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신학/New Testament (신약신학)

신약성경 시대의 유대교

משׁה 2009. 9. 1. 19:22

신약성경 시대의 유대교

 

 헬라주의 시대에 있어서 유대교의 정치사

 

 김태훈 교수

 

유대의 역사는 아랍 제국을 지배했던 거대한 세력이 통치하에서 때로는 소수 민족으로서 간섭받지 않는 독립적인 생활을 잠깐 동안씩 했음, 때로는 침입으로 삶의 형태를 간섭받음.

 

1. 페르시아 지배하의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역사는 바벨론 포로시대 부터 시작된다.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의하여 사마리아가 멸망한 후 몰락.

유다 왕국은 기원전 587년 바벨론의 의하여 점령당한 이후 몰락하. 예루살렘은 파괴되었고 민족의 지배층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다. 이때 성전 예배가 금지되었음, 그래서 선택받았다는 것을 의식하려는 표지로써 안식일 계명과 할례의 계명을 준수.

신 바벨론 제국을 군사적 일격으로 무너뜨린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승전의 행군과 함께 왔음. 그는 기원전 539년 승리자로 바벨론에 입성.

바벨론의 페르시아는 대대적인 이주를 강요 하거나 어디에서나 단 하나의 국가 종교만을 신봉하도록 요구 하지 않았음.

 

페르시아 정부는 아람어를 사용 .

주전 5세기에 바벨론에 살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유대인 공동체를 건설 하자는 강한욕구.

유대인들은 율법에 구속받고 왕의 포고가 율법을 보증함으로써 이스라엘은 페르시아의 당국의 보호 아래 유대인들은 간섭받지 아니하고 율법의 규정에 따라 그들의 삶을 영위 했음.

 

느헤미야와 에스라에 의하여 다른 민족들과의 어떠한 결합도 용납 되지 않도록 되었던 예루살렘 공동체는 그들을 다른 민족들과 구별 하였으며 그들과는 어떠한 교역이나 거래도 하지 않았음. 따라서 사마리아 지역의 사람들 가운데서 반감이 일어났고 이후 결국은 사마리아와 유대의 정치적인 분리를 초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사마리아인들이 알렉산더 대왕의 치하에서 비로소 가리짐(Garizim)에 성전을 건설하도록 재가를 받았다고 기록. 아마도 그들의 성소 건축은 그 이전에 이루어진 같음.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성소를 소유하게 된 이후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에는 더욱 격렬한 적대감이 지배하게 되어 끝내 전쟁의 충돌이 일어났고 기원전 128년 요하네스 히르킨(Jonannes Hyrkan)의 지도하에 가리짐의 성전을 파괴. 오늘날에도 소수의 사마리아 공동체는 이곳에서 매년 그들이 보존해온 옛날의 관습에 따라서 유월절 축제를 지냄.

 

예수님의 시대에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교제 하지 않음. 그러나 초대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생겨난 분열을 극복 하였으며 복음을 사마리아에 전파.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2. 알렉산더 대왕과 이집트의 지배하에 있는 팔레스타인

 

기원전 333년 이수스(Issus)의 전투에서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3세를 격파 하였으며 이 승리로 인하여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에 이르는 길이 열림.

 

Tyrus의 요새는 7월을, Gaza는 2개월을, 유대는 변변한 저항 한번 못해보고 Parmenio 사령관에게 항복.

유대인들은 평화적으로 항복하였기 때문에 페르시아 지배 하에서 누리던 권리를 계속 가짐. 유대인 공동체가 누리던 권리의 상황에 대한 지배권의 변화에 따라서 외적인 변화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지만 온 나라 안에 희랍인들이 들어오게 됨에 따라 그들 내부의 생활은 깊은 영향.

옛 페니키아와 블레셋 후손들은 그들의 언어들 버리고 희랍어를 사용. 헬라주의 세계 속에 완전히 젖어들어 그들의 독자적 생활을 상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많은 군중들 앞에서 변명하려 할 때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희랍어가 아닌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사용하는데 놀람(행22:2).

언어와 더불어 헬라주의 문명이 또한 이 땅에 들어 왔다.

