authoritative, the forms appropriately express the assumed authority of the high priest and Jesus' decisive declaration that he is the Messiah and divine Son. The selection of the addressee honorifics is based on the translator's exegetical research such as the formality of the situation, examination of textual variants, the allusions to the Old Testament, etc.
주제어 :
예수의 재판, 청자 존대법, 번역, 사회적 관계, 문화적 기대, 사회적 심리적 변수들
Jesus' trial, addressee honorifics, translation, social relationship, cultural expectation, social variab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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