기원전 323년 33세로 알렉산더가 갑자기 죽게 되자 신속하게 합병된 제국이 사령관들의 후계자 싸움으로 제국의 통일은 깨짐. 이집트에 주둔하던 총독 톨레메우스(Ptolemaus)는 팔레스틴을 점령하여 자기의 권력 소유로 만듬. 그러나 시리아를 다스리던 안티고누스(Antigonus)가 팔레스타인 다시 차지하였고 옛 페르시아 제국을 거의 차지(기원전 315년).

그러나 다시 남부 시리아가 프톨레미의 지배하게 들어가게 됨. 그도 역시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의 내적인 용무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음.

유대 관청에 출현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지만 기원전 1세기경부터 사제들과 장로들에 이어 세 번째 무리로서 서기관들.

 

산헤드린에서는 예루살렘의 영향력 있는 가문의 우두머리들인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대제사장을 지지. 대제사장의 사회로 유대 민중들이 처한 모든 세상적인 용무와 종교적인 용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회합한 이 유대인 최고 관청을 의미.

 

3. 시리아 지배하에 있는 팔레스타인과 막카베어 독립전쟁

 

시리아왕 안티오쿠스 3세는 3세기에서 2세기로 넘어갈 때 이집트로부터 팔레스타인 빼았음. 유대인들은 즉시에 판도가 시리아인 들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졌다는 사실을 간파하여 전쟁 동안 시리아의 편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승리를 거둔 후 시리아인 들로부터 호의적인 대우.

성전 의식에 드는 비용들은 일정한 한도에 이르기까지 국고에서 지불, 장로회의의 회원들과 서기관들에게는 면세의 특권이 주어짐. 그러나 이러한 특권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시리아는 제국 안에 있는 여러 다른 민족들을 밀접하게 결합시키려고 하였음. 유대사회는 이러한 정책에 대립. 뿐만 아니라 유대사회에서도 많은 헬라의 추종자들이 있었기 때문.

 

제사장은 유대 사회의 지도자로서 시리아 왕의 법률과 명령이 철저히 시행하도록 노력.

기원전 175년에 안티오쿠스 4세가 시리아의 통치권을 계승하였을 때 예루살렘은 율법을 준수하는 경건한 사람 오니아스가 대제사장이었다. 그러나 그의 동생 요수아와 헬라주의 추종자들이 거액의 금액을 시리아에 받쳐 대제사장직을 빼앗아 자신이 대제사장에 취임. 이제부터는 대제사장의 직위는 매매 할 수 있는 정치의 대상. 요수아는 야손이라고 헬라식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세금을 인상하여 거둬들인 거액의 금액을 시리아에 바침.

 

야손이 3년 동안 직무를 수행하였을 때 메네라우스라는 사람이 예전에 야손이 그렇게 하였던 것보다 더 많은 금액을 시리아 왕에게 주고 야손 대신 대제사장이 됨. 대제사장의 직위는 매매할 수 있는 정치의 대상이 되어 버림.

 

국제정세가 바뀌어 시리아를 다스리는 안티오쿠스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직위에서 쫓겨난 야손이 이 기회에 무력으로 메네라우스를 몰아내고 대제사장직에 다시 즉위하여 예루살렘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장악. 안티오쿠스가 이 사실을 알고 매우 분노하여 다시 메네라우스를 복직시킴. 따라서 메네라우스는 시리아의 왕의 지지에 의해서만 그의 지위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기원전 169년 안티오쿠스가 전쟁으로 바닥난 국고를 충당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강탈 하였을 때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음. 성전의 값비싼 기물들, 번제 제단과 일곱 촛대 그리고 제사상 등을 안디옥으로 가져감(막카베어 1서:20-24).

성소에 행해진 만행이 2차에는 더욱 가혹.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졌고, 안식일을 지키고 자녀들에게 할례를 베푸는 행위가 유대인들에게 사형의 협박으로 금지. 이때 예루살렘의 번제 단에는 이교도의 제단이 세워졌고, 즉 제우스에게 희생 제물이 드려졌다(기원전 167년). 돼지들이 제물로 드려졌다. 이제 예루살렘 성전에서 여호와, 바알, 제우스가 불리든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짐으로 유대인들에게는 비참한 전율.

 

그러나 신앙공동체가 아무런 저항 없이 선조들의 신앙을 버릴 수는 없음. 다니엘서는 이러한 곤궁에 빠진 공동체에 대하여 위로하는 말로 쓰여 졌다. 여기에는 박해와 고난이 하나님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곧 종말이 와야 하는 마지막 때의 표징으로 이해됨.

 

경건한 유대인들은 율법에 어긋나는 복종을 거부하고 기꺼이 고난과 죽음을 감수(막카베어 2서 7장).

모데인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봉기는 왕의 감독관이 유대인들에게 이방 제물을 봉헌하도록 강요하자 마타디아스라는 늙은 제사장(할아버지의 이름을 따라서 하스모네어)이 제단 위에서 희생제물을 드리려고 준비하던 한 유대인을 죽이고 희생 제물을 드리도록 강요했던 왕의 관리도 쳐 죽임. 이 일로 인하여 마타디아스와 그의 아들들은 유다 광야의 산골 속으로 숨어야 했다(막 1서 1:15-28).

마타디아스가 죽자 그의 아들 유다가 전사들의 지휘권을 이어 받음. 그는 별명이 막카메어라고 함. 막카베어는 망치와 같은 자를 뜻함.

 

안티오쿠스는 그의 장군 리시아스를 팔레스틴으로 보냄. 유다는 그와 싸워 승리하였고,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더럽혀진 성전을 회복하여 율법에 규정된 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회복. 기원전 164년 12월 25일에 제단이 새롭게 봉헌되고 일주일 동안에 축제로서 율법에 합당하게 예배가 다시 드려짐. 이때부터 유대교는 매년 성전 봉헌축제에서 이 사건을 기억하며 암흑과 어둠이 빛에게 쫓겨나야 한다는 표징으로 등불에 점화.

 

막카베어의 성과에 많은 유대인들이 만족. 그러나 기원전 162년 시리와 왕 데메트리우스는 알키무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 아론지파 출신의 제사장. 그러나 유다(마카베)와 그의 동료들은 시리아를 불신. 그들은 정치적 독립을 원함. 그 과정 중에 유다는 전사하였고 그의 동생 요나단이 후계자가 되어 사령관과 우두머리 일뿐 아니라 대제사장이기도 했다.

 

기원전 143년에 시리아 인들의 음모로 요나단이 살해되자 그의 세 번째 동생인 시몬이 전투의 지휘권을 이어 받음. 시몬은 예루살렘 성의 시리아 수비대와 싸워 승리하여 그들을 몰아냄.

이제 예루살렘은 이방 지배로 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어 시몬은 이방으로도 독립을 얻을 수 가 있었다.

대제장과 유대인의 사령관, 그리고 유대인이 영도자의 직위가 기원전 140년에 국민들에 의하여 시몬에게 세습되도록 주어졌고, 하스모네어 왕조가 세워 짐.

그러나 많은 제사장들과 경건한 사람들은 대제사장 혈통 출신도 아니고 다윗 혈통의 출신도 아니면서 대제사장의 직위를 이스라엘에 대한 통치자의 직위와 결합시켜 버린 하스모네어의 지배에 대하여 대립. 결국 율법에 엄격한 유대인 그룹이 율법에 대하여 온전한 복종의 생활을 영위하여 위하여 사해 바닷가로 물러감.

 

4. 하스모네어 왕국

 

하르칸이 죽고 난후 아들인 아리스토불이 권력을 장악. 아리스토불이 죽고 새로운 지배자 알렉산더 얀네우스(요나단)는 800명의 폭도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 한 후 십자가에 메달아 죽였다고 함. 그는 임종 하면서 그의 부인 살로메 알렉산드리아에게 바리새인과 다시 화해하도록 충고 했다고 함.

기원전 67년 그녀가 죽고 합법적인 아들 히르칸 2세가 법에 따라서 왕위를 이어 받음. 그러나 그의 동생 아리스토블 2세가 왕위를 놓고 그와 쟁탈전. 그러나 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 아랍 제국의 운명과 팔레스타인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는 로마의 월등한 세력이 뛰어 들었다.

 

5. 로마 지배하의 팔레스타인

 

유대에서의 서로 대립하던 두 파벌, 아리스토불과 폼페이우스 사이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지배권을 가지고자 대립. 3개월간의 공격 끝에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에 들어갔으며 또한 지성소를 실제로 봄. 그러나 그는 지성소에서 아무것도 탈취하지 않았으며 곧 다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명함. 방해 받지 않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유가 성전 공동체 뿐 만 아니라 제국 내에 있는 회당 공동체에도 보장.

폼페이우스는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정리. 아리스토불은 그의 두 아들 알렉산더와 안티고누스와 함께 로마로 압송되었으며 하르칸은 다시 대제사장의 직위에 임명.

해안 지역에 있는 도시들은 독립. 하스모네어 왕국에 종속되었던 동부 요르단에서 북부 다마스쿠스, 남부의 필라델피아(암만)에 이르기까지 자유로운 도시 동맹으로 통합. 일명 데카폴리스라고 불리는 이 동맹(열개의 도시들)은 오랫동안 지속.

 

로마의 식민지 총독 Gabinius는 기원전 57년에 팔레스타인을 직접 통치.

유대는 예루살렘과 가자와 여리고, 갈릴리는 세포리구역으로 베뢰아는 아만투스 구약.

헤로데스(갈릴리 지역의 통치자)는 로마의 지지아래 권력을 잡음. 그는 교활하고 잔인, 과감한 결단을 하고 단호히 행동하는 대담하고 재치 있는 사람임.

 

디아스포라에게도 헤로데스는 유대교의 보호자로 등장 했으며 회당 공동체의 독립적인 생활을 장려. 그는 이후 로마의 정치적인 상황에서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의 신뢰와 도움으로 받음. 기원전 40년에 로마 원로원의 공식적인 결정으로 그는 유대의 왕으로 임명. 기원전 37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왕위에 오름. 그는 하스모네어 가문의 출신인 미리암네와의 결혼을 통하여 옛날 왕족과 유대를 맺음. 그는 이두매(에돔) 출신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동족으로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는 염려로 늘 불안 해 함.

그는 왕으로서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이, 희랍인들에게는 희랍인이 되려고 함.

그는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솔로몬 성전의 모습을 다시 재현하기 위하여 거대한 성전을 정확하게 건축하도록 지시하.

 

예루살렘에는 안토니아 성이 성전 지역 바로 옆에 세워져서 헤로데스는 늘 이곳에서 성소 주변과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감시. 그는 사해 바다 서쪽에 가장 튼튼한 요새 마사다를 구축.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또한 여리고에 머물 수 있는 궁전을 세웠고, 소위 통곡의 벽이라는 건물이 헤로데스 시대의 성전 건물로 남아 있고 안토니아 성의 기초가 아직도 남아 있음.

 

그의 말년에 세례 요한과 나사렛 예수가 태어남(마2:1, 눅1:5).

그의 세 아들이 그를 암살. 아르케라우스, 헤로데스 안티파스, 필립푸스에게 이미 유언으로 나를 나누어 줌.

아르케라우스는 왕이 되어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를 다스렸으며,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동부 요르단의 베뢰아, 필립푸스는 북부의 동부 요르단을 다스림.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안티파스와 필립푸스에게는 분봉왕, 아르케라우스는 왕의 칭호가 아닌 대공으로 부름. 물론 백성들에게는 칭호에 별 의미가 없음. 모두가 왕. 신약성경에는 아르케라우스(마2:22)도, 헤로데스 안티파스(막6:14, 마14:9)도 왕으로 호칭하고 있음.

매우 포악하게 통치한 아르케라우스는 백성들에게 가장 미움을 받음. 그래서 신하들이 아우구스투스에게 사절단을 보내어 고통을 호소하였고, 아르케라우스는 기원 6년에 그의 지위에서 밀려나 갈릴리로 추방. 그가 다스리는 지역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일반적으로 존경받고 있던 로마 총독에게 예속.

예수 시대에는 본디오 빌라도가 로마총독으로 있었다(기원26-36).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그의 직무 수행은 뇌물, 폭력, 약탈, 불법, 무례, 제판 없는 사형집행, 지속적인 잔학으로 이루어 졌다고 보도 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로마로 소환.

 

헤로데스 안티파스는 기원전 4년부터 기원후 39년까지 통치하였다. 그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수도를 건설하여 통치자 황제의 영예를 위하여 이름을 티베리아스라고 붙였다(요6:1, 23, 21:1). 그는 첫 번째 부인 다마스쿠스 왕국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냄. 그리고 이복동생의 아내 헤로다아스로 부터 살로메가 태어남.

세례요한은 헤로대스의 불의를 적나라하게 밝혔기 때문에 체포 되었으며 헤로디아스의 포악한 적대감으로 박대를 계속 받다가 결국 처형 됨. 헤로데스 안티파스는 예수가 살았던 지역의 영주.

그러나 예수는 그를 여우라고 부름.

 

필립푸스는 북부의 동 요르단을 다스림. 그는 가이사라 빌립보라고 이름 지은 새로운 수도를 건설(막8:27). 로마황제의 초상화를 새긴 화폐를 주조 하게 하였던 첫 번째 유대인 군주.

헤로데스 왕의 손자인 아그립파는 로마에 체제하면서 로마 황제 칼라굴라에게 호의를 얻어 기원37년 황제는 그에게 필립프스가 다스리던 지역을 주었다. 헤로데스 아그립바는 바리새인들을 위하여 예루살렘의 기독교 공동체를 박해하고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를 처형 하였으며 베드로를 체포. 성전에 자신의 신상을 세우도록 하였다(막13:14). 그 무렵 주후 41년에 암살당함 그의 후계자 역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자신이 신적으로 경배되기를 요구.

 

주후 52년부터 펠릭스가 총독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으로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호의를 얻어 이러한 높은 지위에 오름.

 

6.유대 전쟁과 바르 코흐바의 폭동

 

1) 유대 전쟁 (66-73년)

 

유대인들은 로마 점령군의 안하무인격인 태도에 증오. 가이사랴에서 반 유대인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유대인들은 로마군에게 진압해 주기를 요청. 그러나 그들은 방관. 지방 총독이었던 게시우스 플로루스(Gesius Florus)는 66년에 성전에서 17달란트를 강탈하였으며, 유대인들은 그를 조소. 이에 격분한 총독은 가이사랴에서 2개 대대를 예루살렘으로 파견. 그러나 폭도들에 의해 1개 대대는 흩어지고, 1개 대대만 안토니오 요새에서 저항하고 있었으며, 총독은 가이사랴로 후퇴. 예루살렘을 점령한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드리던 황제에게 봉헌하는 제물을 중지시켰고 이를 말리려던 대제사장은 암살.

 

이 소식을 들은 시리아에 있던 로마 총독 제스티우스(Gestius)가 즉시 군대를 이끌고 진격해. 그러나 그들도 역시 유대인들에게 패배하고 시리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들은 곧 닥쳐올 로마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젊은 사제인 요세푸스를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파견하여 전열을 정비. 이 소식을 들은 네로 황제는 가장 용맹한 베스파시안(Vespasian)을 지휘관으로 파견하였고, 그는 그의 아들인 티투스(Titus)와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건너왔다. 베스파시안은 안디옥에서, 그리고 티투스는 이집트로부터 군대를 이끌고 옴. 그들의 첫 번째 공격 지역은 젊은 사제 요세푸스가 있었던 북부 지방인 갈릴리. 갈릴리의 유대인들은 47일간 항쟁하다가 마침내 무너지게 되었으며, 젊은 사제인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이 장차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여 구원을 받음. 그는 로마 사령부에 머물면서 "유대 전쟁사"를 기록하게 됨. 혁명 당원(열심당)의 지도자인 요한네스는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고, 67년에 갈릴리 전체는 로마의 손에 넘어가게 됨. 예루살렘에서는 요한네스와 기오라가 유대인의 군대를 이끌었으며, 전쟁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요단에 있는 페트라로 도망. 69년에는 베스파시안이 황제로 추대되어 로마로 돌아갔으며, 그의 아들인 티투스만 남아 전쟁을 지휘. 마침내 티투스는 70년에 4개 군단과 강력한 지원군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을 점령. 성전은 불에 타서 약탈을 당하였으며, 지도자인 요한네스와 기오라는 로마로 압송.

 

끝까지 마사다에서 죽기로 항전하던 전사들도 마침내 73년(또는 74년 초)에 점령당함. 전쟁 후에 황제 베스파시안은 유대를 사마리아에서 분리시켜 황제의 식민지로 만듬. 따라서 로마 총독이 다시 가이사랴에서 집무하게 되었고, 이곳에는 로마의 제 10군단이 상주. 성전이 무너지게 되자, 이제는 제사장을 비롯한 사두개인들은 사라짐. 그리고 율법학자를 중심으로 한 회당이 유대인의 종교와 삶의 중심이 되었다. 그 후 로마는 회당을 보호해 주었다.

 

얌니아에서는 사제와 장로들은 회원이 되지 못하였고, 율법 학자들로 구성된 산헤드린이 유대인의 모든 정책을 결정. 2) 바르 코흐바-별의 아들-의 폭동 (132-135년)

 

하드리안 황제(117-138년)의 통치 때에 유대인들의 봉기. 하드리안은 130-131년에 동양을 여행하는 중에 예루살렘 성전 터에 쥬피터 신전을 세우고, 유대인들의 할례를 금지시키라는 지시. 성소에 이방 신전을 세우고 할례를 금지 당한 유대인들은 분노. 분노한 폭도들은 유대와 예루살렘을 기습하여 점령하여 성전에서 다시 제사를 드림. 그리고 새로 얻은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동전을 주조하고 이 해를 첫 해로 하는 새로운 기원을 세움. 이 폭동의 지도자는 당시에 존경을 받던 랍비 아키바(Aqiba)였는데, 유대인들은 그를 민 24:27에 예언된 약속된 '별의 아들'로 보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해를 '메시야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으로 봄.

 

그러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기독인들은 아키바를 메시야로 보지 않음. 그래서 많은 기독인들이 체포되고 투옥. 그러나 계속되는 로마군의 공격에 유대인들은 서서히 무너져감. 그리하여 처음에는 아키바를 메시야로 보던 백성들은 점차 실망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로마군이 그들을 점령. 이로 인해 성전에는 다시 쥬피터 신전이 세워졌고, 예루살렘에는 이방인들이 거주하고 유대인들의 출입이 중지. 그들은 4세기에 이르러서 아브월(7-8월) 9일에 성전 가운데 남아있는 한 쪽 벽에서 통곡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음. 폭동을 지지하던 수많은 율법학자들은 죽임을 당하게 되었으며, 아키바는 처참하게 처형을 당함. 그러나 이들의 장엄한 죽음은 유대인들을 다시 율법을 중심으로 뭉치게 만들었으며, 선조들의 신앙을 고수할 수 있게 해줌.

 

참고: 눅 21:20에는 “그러나 너희는 예루살렘이 군대에 포위당하는 것을 본다면 도성의 파멸이 가까운 줄 알라”(참고 눅19:43-44).

소수의 무리들은 마사다로 후퇴하였고 로마군은 포위하여 토성을 쌓아 정복하였을 때 자결한 시체들만 가득. 생존자는 다섯 명의 어린이와 함께 지하의 상수도관에 숨어 있던 두 명의 여자들만이 유대인들의 종말을 지켜보았다. 기원 73년 아마도 74년 초였을 것이다. 마사다가 함락됨으로 최후의 항거도 끝남.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경배는 회당에서 계속될 수 있었으며 회당의 예배에서 성전의식의 단편들이 전승됨.

랍비 아카바 그가 메시아라는 전설은 사라 졌다. 이 일 이후로 유대교에서는 거짓 메시야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고, 하나님의 유일성을 모독할 때만 비로소 죄를 묻게 된다(요5:18, 10:36).

기원 4세기에 와서야 그들에게 슬픔의 날에는 도성에 들어가서 헤로데스의 성전 가운데 남아있는 벽에서 통곡의 기도를 할 수 있도록 허용 되었다.